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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에게 보내는 철학 서신] 1-7 러커토시 임레, 다시 과학의 진보에 대하여
오피니언 갑오징어 (2020-09-15)

일러두기

●    라카토스의 논의는 다음 번역본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Lakatos, Imre. 「반증과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들의 방법론」, 조승옥·김동식 옮김, 『현대 과학철학 논쟁』, 아르케, 2002: 157~318쪽. (이하 「방법론」으로 지시.)
●    이 글의 주인공 Lakatos Imre는 헝가리인이므로 국립국어원의 헝가리어 표기법에 따르면 한글로는 '러커토시 임레'로 표기해야 한다. 단, 제목에서만 이 표기를 사용하고, 본문에서는 기존에 통용되던 표기인 '라카토스'를 사용하였다.

생애 1) 

아마도 라카토스의 삶은, 이 책에서 소개할 세 명의 과학철학자 가운데 가장 극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극적인 모습의 많은 부분은 그가 헝가리인이라는 사실에서 온다. 동유럽 중부에 있는 작은 나라 헝가리는, 1940년대부터 50년대에 걸쳐 주변 대국의 움직임에서 유래한 정치적 격변을 계속해서 겪었기 때문이다. 1922년 태생인 젊은 라카토스는, 1957년 영국으로 탈출할 때 까지 조국의 격변 속에서 격정적인 활동을 벌이게 된다. 

라카토스에게는 다행히도, 나치 독일은 1944년이 되어서야 헝가리를 침공하여 합병한다. 이전까지 헝가리는 나치의 동맹이었기 때문에, 유대계였던 그와 그의 가족들은 이 시기 나치에게 체포 당해 수용소에서 사망하고 만다. 그는 가족을 구하지 못했고, 가까스로 혼자 위험을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1940년에 입학한 데브레센 대학 시절부터 그는 마르크스주의 집단에서 활동을 계속해 왔고, 소련군이 몇 달 지나지 않아 헝가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에 그의 이후 경력은 자연스럽게 공산화된 조국을 개혁하고 개발하는 데 집중되게 된다. 1946년에는 부다페스트의 교육부에서 봉직하면서 교육 개혁을 위한 작업에 참여하기도 한다. 47년 자연과학 개념 구성의 사회학이라는 논문으로 박사가 된 그는 49년에는 모스크바 유학길에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당시 헝가리 공산당의 철학적 입장을 대변했던 루카치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내놓았다. 이런 활동 덕분에 그는 50년 수정주의자, 반당분자라는 혐의를 받고 비밀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고문 끝에 헝가리의 북부의 동광산 지역인 렉스크 지역의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하는 처분을 받고 만다. 

53년 출감한 그는, 강제노동의 후유증으로 이를 여러 개 잃을 정도로 큰 신체적 고통을 겪었지만 여전히 스탈린주의에 대한 확신을 잃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헝가리 과학 아카데미에서 수리 철학 연구를 수행하면서 포퍼의 저술을 접하게 되었고, 점점 스탈린주의에 대한 입장을 바꾸게 된다.

그가 조국을 떠나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헝가리 민중이 일으킨 “헝가리의 봄”을 소련군이 진압해 버렸던 사건이었다(1956). 소련군의 개입으로 민중 혁명이 좌절된 조국에서 그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고, 그는 걸어서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서방으로 도주한다. 다행히 많은 학자들의 배려로, 그는 1960년 런던 정경대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라카토스의 여러 작업들은 이렇게 조국의 격변을 뚫고 나와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된 시기에 집필된 것이었다. 
 

라카토스의 초상

그림 1 라카토스의 초상. 런던정경대 철학과 홈 페이지에서.   http://www.lse.ac.uk/philosophy/lakatos/

 

라카토스의 위치 

포퍼에게 과학을 한 단어로 나타내 달라는 질문을 했다고 해 보자.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비판이라고 답할 것이다. 또한 그에게, 이 단어를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해 달라고 한다면, 그는 과감한 추측을 경험에 비추어 혹독하게 논박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것이다. 한편 쿤은 이런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과학을 대표할 단어는 퍼즐 풀이이고, 이는 기호와 같은 방식으로 제안된 어떤 광범위한 도식을 문제 상황에 알맞게 변형하여 적용해 보는 과정이라는 답을 내놓을 것이다.

양측은 과학의 핵심에 대해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는 듯 하다. 포퍼는 과학에서, 증거에 대한 정직성을, 그리고 구습에 대한 비판을 보았다. 반면 쿤은, 과학에서 과학자 사회의 규칙에 순응하는 자세를 보았다. 이런 규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예외적인 것이어서, “혁명”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의 말은, 분명 과학이 처한 한 가지 인식론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나온 것이었다. 이론의 예측과 정확하게 부합하지 않는 실험 데이터는 얼마든지 있다. 이론은 실험에 의해 혹독하게 검사되어야 한다고 했던 포퍼조차, 과학 이론의 예측은 박진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지 그 자체로 진리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론을 너무 쉽게 버렸다가는, 과학은 시작조차 하지 못한 채 끝이 날 지도 모른다. 

포퍼와 쿤의 관점은, 이런 인식적 상황에 대응하여 과학자들은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두 가지 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포퍼는, 이론은 항시적 비판의 대상이며 이상적 과학자는 경험 데이터에 정직해야 한다는 노선을 대변한다. 반면 쿤은, 데이터의 변덕에 빠져 이론을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되며 연구의 전통을 충실히 발전시켜야 오히려 지금까지 있었던 성취가 가능하다고 보는 노선을 대변한다. 이 글의 주인공 라카토스는, 이들 두 노선을 절충할 방법이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론들의 연쇄, 그리고 진보적∙퇴보적 문제교체 2) 

포퍼를 논의할 때 살펴본 “규약주의자의 술책”에서 다시 출발해 보자. 이 술책은, 경험 데이터의 변덕 속에서 지속적으로 지식을 누적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과학은 어느 정도의 변칙은 허용할 수 있고, 또 허용해야만 한다. 쿤이 가르쳐 준 것처럼, 반증만으로는 과학사를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언제 반증을 멈추고 일단 연구를 진행해야 하는지 내리는 결정이 과학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과학(사)는 이러한 결정이 누적된 일련의 이론들의 연쇄다. 

라카토스는 여기서 묻는다. 이렇게 반증을 일단 멈추자는 결단이, 과연 모두 동등한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달이 울퉁불퉁하다는 갈릴레오의 관찰이 가져온 파장에 대해 잠깐 검토해 보자. 이는 천상의 물체는 완전한 구형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을 반증하는 명백한 증거다. 하지만 당시 교황청의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을 지키기 위해 갈릴레오의 관찰에 반대되는 보조 가설을 도입한다. 달 주변을 망원경으로 보이지 않는 투명한 물질이 둘러싸고 있다는 가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라카토스는 신학자들의 이런 시도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 이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반증을 막기 위해 도입한 보조 가설은, 새로운 경험적 사실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며, 갈릴레오의 관찰이 가져온 충격을 막기 위한 하나의 임시 방편(ad hoc)에 불과했다. 이들과 앞서 살펴본 천왕성의 궤도 사례를 대조해 보자. 뉴턴 역학에 대한 반증 사례에 맞서 천문학자들이 도입한 가설은, 분명 새로운 경험적 사실에 대한 예측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예측은 해왕성의 발견을 통해 실제로 입증되었다. 

라카토스는 이런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진보”와 “퇴보”라는 말을 망설이지 않고 사용한다. 추기경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을 지키기 위해 했던 결정처럼, 새로운 경험적 사실을 예측하지 못하는 보조 가설로 이어지는 이론들의 연쇄는 퇴보적이다. 반면 천왕성의 궤도 사례에서처럼, 새로운 경험적 사실을 예측하고, 또한 실제로 이 예측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이론들의 연쇄는 진보적이다. 물론 그의 명명법에는 규범적 함축이 포함되어 있다. 퇴보적 결정으로 연결된 이론들은, 경험 데이터를 외면하고 자신을 수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이비 과학을 향해 간다. 반면 진보적 결정으로 연결된 이론들의 연쇄는, 경험 데이터에 정직하다는 점에서 정당한 과학의 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 핵심 원리와 보호대 3) 

이론들의 연쇄는 일정한 틀을 이루면서 발전해 나간다. 라카토스의 중요한 기여는, 바로 이 틀의 구조에 대해 한 가지 강력한 분석을 내놓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 구조의 핵심부에는 수정이 면제된 상태이며 어떤 과학 이론의 정체성과도 같은 주장들로 이뤄진 핵심 원리(hard core)들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이 주변에는, 핵심 원리를 경험 세계와 연결하거나, 변칙적인 사례를 처리할 해석의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된 보호대(protective belt)들이 둘러싸고 있다. 앞서 살펴본 진보와 퇴보는, 주로 이러한 보호대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라카토스는 핵심 원리를 ‘소극적 연구 지침’이라는 말로도 부른다. 이 말은, 핵심 원리가 적어도 이 원리에 위배되는 작업을 하지 말고, 원리에 위배되는 반례가 나오더라도 섣부르게 이론 전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과학자들에게 준다는 뜻이다. 뉴턴의 중력 이론, 그리고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은 바로 이러한 핵심 원리의 생생한 사례다. 수많은 반례 앞에서도, 뉴턴이나 다윈은 자신의 이론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했다. 

보호대는 좀 더 ‘적극적인 연구 지침’에 기반해 형성된다. 이 지침은 가능한 반박으로 무엇이 있을 것인지, 그리고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작전을 제시한다. 이런 ’가능한 반박’은 꼭 반례나 변칙적인 사례일 이유는 없다. 예를 들어, 뉴튼은 천체를 점으로 가정하여 태양계의 움직임을 예측하였던 모형에서 출발하여 천체를 구로 간주하는 모형, 그리고 더 나아가 위성 사이의 섭동과 같은 매우 복잡한 현상까지 감안하는 방대한 모형으로 진행해 나갔다. 뉴턴은 최초의 소박한 모형에서 출발, 모형의 정밀도와 정확도를 상승시키는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시켜야 한다는 적극적 지침에 따라 행동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뉴턴의 모형은 반증보다는 입증을 통해 현실의 태양계를 모사하는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론 과학의 이론들은 이처럼 적극적인 연구 지침을 따라 진행된 결과를 입증의 과정을 통해 경험 세계와 연결시키는 작업으로 연계되는 경우가 많으며, 변칙 사례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포퍼가 큰 인상을 받았던 에딩턴의 실험 역시, 상대성 이론의 예측을 입증하여 보호대를 보강하는 과제가 중요하다는 과학자 사회의 합의가 없었다면 기획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핵심 원리든, 적극적 연구 지침이든 수정에서 면제된 것은 아니다. 앞서 확인한 진보적 문제교체와 퇴보적 문제교체 사이의 구별은 바로 이런 수정 과정에서 사용될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쿤이 말하는 과학혁명은, 바로 핵심 원리조차도 더 이상 진보적 문제교체를 해낼 수 없을 때 일어나게 될 것이다. 

 

논리와 심리 사이

라카토스의 이러한 분석은, 쿤과 포퍼가 각자의 관점을 위해 과도하게 나아간 부분을 조정하는 의미가 있다. 과학사를 신중히 분석한 라카토스는, 쿤이 말하는 과학 혁명의 과정을 좀 더 합리적으로, 그리고 경험과 과학 이론의 관계에 기반해 설명할 수 있는 틀을 제공했다. 변칙 사례의 누적으로 인해 생겨나는 심리적 쏠림 현상이 과학 혁명에 중요하게 기여한다는 쿤의 설명은 현실적일 수는 있어도, 퇴보적 문제교체에 직면해 핵심 원리를 수정하는 과정이라는 라카토스의 설명에 비해 과학 혁명을 정당화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또한 라카토스는, 이론들이 연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그리고 핵심 원리와 보호대로 이뤄진 연구 프로그램이 과학의 진보를 가능하게 했다는 지적을 통해 이론은 반증을 통해 과학의 자격을 얻는다는 포퍼의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을 좀 더 현실적으로 조정한다. 

쿤은, 포퍼가 강조했던 발견의 논리가 과학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리고 과학자 또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는 탐구의 심리학을 가려 버렸다고 강조했다. 아마도 라카토스의 관점 또한 여기에 대응해 요약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탐구의 심리학이 과학의 변화를 서술하는 데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정당화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다. 과학의 논리는, 과학사를 신중하게 검토하는 과정 속에서, 그리고 단순히 심리로만 설명할 수 없는 과학의 합리적 변화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다만, 라카토스도 인정하듯, 이론들의 연쇄를 역사적으로 고찰하여 그 속의 합리적 계기를 찾아내는 추적 작업은 사후적(hindsight) 성격을 띌 수 밖에 없다는 점은 과학의 논리를 찾아내려는 라카토스식 작업의 중요한 한계일 지도 모른다. 다음 에세이의 주인공인 파이어아벤트의 도발은 바로 라카토스식 논리가 얼마나 사후약방문에 가까운지 지적하는 데서 시작한다.

 

주석

1) 다음 사전의 서술을 참조하여 서술하였다. https://plato.stanford.edu/entries/lakatos/#Life

2) 「방법론」164~221쪽의 논의를 압축한 것이다.

3) 「방법론」 221~235쪽의 논의를 압축한 것이다. 

 

거대도시 서울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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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우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

과학철학을 공부했다. 철학이 오늘날의 정교한 지적 분업 체계 속에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거대도시 서울 철도: 기후위기 시대의 미래 환승법(워크룸프레스, 2020)』을 저술했고, 의학의 철학을 다룬 책 약간을 번역(공역)했다. 앞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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