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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에게 보내는 철학 서신] 1-6 토마스 쿤, 조용히 퍼즐을 맞추는 집단 속의 과학자라는 상
Bio통신원(갑오징어)
일러두기
이 에세이의 논의는 다음 원전 번역본을 바탕으로 했다.
포퍼에 대한 서술을 전통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 마무리했던 이유는, 바로 포퍼가 간과했으나 너무나 중요한 문제를 쿤이 천착했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과학은 전통 위에서 출발하며, 학자는 그 초기 커리어를 이 전통에 대한 습득으로 시작하지만 이내 그것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하기 시작한다는 포퍼의 언급은, 과학과 과학의 정체성에 대해 너무나도 순진한 언급이었음을 쿤은 밝혀낸다. 쿤이 말하는 과학자의 정체성은 포퍼가 이야기하는 방식의 덕목과 이상이 깃들기 어려울 만큼 집단적이고 역사적이다. 과학자는 과감하지만 고결하고 겸허하게 박진성을 추구하는 독립적인 개인으로 정체화하기 어렵다. 그는 자신이 속한 전통 속에 몸을 담근 채 조용히 퍼즐을 맞추는 집단 속의 한 부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쿤은 포퍼가 말하는 개인으로서의 과학자라는 이상은 허구에 가까우며, 과학자의 정체성을 이해하려면 역사와 과학자 사회를 눈여겨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생애
여기서도 이야기의 시작은 쿤의 생애에 맞출 필요가 있다. 특히 이는 쿤이 자신의 체험을 하나의 증거로 삼아 과학자의 정체성에 대해 논의했음을 강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젊은 포퍼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지적 궤적은, 전간기와 2차 대전을 겪은 유럽의 인문학도에게서 볼 수 있을법한 것이다. 토마스 쿤의 지적 궤적은 포퍼와 아주 다르다. 그는 빈과 같은 유서 깊은 고도가 아니라 미 동부 내륙 대평원에 위치한 젊은 도시(1788년 정착) 신시내티 태생(1922 생)이다. 또한 쿤은 물리학자로서 초기 경력을 시작한 인물이다. 그는 2차 세계 대전에서 멀리 벗어나 문필을 통해 간접적으로 참여했던 포퍼와는 달리, 항공작전을 위해 필수적인 레이더를 연구했던 경력도 가지고 있다. 이는 그가 물리학의 공학적 응용에 대해서도 상당한 경험을 쌓았다는 뜻이다. 종전 이후 쿤은 대학원에서 양자 역학을 고체물리의 쟁점에 응용하는 연구 경력을 쌓으며 학위를 취득한다. 이는 그가 특정 영역(미시적 규모)에서 정립되어 가던 지식을 인접해 있지만 아직 분명한 것이 많지는 않은 영역(응집물리)에 적용하여 지식의 범위를 넓히는 작업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가 나중에 제시했던 개념을 빌리면, 그는 군대와 대학을 거치며 ‘범례’ 만들기나 ‘퍼즐 풀이’에 깊이 발을 담갔던 셈이다.
물리학자로서 경력을 쌓고 있던 쿤의 지적 관심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던 계기는, 학위 취득 이후 주니어 펠로우로 임용되어 인문대 학생들에게 과학사를 가르친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그는 과학이 누적적으로 진보해 나간다는 상식적인 과학관이 얼마나 불충분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의식은 그의 첫 저술 코페르니쿠스 혁명(1957)을 통해 처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저술은,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대체한 이유가 예측의 정확성이나 모형의 일관성에 있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낸다. 이런 대체는, 오히려 당시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가 이론의 단순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었다.
1962년 출간된 과학혁명의 구조는 이러한 분석을 과학 전반으로 확대한 야심작이었다. 이 저술은 아마도 20세기에 저술된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이었을 것이다. 다음에 다루게 될 라카토스의 저술 「과학적 연구프로그램의 방법론」 역시 쿤의 저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를 주제로 열린 1965년의 학회에서 발표되었던 것이었고, 파이어아벤트 역시 쿤과의 토의에서 아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술회한다. 이후 쿤의 작업은 과학사와 과학철학, 과학사회학 전반에 걸쳐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다만, 후기의 쿤은 1970-80년대 이후 갈수록 증가하는 과학사회학의 상대주의적 경향에 대해 우려와 반론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그의 과학철학 속에 담긴 상대주의적 요소들을 과대 평가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림 1 토마스 쿤과 그 잔상. Bill Pierce의 개념 작업. 원본은 The LIFE Images Collection, 사본은 Getty Images에서. 해당 작업은 다음 에세이에서 얻었다.
https://www.thenewatlantis.com/publications/did-thomas-kuhn-kill-truth
패러다임이라는 개념
토마스 쿤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용어는, 과학철학의 좁은 영역을 넘어 사용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널리 퍼져나가 있다. 심지어 정부나 기업조차도 이 말을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변화를 설명하려고 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쿤이 이 개념을 너무나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비판은 왜 이렇게 쿤의 개념이 넓은 범위에서 쓰이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실마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과학혁명의 구조 2판을 서술하면서 제시한 쿤의 답변은 그가 생각하는 좀 더 현실적인(물론 이는 포퍼에 상대적인 의미다) 과학의 구조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그는 자신이 패러다임을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했다고 말한다.1 첫째, 전문가 집단이 공유하는 어떤 이론과 믿음의 총괄적인 집합. 둘째, 범례(exemplar).
첫번째 의미에서의 패러다임은 기호적 일반화(symbolic generalization)나 모형(model), 가치(value), 그리고 둘째 의미를 포괄한다. 여기서 “기호적 일반화”란, F=ma, E=mc2와 같이 수식으로 표현되든, “중력의 크기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와 같이 문장으로 표현되든 과학자 일반이 받아들이는 일반적인 법칙 진술을 말한다.
또한 모형이란, ‘전기는 유체와 유사하게 움직인다’와 같이 과학이 다루는 대상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다시 말해 기술되는 대상이 기술에 쓰이는 대상과 무엇을 유사하게 가졌는지에 대한 가정을 의미한다. 이런 모형은 어떤 방식의 유추를 전개해야 하는지에 대한 한 가지 모범이 되긴 하지만, 과학자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이를 공유할 필요는 없다.
가치 또는 가치관은 과학자 사회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집단적 믿음을 말한다. 쿤은 예측의 정확성, 정량적 추론이 정성적 추론보다 우월하다는 입장은 어느 과학자 사회든 지향해 왔다고 본다. 반면, 과학 이론의 일관성이나 단순성과 같이, 이론의 전반적인 구조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는 가치 가운데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지에 대한 견해는 과학자 사회에 따라 상당히 달랐다. 바로 이 점이 과학혁명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점은 곧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범례는 과학의 작동을 설명하기 위해 특별한 가치가 있다. 쿤은 F=ma와 같은 도식은 물리학의 각 분야가 다루는 구체적인 문제를 위해 다양하게 변형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런 변형 과정은, 어떤 법칙의 적용 범위를 넓혀 가는 발견의 과정뿐만 아니라 학생의 학습 과정에 있어서도 매우 근본적이다. 이런 변형과 적용의 과정을 통해, F=ma와 같은 기호적 일반화는 광범위한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과학자의 작업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에 대해 충분히 숙련된 과학자는, 주어진 데이터에서 무엇을 찾아내야 하는지를 이러한 변형과 적용 과정을 통해 배운다. 그리고 이 변형과 적용 과정을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예제, 또는 범례를 풀어 보는 것은 과학자의 초기 커리어를 가득 채우는 일상적인 과정이다. 결국 포퍼가 말하는 “전통에 대한 습득”을 실제로 세밀하게 뜯어보면, 바로 이와 같은 연습 문제의 풀이 과정이 나온다는 것이 쿤의 분석이다.
정상 과학과 퍼즐 풀이
물론 역사적 과학의 모든 과정 속에 언제나 패러다임이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쿤은 천문학의 경우에나 이런 의미에서의 패러다임이 선사 시대부터 당연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다른 과학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 시기에 확립된 역학(dymamics)을 비롯하여, 과학사의 기록으로 남은 시기에 들어온 이후 패러다임의 출현을 확인할 수 있다고 쿤은 주장한다.
이처럼 패러다임이 확립된 상태에서 진행되는 과학 활동을, 쿤은 정상과학(normal scicence)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정상 과학 시기에 이뤄지는 과학 활동의 특징을 간명하게 해명하기 위해, 쿤은 ‘정상 과학’ 속에서 과학자들이 수행하는 활동을 퍼즐 풀이(puzzle solving)라고 부른다.2
퍼즐 풀이라는 표현은 정상 과학 활동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쿤이 특별히 선택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조각 그림 퍼즐이나 빈칸 채우기 퍼즐을 자신의 설명을 위해 사용한다. 이러한 퍼즐에는 답이 있다. 다시 말해, 엉뚱한 답안과 모범 답안이 명확하게 구별된다. 마찬가지로, 정상 과학 활동에서도 엉뚱한 답안과 모범 답안은 서로 명확하게 구별된다. 그리고 모범 답안과 엉뚱한 답안을 구별하는 규칙은, 바로 정상 과학 활동을 함께 진행하고 있는 과학자 사회가 기반해 있는 패러다임이다.
이런 시각에 기반해, 범례가 가지고 있는 흥미로운 성격을 다시 한 번 조명할 수 있다. 앞서 지적했듯, (박사 과정의 쿤을 비롯한) 많은 훌륭한 과학자들은 대개의 경우 F=ma와 같은 매우 일반적인 도식을 광범위한 현상에 적용하여 사태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활동을 해 왔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도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활동이라기 보다는 이 도식이 적용될 수 있는 현상 가운데 아직 설명과 예측의 틀이 마련되지 않은 영역에 응용하는 과정이다. 쿤이 제시한 ‘퍼즐 풀이’라는 은유는, 범례가 가진 이러한 성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역학의 대상은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자연의 퍼즐들이라면, F=ma는 이 퍼즐이 어떻게 맞춰져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지침일 것이고, 자유 낙하나 진자, 행성의 운동, 조석 현상 등에 이 도식을 적용하는 작업은 바로 이러한 퍼즐의 각 조각을 찾아 메우는 과정에 해당할 것이다. 이런 퍼즐 풀이 과정이 누적됨으로써, 과학은 좀 더 넓은 범위에 적용될 수 있는, 그리고 좀 더 정확한 답을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학관에 대해, 포퍼는 자신의 이상에 기반하여 심각한 우려를 내놓는다. 정상 과학은 전통을 일종의 도그마로서 받아들이는 태도라는 것이 이 우려의 골자다. 또한 포퍼는, 과학의 비판적 힘은 쿤의 말을 빌리면 혁명적 과학 속에서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우려, 그리고 전망이 적절한 것인지 확인하려면, 정상 과학에 위기가 찾아와 과학 혁명이 벌어지게 되는 상황에 대한 쿤의 설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탐구의 심리학’과 과학 혁명
쿤은 주목할만한 심리학 실험을 한 가지 소개하면서 논의를 이끌어 간다.3 브루너∙포스트만이 트럼프 카드를 이용하여 수행한 실험이 바로 그것이다. 연구진이 피험자에게 보여준 카드 속에는, 통상적인 트럼프 카드가 아닌 것들이 섞여 있었다. 연구진은 피험자에게 카드를 보여준 다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물론 피험자들은 통상적인 트럼프 카드는 쉽게 알아보았다. 하지만 이들이 이상한 트럼프 카드(빨강 스페이드 6, 검정 하트 4)를 처음 보았을 때, 눈앞에 제시된 트럼프 카드의 특징을 그대로 보고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시험이 반복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일정한 시점에 이르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망설임 없이 카드의 내용을 올바르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험자 가운데 상당수는, 다른 피험자들에 비해 수십 배나 더 많이 카드를 접하고서도 여전히 이상한 카드의 10% 이상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일부는 그가 처한 상황에 짜증을 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실험은, 인간의 인지적 특징이 과학사의 실제 과정을 설명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무언가 이상한 현상을 접했을 때, 과학자 사회는 처음에는 그것을 기존의 정상과학적 작업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이상 현상이 생각보다 잘 뒤집히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날 경우, 과학자 사회가 패러다임에 대해 가지고 있던 합의는 흔들리게 된다. 범례를 새로 만드는 수준의 퍼즐 풀이 작업이 아니라, 퍼즐을 처음부터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보는 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퍼즐이 새롭게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면, 다른 많은 학자들 역시 기존의 퍼즐을 버리고 새로운 퍼즐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일부 완고한 사람들만 남아 기존의 퍼즐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상황을 뒤집을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상 이들을 따르는 일파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멸하게 될 것이다.
쿤이 말하는 과학 혁명의 과정은, 바로 이러한 심리학적 흐름에 의해 지배된다. 그리고 이런 견해는, 과학사에 남을 만한 과학자들은 전통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업적을 이루었다는 포퍼의 입장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진다. 과학 혁명은 합리적 개인의 비판적 시각이 아니라 과학자 사회의 집단 심리에 의존해 일어나는 사건일 수 있다. 그리고 과학 혁명이 끝나는 이유는, 합리적 논쟁이 아니라 기존 패러다임을 옹호하던 일파가 생물학적으로 사멸했다는 사실이 될 지도 모른다. 실제로 쿤은 자신의 연구가 포퍼나 그 이전의 과학철학자들이 추구했던 ‘발견의 논리’를 추구하기보다는, ‘탐구의 심리학’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게슈탈트 전환과 관찰 데이터의 한계
과학 혁명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과학에서 자신의 이상을 찾았던, 또는 과학이 사회 전체가 한 수 배워야 할 이상적 정신을 담고 있다는 포퍼의 관점과는 전적으로 다른 관점에 기반한다. 앞서 확인했듯, 포퍼는 과학 이론은 진리에 점점 근접해 간다는 의미에서 진보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박진성이라는 비교 척도를 개발하여 평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과감함과 겸허함을 겸비한 개인들의 비판 정신에 의해 가능한 추측과 논박의 과정이 바로 이러한 진보의 동력이었다. 하지만 쿤은 과학이 연속적 진보를 이룩하고 있으며 이를 실제로 확인할 수도 있다는 포퍼의 생각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과학 혁명 이전의 과학, 그리고 과학 혁명 이후의 과학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단절이 있다. 이 단절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며, 양 편의 과학 사이에 이른바 ‘통약불가능성(commensurability)’을 불러온다.
쿤은 여기서도 자신의 설명을 위해 유명한 심리학의 실험을 활용한다.4 게슈탈트 전환(gestalt switch)에 대한 유명한 실험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림 2은 두 가지 방식으로 보인다. 두 명의 얼굴 실루엣이 마주보고 있거나, 술잔이 하나 있거나. 쿤은, 과학 혁명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과학혁명 양측의 이론이 통약불가능한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모형을 이런 이미지들이 제공해 준다고 말한다.
그림 2 술잔, 또는 얼굴 실루엣.
천문학에서 행성이 늘어나는 시발점이 된 천왕성 발견은 이런 전환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간략한 사례다.5 18세기 말까지, 전통적으로 천문학자들은 행성을 5개(지구를 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론 알다시피, 실제 행성의 수는 그것보다 더 많다. 게다가 천왕성은 가장 밝을 때는 실제로 육안으로도 관측이 아슬아슬하게나마 가능하다(6등성 수준). 관측 기록에서도 천왕성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쿤은 17세기 후반부터 천왕성 궤도에서 별을 관찰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고 지적한다. 거의 1백년 동안, 천왕성이 태양 궤도를 한 바퀴 돌 만큼의 시간(약 84년)이 지나고 나서도 천문학자들은 행성을 관찰하고도 그것이 행성임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무언가 움직임을 파악해 낸 허셜이 이 별을 혜성으로 해석하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다시 렉셀이 이를 행성으로 보자고 제안한 다음에야 1백년간 누적된 관측 데이터들은 행성으로 판정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1781년의 일이다. 쿤은 천왕성에 얽힌 이런 변화가 이후 1801년 세레스의 발견에서 이어지는 소행성의 발견으로 연결되었다고 해석한다. 5개보다 더 많은 행성이 있을 수 있고,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천문학의 임무일 수 있다. 태양계에 대한 이런 관점의 변화가 관측 데이터에 대해 게슈탈트 전환을 일으켰다는 것이 쿤의 지적이다.
물론 이런 식의 변화는, 세계관이 더욱 넓어지고 풍부해지는 상황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생각과 이론의 전환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동일한 데이터가, 관점의 전환에 따라 여러 개의 항성에 대한 증거가 되었다가 하나의 행성에 대한 증거가 되었다. 경험 데이터는 이론, 또는 데이터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밑그림에 대해 중립적일 수 없다. 이런 주장은 쿤과 같은 시기 철학계를 풍미한 한 가지 논제, 다시 말해 관찰 데이터 만으로는 그것을 해석하는 데 사용할 이론을 결정할 수 없다는 미결정성 논제(indeterminate thesis) 덕분에 더욱 더 강력한 뒷받침을 받는다. 이 논제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입증의 문제를 다룬 에세이 1-2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통약불가능성과 상대주의
쿤의 지적은 이러한 단절을 지적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과학사에서 볼 수 있는 단절은, 단절의 양측을 동일한 표준 하에서 비교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어려움을 지시하는 말이 바로 ‘통약불가능성’이다.
많은 학자들은 쿤의 통약불가능성이 대체로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6 첫째, 방법론적 차이. 둘째, 세계관 사이의 차이. 셋째, 의미론적 차이. 먼저 첫번째 차이는 앞서 패러다임의 가치 부분에서 확인했던 기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는 문제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정량적이고 정확한 데이터에 기반한 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기준에서는 과학자들 사이에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지만, 단순성, 일관성, 개연성과 같이 과학 이론의 여러 요소를 조정하는 방침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는 가치를 적용할 때는 개인이나 학파 사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 쿤의 지적이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했듯, 16세기 당시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보다 높게 평가되었던 이유는 설명이나 이론의 단순성을 높이 평가하라는 신플라톤주의의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쿤은 지적한다.
통약불가능성의 둘째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간략히 살펴본 대로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데이터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이들 데이터를 조합해 어떻게 퍼즐을 맞춰야 하는지에 대해 대략적인 밑그림을 가지고 있으며, 과학사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절은 바로 이러한 밑그림이 바뀌는 일이라는 것이 이런 분석의 초점에 있었다.
의미론적 통약불가능성을 이해하기 위해, 행성 사례로 돌아가 보자. 현대의 우리는 항성 주위 궤도를 도는 천체를 행성이라고 부른다(이 아래의 여러 범주는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서 행성은 지구 주위를 도는 천체를 의미했다. 상당수 철학자들은 이것이 ‘행성’이라는 말의 내포 측면에서, 다시 말해 행성을 어떻게 서술하고 어떤 속성을 귀속시킬 것인지를 다루는 이론에서의 차이일 뿐이라고 지적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행성’은 분명 외연, 다시 말해 지시 대상조차 달랐다. ‘행성’은 태양과 달까지 그 외연으로 포함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은 행성이라는 단어를 의미론적으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고, 이런 의미론적 차이는 두 천문학이 세계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종합하여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는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들 논의를 종합하면, 쿤은 과학 혁명을 사이에 둔 두 과학이 그리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혁명을 사이에 둔 두 이론은, 세계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반영하는 의미론을 발전시킨다. 관찰 데이터는 이론에 중립적이지 않다. 게다가 과학 이론을 이루는 여러 성분을 어떤 원칙에 의해 조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견해 역시 과학자나 학파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과학 혁명은, 과학을 상대주의적 단층 속에 가둬 버린 듯하다.
과학의 진보와 정상 과학
결국, 정상 과학은 물론이고 과학 혁명 속에서도 포퍼가 강조한 비판적 덕목을 갖춘 과학자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과학자들은 혁명 속에서 군중 심리에 휩쓸릴 수 있다. 관찰 데이터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포퍼의 강조는, 게슈탈트 전환과 같은 현상을 감안하면 실제로 과학자들이 세계를 관찰할 때 무엇을 하는지 반영하지 못하는 공허한 강조였다. 과학혁명 속에서 과학자들은, 과학 이론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기는커녕 아예 단어의 의미조차 전혀 다르다는 의미에서 서로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는 언어 체계를 만들 뿐이다. 이 속에서, 포퍼가 말하는 비판적 덕목들을, 그리고 박진성을 향상시켜 나가는 체계를 찾기는 힘들다.
결국 과학이 진보하고, 다른 지적 작업과는 극적으로 구분되는 지식의 누적을 일으킨다는 우리의 직관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 혁명을 관찰하는 것은 그리 적절한 전략은 아닌 듯 하다. 쿤은 정상 과학의 특징 속에서 과학의 진보와 지식의 누적을 이해하는 길을 택한다. 기호적 일반화를 더 넓은 영역에 적용하는 퍼즐 풀기의 과정이 지식의 누적이며, 이 속에서 더 많은 풀이가 누적되는 것이 과학 진보의 한 방향이다. 또한 이런 정상 과학의 활동을 강화할 수 있도록, 과정에 진입하는 학생들을 퍼즐에 순응시키고, 퍼즐 풀이 과정의, 패러다임의 중요성에 대한 과학자 사회의 합의를 강고하게 유지하는 것은 과학 진보를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다. 이런 과정이 고도화되면, 과학자 사회는 그 어떤 전문가보다도 대중과 유리된 그들만의 거대한 성을 구축하게 된다.
이런 식의 주장은, 어떻게 평가하든, 과학의 진보에서 비판적 덕목이,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이상이 수행하는 역할이 크지 않다는 함축을 담고 있는 듯하다. 논문과 수식은, 그동안의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운 혁신적인 사람들을 가로막는 장벽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관점을 용인할 수 있는가? 파이어아벤트의 말처럼, 이렇게 되면 과학계가 다른 전통과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 답하기 위해 라카토스의 작업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주석
1. 이번 절의 논의는 『구조』의 「추가 – 1969」를 참조한 것이다.
2. 이번 절의 논의는 『구조』 4, 5장을 따른다.
3. 실험이 소개된 것은 『구조』 6장이다.
4. 실험은 『구조』 8장 등에 소개되어 있다.
5. 이 사례는 『구조』 10장에 소개되어 있다.
6. 다음 사전의 서술을 참조했다. Bird, Alexander, "Thomas Kuhn",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8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win2018/entries/thomas-kuhn/>. Section 4.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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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을 공부했다. 철학이 오늘날의 정교한 지적 분업 체계 속에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거대도시 서울 철도: 기후위기 시대의 미래 환승법(워크룸프레스, 2020)』을 저술했고, 의학의 철학을 다룬 책 약간을 번역(공역)했다. 앞으로 이 연재는 바로 철학이 오늘의 지적 분업 체계 속에서 가진 의미에 대한 의문에 답하려는 시도로서 계속 진행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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