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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책 편지] 소설가의 각오, 연구자의 각오
Bio통신원(예린)
묵은 물건들을 정리하다 보면 추억거리를 발견하게 되지요. 때로는 정겨운 이야깃거리를 찾아내게 될 수도 있고, 부끄러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싶은 것들도 등장하는데요. 저는 최근 청소를 하다 대학원 입학 원서와 자기소개서를 발견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썼었는지 기억도 안 나던 자기소개서를 다시 들춰보니, 연구자의 길을 걷고 싶다는 학부생의 패기 넘치는 각오가 절절하게 적혀 있더군요. 귀엽게 봐 주면 패기 넘치는 각오이고, 솔직하게 보자면 뭘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들이었습니다. 그 때 그 학부생을 받아 주신 교수님들은 그 각오를 들으며 어떤 생각이셨을까요? 그리고 그 학부생은 자신의 각오대로 학위 과정을 보냈을까요?
모든 일들이 그렇겠지만, 학위 과정 역시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모두의 첫 각오 역시 무뎌지고, 벼려지기를 반복하게 될 텐데요. 그럴 때마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를 한 쪽글씩 읽어 내려갔습니다.
회사 간의 전보를 담당하는 통신사로 근무하다 생애 처음으로 투고한 소설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그 다음 해 같은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 최연소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화려한 조명을 받았던 작가. 그 후 ‘쓰고 싶은 작품만 쓰겠다는 각오’로 자신의 삶을 소설 집필과 관계없는 모든 것에서 끊어내기 위해 ‘도쿄에서 특급열차를 타면 네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 40여 년이 넘게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작가. 이 책은 그런 작가의 단상들을 모아놓은 에세이집입니다.
자기 계발서 같은 느낌의 ‘소설가의 각오’라는 제목을 보면 왠지 알맹이 없는 훈계가 나올 것도 같고, 괜스레 낯간지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책 안에는 무게 없는 긍정과 얄팍한 훈계 대신, 시니컬하고 꼿꼿한 호통만이 가득합니다. 본인의 업에 대해 굳은 중심이 잡힌 자만이 보일 수 있는 근성이랄까요. ‘소설가라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쓰고 싶은 글을 써라, 절대로 심사위원이나 문단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따라다니는 고리타분한 길을 걷지 마라’ (‘소설가의 각오’ 중), ‘글을 써서 밥을 먹는 이상 나는 프로이니, 프로라면 프로답게 일하고 싶다’ (‘일본 독자들은 유치한 잡지를 좋아한다’ 중), ‘지금 오르고 있는 산을 정상까지 완전히 정복하지 않았다면 다음에 올라갈 산이 보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꼭대기까지 올라가보지도 않고 도중에 하산한 주제에 변명만 요란하게 늘어놓거나, 등정에 성공한 척 거짓말을 하는 작가한테는 늘 유사한 실패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은 다 하지 못했다’ 중) 등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남기기는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들을 마구 내뱉습니다. 이 작가, 업계 사람들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쌓는다는 건 애시당초 안중에도 없나 보군. 하지만 이런 말들을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그 근성은 정말 대단하군. 이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 말들이 그저 그런 훈계로 남게 하지 않고 무게감 있게 다가오는 것은 작가의 언행일치 때문이고요.
다른 일들도 모두 그렇겠지만, 누군가의 학위 과정 역시 늘 순탄하기만 하지는 않겠지요. 학위 과정이 힘든 이유를 대 보라면 아마 모두들 이야기가 술술 나올 것 같습니다. 불확실한 주제, 불확실한 실험 방향, 왜 안 되는지 모를 실험, 랩이나 교수님과의 케미, 스쿱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 등……. 제 학위 과정 역시 다양한 이유들로 힘들고 외로웠던 시간이 길었습니다. 때로는 한 가지를 해결하면 다른 일이 기다렸다는 양 생기는 바람에 이 길은 나의 길이 아닌가? 라는 고민에 다시 침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깨달았습니다. 나를 힘들게 한 수많은 이유들은 사실 ‘나’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했다는 것을요. 연구자의 길을 가겠다며 발을 내디뎠지만, 그런 ‘나’에 대한 중심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긴 시간 동안 연구 자체에 매진하는 대신 다양한 고민거리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는 것을. 내가 정말 힘들었던 이유는 주제가 안 좋고, 실험이 안 되고, 여건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연구에 매진할 내 중심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연구로 치자면 가설 자체가 불명확한데 부족한 시간과 조급한 마음에 쫓겨 당장 손에 잡히는 잡다한 실험들을 모두 하고 있는 격이었습니다.
그럴 때 이 책을 한 장씩 넘겨 보며, 세상에 계속 남는 ‘글’의 형태로 서슬 퍼렇게 호통을 치는 이 작가의 중심을 찬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소설가’라는 업에 삶을 바쳐 온 힘을 다하는 작가의 모습, 순간순간에 일희일비하고 우쭐대다가 바보가 되지 말라는 호통, 소설가가 소설만 잘 쓰면 되지 다른 것 따위에 휩쓸리지 말라는 일갈. 소설 대신 연구와 실험으로, 학위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바꿔 놓아도 뭐 하나 틀린 말이 없고, 그렇기에 처진 몸과 마음이 조금씩 힘이 나게 하는 말들이었습니다. 이 냉정한 태도에서 오히려 삶에 대한, 변화에 대한 열린 마음이 엿보여 위안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갈 길 모르던 마음에 남의 중심 잡힌 태도를 배우려 노력하며 학위 과정을 보내고, 중심을 굳건하게 세우지는 못해도 적어도 남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법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원리는 아직 몰라도 실험할 수 있는 테크닉은 알게 된 격이랄까요. 언젠가 이런 도움 없이도 스스로의 중심을 스스로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개인으로서도 연구자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까지는 이 책을 옆에 두고 작가의 중심 잡힌 태도에서 나오는 호통을 계속 듣겠지만요.
연구자가 되겠다던 패기 있는 학부생은 자기소개서에 이렇게 썼더군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맹신하며 안도하지 않고,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사람, 그리고 나의 연구에 믿음을 갖되 항상 편견 없이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연구자의 중심에 대해 이미 고민해 봤고, 각오를 다졌기 때문에 썼던 말이겠지요. 답은 항상 내가 가진 데이터 안에 있었는데 그걸 찾지 못해 긴 시간 동안 돌아왔나 봅니다.
*통신사로 근무했던 작가의 이력이 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극도로 정제되고 핵심을 살린 문장을 구사하고 있는데요. 에세이도 힘이 있지만 작가의 소설 역시 이런 문장이 엮여 다른 종류의 흡인력이 있습니다. 작가의 첫 작품이자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여름의 흐름’이 실린 동명의 단편 소설집 역시 추천합니다. 표제작 ‘여름의 흐름’은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의 나날들을 다룬 단편으로, 개인적으로는 이 에세이만큼 날 선 호통과 강렬함은 없지만 차분하게 정제된 내면의 언제 터져 나올 지 모르는 감정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연구하다가 잠시 숨을 돌릴 때 읽기에는 역시 분량이 짧은 글들이 부담이 덜합니다.
Reference
1. 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문학동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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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의 힘을 믿는 연구자.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몸속 도구들이 생명을 만들어내고 삶을 조절하는 것에 매료되어 생명과학 연구의 길을 걷게 됐고, 연구를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들을 전하고 싶어 과학커뮤니케이션에 발을 디딘 사람. 우리가 하는 연구의 본질도 결국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고 이를 전달하는 데 있다고 믿는, 갓 박사를 단 새내기 연구자가 전하는 연구 활동 중 마음에 울림을 준 이야기와 책에 대해 나누는 감상들. 여러분의 곁에는 어떤 책들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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