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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책 편지] 과학이 어려운 나에게
Bio통신원(Aireen)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 차 한 대 없는 도로 위를 달려 한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전교생이 서른 명도 안 되는 학교, 분반을 하기에는 수가 너무 적어 함께 수업을 듣고, 점심시간이면 선생님부터 학생들까지 모두 한곳에 모여 밥을 먹는 작은 시골 학교. 저는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지원을 받는 과학커뮤니케이터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학교 방문 강연을 진행했고, 이 학교 역시 강연의 일환으로 방문하였습니다. 갓 열넷, 많아야 열여섯 살의 학생들 앞에서, 역시 한 명의 학생일 뿐인 제가 이들의 관심을 모두 끌 만한 주제가 있을까요? 과학 강연에서 제일 힘이 센 건 역시 실험입니다. 학생들의 주의가 약간 산만해질 즈음, Ep tube와 파이펫을 꺼내면 아이들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기 시작합니다. Bradford 시약 반응, 단백질 찾아내기 등 간단한 실험을 진행하면 남은 수업 시간이 모자랄 만큼 집중하는 학생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실험을 통해 관찰한 내용들을 이용해 놀라울 만큼 날카로운 질문이 나오는 걸 보니, 오늘 강연은 성공적이었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100년 전에도 학생이든 선생님이든 같은 생각이었나 봅니다. 과학 수업에서 제일 힘센 건 실험이라고요. ‘과학이 어려운 딸에게’ (구판: 퀴리 부인이 딸에게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는 마리 퀴리가 1907년부터 딸 이렌 퀴리와 동료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과학 수업을 옮겨 놓은 책입니다. (이 큰딸 이렌 졸리오퀴리가 퀴리 가의 2대째 노벨화학상 수상자입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창의 과학 교육, 혹은 대안 교육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이 수업을 들은 학생 중 한 명이 충실하게 적어 놓은 노트를 바탕으로 마리 퀴리가 그 당시 진행한 수업을 되살렸습니다.
어떤 내용을 배웠는지 수업 내용을 들여다볼까요. 책장을 넘겨 보면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기초적인 개념들이 순서대로 나옵니다. 공기는 물보다 가볍고, 고유의 압력을 갖고 있다는 것.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고, 물질의 종류에 따라 같은 부피라도 무게가 다를 수 있다는 것 등. 중간에 우리가 실험실에서 매일 보던 사이펀과 스포이드가 반갑습니다. 이 수업의 가장 큰 특징은 실험 수업이라는 것입니다. 실험하는 친구들이 열 살 남짓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마리 퀴리가 얼마나 학생들의 눈에 맞춰 이 수업을 진행했는지 다시 감탄하게 됩니다. 첫 수업을 함께 들어 볼까요? 유리병 하나와 수조를 이용한 간단한 실험으로, ‘그냥 알고 있는 것’을 대답하는 것보다, ‘어떻게 그것을 알아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주지시키고, 정확한 대답을 위해 필요한 전제를 먼저 생각해 보게 하는 등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도록 이끄네요. 직접 실험할 수 없는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간접적인 확인 실험을 설계하고 수행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실험으로 배운 법칙이라면 절대 헷갈리지 않을 것이고, 법칙보다 더 중요한 ‘과학적 방법을 통해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사고방식을 얻은 것이 수업이 끝난 후 얻은 제일 큰 수확일 것입니다. 추천사에 적힌 ‘과학의 수평적인 이동과 수직적 이동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는 찬사가 응당하지요. 에브 퀴리가 어머니에 대해 쓴 전기 ‘마담 퀴리’ 에는 이 수업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둘째 딸 에브 퀴리는 피아니스트이자 사회운동가로 과학과 상관없는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쳤습니다.)
위에 나열한 법칙들을 어떻게 깨달았는지 기억나시나요? 제게는 ‘그 깨달음의 순간’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연 현상을 먼저 보며 질문을 찾고 궁금해하기 전에 관련된 법칙을 누군가에게 듣거나 책에서 읽었던 느낌이랄까요. 그렇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넘겼던 것들에 대해 ‘현상을 먼저 관찰하고’, ‘관찰한 현상에 대해 토론한 후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실험을 진행하고’, ‘거기에서 법칙을 깨닫는’ 수업을 같이 따라가는 과정이 즐거웠습니다. 머릿속에 실험을 그려 보며 따라가다 보니 같이 실험을 하고 있는 듯한 생각도 들고요. 책을 읽는 동안 함께 실험을 수행하며 과학 연구의 한 켠을 지켜보는 셈이지요. 매일 수행하는 연구 활동 중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 설계’ 와 ‘해당 실험 수행을 통한 가설의 검증’ 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중요한 건 ‘현상을 먼저 관찰하고 이 현상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인데 내가 눈앞에 보이는 일들에 묻혀 정말 중요한 질문을 등한시한 건 아니었는지도 되묻게 됩니다.
분야 특성 상 wet 실험을 배제하기 어렵기에, 생명과학도들에게 실험이란 더더욱 애증의 단어일 것 같습니다. 실험을 아예 싫어하면서 이 분야에 진입한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연구를 하다 보면 어떻게 실험을 좋아하기만 할 수 있을까요. 잘 안 되는 실험을 되게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잘 되던 실험이 갑자기 안 되는 건 정말 미칠 노릇입니다. 어느 정도의 운이 따라줘야 타겟을 찾을 수 있는 스크리닝이면 가늠할 수 없는 인고의 시간을 겪게 되기도 하고요. 가설에 부합하지 않는 실험 결과가 나오면 원망스럽기도 하고, 실험이 잘못된 건지 가설이 잘못된 건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막막할 때도 있습니다. 모든 연구자들의 운명이겠지요.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는 순간 그 일 때문에 괴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걸 왜 직접 겪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을까요?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있지 않았을까요, 마리 퀴리의 학생들처럼 순수하게 눈앞에 펼쳐진 현상만 보고 신기해하던 순간과,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실험을 하며 오롯한 즐거움을 느끼던 순간들이요.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하면 실험에 대한 그 순수한 즐거움을 같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매일 진행하는, 때로는 지겹기까지 한 실험들이 누군가를 가슴 뛰게 한다는 건 뿌듯한 일입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반성도 많이 했지요. (하지만 반성을 해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실험에 지쳤던 마음이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고 오면 다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충전되고, 다시 실험대 앞에서 오롯한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글로 적으며 생각해 보니 제가 학생들과 나눈 이야기보다 학생들이 스스로 배우고, 거기에서 제가 배워 온 것들이 더 많은 실험 수업이었네요. 가끔 연구에, 실험에 지치면 이 책을 펼쳐 자상한 선생님이었던 마리 퀴리의 수업을 들으며, 학생들이 느꼈던 순수한 즐거움을 함께 맛보시는 건 어떨까요? 분명히 다시 연구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테니까요.
* 다들 어렸을 때 한 번쯤은 ‘퀴리 부인’ 이야기를 읽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 지배 하의 폴란드에서 몰래 폴란드어 공부를 하던 어린 마리 퀴리, 장학사가 갑작스레 들이닥쳤을 때 ‘우리를 다스리는 러시아 황실과 역사’에 대해 유창한 러시아어로 대답하여 위기를 넘긴 후, 장학사가 떠나자 분함을 참지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는 이야기가 특히 유명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이야기는 위 글 속에서도 언급한, 마리 퀴리의 딸인 에브 퀴리가 집필한 전기 ‘퀴리 부인’에 실려있는 내용입니다. 어린 마냐 스클로도프스카의 모습부터 퀴리 부인의 마지막 모습까지가 애정 어린 필치로 담겨 있는데요. 분량은 꽤 되지만 마리 퀴리에 대해 인간적인 궁금증이 더 든다면, 혹은 어릴 적 읽었던 ‘퀴리 부인’의 완전판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일독을 추천드립니다.
Reference
1. 과학이 어려운 딸에게 (마리 퀴리 / 이자벨 샤반 지음, 자음과모음, 2004))
2. 마담 퀴리 (에브 퀴리 지음, 이룸, 2006)
3. 사진: Ève, Marie and Irene Curie in 1908, licenced under the CC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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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의 힘을 믿는 연구자.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몸속 도구들이 생명을 만들어내고 삶을 조절하는 것에 매료되어 생명과학 연구의 길을 걷게 됐고, 연구를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들을 전하고 싶어 과학커뮤니케이션에 발을 디딘 사람. 우리가 하는 연구의 본질도 결국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고 이를 전달하는 데 있다고 믿는, 갓 박사를 단 새내기 연구자가 전하는 연구 활동 중 마음에 울림을 준 이야기와 책에 대해 나누는 감상들. 여러분의 곁에는 어떤 책들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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