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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를 위한 과학 책 산책] 식물학자, 꽃가루로 범죄 현장의 진실을 밝히다
Bio통신원(조희수)
“과학자를 위한 과학 책 산책”은 과학자가 아닌 필자가 과학 책을 읽고 과학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 보내는 글입니다. 과학 책에 담긴 지식을 압축적으로 전달하기보다는 필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발견하여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사회는 과학에 어떠한 요구를 하고 있고, 과학은 앞으로 사회와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을까요? 앞으로의 글을 통해 함께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식물학자, 꽃가루로 범죄 현장의 진실을 밝히다
퍼트리샤 윌트셔 지음, 김아림 옮김, 『꽃은 알고 있다: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 (웅진지식하우스, 2019).
퍼트리샤 윌트셔 지음, 김아림 옮김, 『꽃은 알고 있다: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웅진지식하우스, 2019).
고등학생 때 한 생태학자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방금 산에서 나온 것 같은 편한 등산복 차림을 하고 강연장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도 산과 들을 오가며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는데, 어른이 되어 생태학을 직업으로 삼게 된 후에도 그는 자연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 강연이 기억에 남아서인지, 이후 생태학자를 마주할 때면 자연에 대한 사랑과 넘치는 생(生)의 에너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꽃은 알고 있다』의 표지만 보고서 이 책의 저자도 그런 사람일 거라고 지레 짐작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름다운 식물 세밀화가 그려진 표지, ‘꽃’이 들어간 제목, 식물학자의 글. 그러나 이 책은 식물학자에 대한 나의 편견을 무너뜨렸다.
퍼트리샤 윌트셔, BBC Radio 4 제공
이 책의 저자인 퍼트리샤 윌트셔는 45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식물학자이자 지난 25년간 300년 이상의 범죄 사건을 해결해온 법의생태학자이다. 그는 "트위드 스커트 차림에 확대경을 들고 튼튼한 신발을 신은 부드럽고 온화한 성정의 학자(148쪽)"라는 식물학자에 대한 전통적인 선입견과는 맞지 않는다. 법의생태학자인 저자는 범죄 현장에 남겨진 범인의 흔적을 모으기 위해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때로 그의 일은 촉각을 다투다 보니 심지어는 헬리콥터를 타고 범죄 현장으로 날아가야 할 때도 있다. 현장에 남겨진 범죄자의 옷가지, 신발, 차량, 땅에 남겨진 발자국 등에서 범죄의 진실을 밝혀줄 흔적이 발견되기를 바라며 그는 흙과 먼지를 채취한다.
실험실에 돌아간 후의 윌트셔의 모습도 전형적인 식물학자의 모습과는 다르다. 범죄 현장에서 획득한 흙과 먼지에서 꽃가루나 포자를 분리해내기 위해서는 높은 단계의 보호복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유독 가스 배출 장치가 달린 곳에서 실험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토양 표본에서 채취한 꽃가루 집합체를 통해 범인이나 피해자가 머물렀던 시공간에 어떠한 식물이 있었는지 추측하고, 그 꽃가루가 가리키는 장소를 상상해내는 것이 법의생태학자인 윌트셔의 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윌트셔가 법의생태학자였던 것은 아니다. 1994년의 어느 날 경찰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윌트셔도 자신이 20년 이상 이러한 분야에서 일하게 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그전까지 그는 고고학 유적과 그 주변의 퇴적물에서 검출되는 꽃가루를 분석해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밝혀내는 환경고고학자로서 이미 오랜 경력을 쌓아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로부터 온 한 통의 전화는 이후 그의 삶의 궤적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 경찰은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히는데 그의 화분학(Palynology, 꽃가루의 형태나 발생, 성질 등을 연구하는 분야)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한 분야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학자가 다른 분야로 뛰어드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윌트셔는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분야로 뛰어들었고, 결국에는 그 분야의 일인자가 되었다.
저자가 책 전반에 걸쳐 자신이 해결한 다양한 사건 기록을 흥미롭고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의 매력 중 하나이다.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몇몇 대목에서는 과학자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는다기보다는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는 것처럼 박진감과 긴장까지 느껴진다. 법의생태학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서 추천할만하다.
일상에서 범죄와 죽음을 자주 대면할 윌트셔가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흥미롭다. 그는 수수께끼에 휩싸인 범죄 현장의 진실을 밝혀내는 사람으로서 범죄 현장에 남겨진 시체나 시체의 흔적을 관찰해내야 하고, 가끔은 시체의 피부나 머리카락에 남은 먼지로부터 증거를 채취해야 할 때도 있다. 베테랑 형사들도 쉬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평범한 식물학자였던 윌트셔가 해낼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독특한 관점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생태학자답게 죽음을 거시적인 생태계의 순환 과정 안에서 바라보는 시도가 새로웠다.
죽음 이후에 삶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 안에는 언제나 삶이 있다.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당신의 몸은 멋지게 균형 잡힌 생태계가 이루는 하나의 집합체이며 그리하여 그것은 죽음 속에 있다. 당신이 죽으면 몸은 활력 넘치는 풍부한 미생물의 천국이자 죽은 고기를 먹는 곤충과 새, 설치류들의 보물 창고가 된다. (14쪽)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책에 대한 리뷰에서 그를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 등장하는 '미스 마플'에 비유했다.1 미스 마플은 사건 현장에서 얻은 증거나 관찰보다는 자신의 직관과 추리에 의존하는 '안락의자형 탐정'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캐릭터이다. 미스 마플은 따뜻한 벽난로 근처에서 뜨개질을 하다 가끔 범죄 사건 해결을 위한 지혜를 나눠주는 인심 좋은 할머니 탐정의 이미지로 상상되는데, 사실 그가 사건 현장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거나 범인을 잡기 위한 덫을 직접 놓는 지략 넘치는 탐정으로서의 면모도 갖고 있다는 점이 <미스 마플> 시리즈의 묘미이다.2 이 책의 저자인 퍼트리샤 윌트셔 또한 증거에서 얻어낸 샘플을 분석하는 실험실은 물론 가끔은 끔찍한 사체와 마주해야만 하는 현장, 범죄자와 능숙한 변호사들을 직접 마주해야하는 법정에 이르기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 범죄의 진실을 밝혀내는 사람이라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묘미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오랜 기간 경력을 쌓은, 그러나 여전히 현역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생물학자를 생생한 에세이를 통해 만날 수 있어 기쁘다.
참고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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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학부 시절 생명과학을 전공했지만, 정작 지금 공부하는 건 과학기술사. 지금은 ‘여성의학에서 초음파 진단기의 도입’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고, 앞으로는 몸과 연관된 과학기술의 역사에 넓게 관심을 두고 공부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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