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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노트] 지금 잠깐 랩에 와줄 수 있어?
종합 곽민준 (2020-08-20)

'지금 잠깐 랩에 와줄 수 있어?'
'어? 지금 새벽 한 시…. 흠, 무슨 일인데?'
'아니, -80도 냉동고 문이 안 닫혀. 아놔,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아, 정말.'
'문이 안 닫힌다고? 어……. 어. 한 번 가볼게.'
'어어, 아! 어, 고마워. 하아…….'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일은 잘 없다. 평소에는 굉장히 침착하고, 고요하다. 너무 딱딱해서 조금 별로기까지 하다. 게다가 성격은 또 엄청 고지식해서 말하는 걸 들어보면 인생 19회차쯤 된 것 같다. 다른 대학 동기들은 다들 해외 교환 학생도 다녀오고, 인턴 경험도 해보고, 연애도 하며 길게 대학 생활을 즐겼는데, 재미없는 이 양반은 혼자 4년 만에 칼 졸업 후 바로 자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심지어 학부생 때 제대로 즐긴 것 같지도 않은데, 또 대학원 와서조차 매일 밤늦게까지 실험에 몰두한다. 가끔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날도 아마 새벽에 혼자 랩에 남아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저녁에 다 같이 회식을 갔고, 나는 먼저 기숙사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비싼 걸 먹어서 그런지 내 위가 고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체한 듯이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일찍 잠이 들었다. 아니, 잠이 들 뻔했는데, 그 순간 전화기가 울렸다. 사실 평소에는 벨 소리를 무음으로 해둬서 항상 엄마가 제발 전화기 좀 켜놓고 다니라고 잔소리하시는데, 왜인지 모르지만, 이상하게 그날은 전화벨 소리가 아주 크게 울렸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반쯤 잠에 빠진 상태에서 얼떨결에 전화를 받았다. 

'지금 잠깐 랩에 와줄 수 있어?'
상황 파악도 제대로 안 된 채로, 눈을 뜬 것도 아니고 안 뜬 것도 아닌 상태에서 얼떨결에 옷을 갈아입었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생명과학관에 도착했다. 그리고 공용기기실에 들어서서 보니, 이거 완전 물바다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냉동고 문에 붙어있던 성에가 다 녹아서 바닥이 흥건했다. 그리고 새벽 한 시에 혼자 냉동고 문 하나 닫아보겠다고 쩔쩔매고 있는 이 양반의 목덜미에도 땀이 흥건했다. 

재미없는 컨셉 그대로, 친구들과 가볍게 축구를 할 때조차 혼자 진심이고,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지만, 그날 그 땀은 조금 달랐다. 문이 열려 있는 냉동고 앞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이 사람의 얼굴은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대학 동기인 이 사람을 학부 때 5년, 그리고 같은 연구실에 1년 늦게 대학원생으로 입학해 랩 동료로 또 반년을 보았지만, 이렇게까지 간절한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벌써 20분째, 낮은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 냉동고의 문이 열려 있었으니 그렇게 당황할 만했다. 심지어 새벽이라 우리 랩은 물론 생명과학관 3층에 아무도 없었다. 잘못하면 밤새도록 냉동고가 활짝 열려 있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우리의 소중한 표본들과 세포들에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엄청나게 당황스러운 상황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평소에는 안 저러던 양반이 특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내가 침착해졌다.

‘내가 한 번 닫아볼게.’
20분 넘게 새벽에 홀로 사투 중이던 대학원 선배님께 잠시 휴식을 드리고, 냉동고 앞에 섰다. 그리고 문을 있는 힘껏 밀고, 문고리를 걸었는데, 어? 닫혔다. 옆에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는 이 사람의 노력에 미안해질 정도로 평소보다 더 쉽게 냉동고 문을 닫아 버렸다. 사실 나는 이 사람이나 옆자리 형보다 성에가 낀 냉동고 문을 닫는 기술이 훨씬 부족하다. 그래서 조그만 것 하나 꺼낼 때마다 혼자 냉동고 앞에서 낑낑대는데, 오늘따라 너무 쉽게 문이 닫혀 버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로 약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문제가 잘 해결되어 다행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 양반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아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이상하게 냉동고 문이 닫히지 않았고, 그래서 주변에 도움을 청하려 했더니 아무도 없었고, 새로 산 비어있는 냉동고로 안에 있는 것들을 다 옮겨야 하나 고민까지 했다고 한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평소에는 다른 이들에게 조그만 부탁을 하는 것조차 망설이고, 랩의 잡일은 말도 없이 혼자 다 맡아 하는 이 사람이 새벽에 나에게 전화를 했을까 생각하니 괜히 안쓰러워졌다. 그래도 적절한 타이밍에 내가 멋있게 나타나 문제를 해결했으니 참 다행이었다.
 

새벽 한 시에 우릴 괴롭힌 -80도 냉동고

새벽 한 시에 우릴 괴롭힌 -80도 냉동고


그렇게 그날은 일단 방으로 돌아가 진정을 취했고, 다음날 모든 게 해결된 상태에서 침착하게 문제의 정확한 원인을 찾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봐도 문을 못 닫게 한 구체적인 범인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날 이후로 비슷한 문제는 없었고, 우리는 냉장고 문에 낀 성에가 범인일 것으로 예상 중이다. 그래서 오늘 랩 청소를 하며, 냉동고에 낀 성에를 모두 치우기로 했다. 냉장고와 냉동고를 청소한 지 오래되기도 했고, 이런 일이 또 생기는 것도 막아야 하니 겸사겸사 이번 주에 모두 함께 작업하기로 했다.

청소하고 성에를 모두 깔끔히 제거하면 아마 이제 똑같은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이 넘쳐나고,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재현하고자 하는 실험실에도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가득하다. 냉동고 문을 못 닫아서 낑낑대는 일은 앞으로 없을지 몰라도, 아마 이보다 훨씬 재미있고 어이없는 상황이 앞으로도 많이 펼쳐질 거로 예상된다.

입학 전에는 매일 반복되는 실험에 일상이 너무 지루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막상 경험해보니 괜한 우려였다는 걸 제대로 느끼고 있다. 이제 겨우 4학기를 마친 선배가 최고참인 이 햇병아리 연구실에는 전기 없이 전기 충격을 가해놓고 실험 결과에 의아해하는 신입생도 있고, 새벽에 혼자 냉동고 문을 못 닫아 땀을 뻘뻘 흘리는 독특한 양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선배들에게 질세라, 연구 참여 중인 학부생은 37도 인큐베이터에 넣어야 할 박테리아 배지를 80도 오븐에 넣어 바싹 구워버리는 획기적인 시도로 모두를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플라스틱 플레이트가 반쯤 녹아 예쁘게 뒤로 접혀 있는 모습을 본 건 정말 진귀한 경험이었다. 

언제나 재미난 일들이 가득한 덕분에 똑같은 실험을 반복하는 랩 생활이 그리 지루하지가 않다. 다음 학기에는 새로운 사람이 두 명이나 더 들어오니, 또 새로운 실수와 실패를 자주 보여주지 않을까? 그분들에게 지지 않게 우리도 최선을 다해야겠다. 오늘은 또 어떤 일이 펼쳐질지, 기대되는 하루다.

  추천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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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민준 (POSTECH 생명과학과)

랩노트 (혹은 연구노트), 과학자의 모든 실험과 연구 과정을 기록하는 노트죠. 그러나 여기에 연구자들의 일상이 담기지는 않습니다. 과학은 자연을 설득력 있고 논리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이니, 사실은 연구 대상을 만나 이론이 만들어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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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3 댓글작성: 회원 + SNS 연동  
회원작성글 과지주  (2020-09-02 10:35)
1
너무 재밌어요..공감되는 내용이라 그런가 진짜 재밌는 소설이 연재되는걸 보는 것 같아요
회원작성글 쇼오오옹  (2020-09-08 10:33)
2
넘 잼나용 ㅠ-ㅠ !
회원작성글 닥터헬렌킴SG  (2020-10-04 13:02)
3
다이나믹하네요. 문이 닫혀서 다행이고, 그분도 정말 고마워하실거 같아요. Good j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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