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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소설로 읽는 과학이야기] 50. 어느 막힌 날
Bio통신원(과학작가 박재용)
태극기부대가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면서 도심 전체의 교통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태극기부대처럼 낡고 시끄럽고 화가 난 차는 그러나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를 줄 알았다. 지금 태극기 부대를 욕한다고 상황이 변할 게 아니었고 그들에게 들릴 일도 없었다. 그러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차가 태극기부대에게 욕을 할 상황은 아닌 것이다. 차가 말할 대상은 따로 있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영우에게 다시 이야길 꺼낸다.
지금 내 상태가 엉망인 건 알지? 배터리 용량은 이제 정상일 때의 70%에 간당간당해. 센서들도 언제 맛이 가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야. 차체 삭은 곳이 대여섯 군데는 된다고. 더구나 차대 뒤쪽 하부는 삭은 곳이 커져서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끊어질 수도 있어. 한마디로 맛이 가고 있다고.
영우가 어물어물 택도 없는 답을 한다.
그래 나도 알아. 그래도 배터리야 미리미리 충전하면 되니까 큰 문제는 아니고 센서도 한꺼번에 다 고장 나진 않지 않을까? 한두 개 고장 나도 큰 문제는 없잖아. 고장 난 것만 교체해도 되고. 차축도 삭았다고는 하지만 정비소 가서 손 좀 보면 될 거 같은데
아 이 사람아 배터리가 70%면 50% 되는 거 금방이야. 더구나 지금도 배터리 셀 가운데가 살짝 부풀어 있어. 아예 갈아야 할 때인 거지. 거기다 센서 갈고 차축 손 보고 그러다 보면 비용이 눈덩이처럼 쌓인다고. 차라리 이 차를 재활용센터에 팔고 새 차를 정기 구독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야. 더구나 요새 신형 모델은 인공지능도 나보다 훨씬 고급지고 에너지 효율도 30%나 더 높아. 전기세도 적게 들고 더 안전하고. 거기에 구독 비용도 이전보다 싸. 정기구독하면 1년에 두 번씩 무료 점검도 해주잖아.
차가 앞으로 50센티미터쯤 가다가 다시 섰다. 이미 정해진 시간에 물건을 넘기는 건 포기한 상태. 차가 알아서 택배시스템에 사정을 확인해 줬고 영우도 그 결과를 보고 있었다. 그나마 이런 천재지변에 준하는 상태에선 벌금을 물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나도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 재활용 센터에 가면 인공지능 칩만 따로 빼서 저소득 노인용 하우스 케어 시스템으로 가공해서 다시 쓴다고. 나처럼 10년 너머 학습된 인공지능은 너 생각보다 꽤 대우를 해주거든. 너처럼 꽉 막힌 주인 말고 새로운 사람도 좀 만나보자고. 요새 애인들끼리 사귀어도 평균 연애기간이 1년이 채 안 된다는 뉴스도 안 봤어? 우리 햇수로 벌써 10년이거든. 지겹지도 않냐?
차가 다시 50센티미터쯤 나갔다. 시간은 일관되게 흐르고 차의 잔소리도 일관되게 계속되고 있었다. 차는 자기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영우가 뭐라 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사실 차가 하는 말이 다 맞는 거였고 영우가 속생각을 이야기할 수도 없는 상황. 다시 50센티미터, 5분 뒤 다시 50센티미터. 30분쯤 지나자 길가의 흡연부스가 보였다.
잠깐 세우자. 나 한 대 피고 올게.
참내 몸에 안 좋은 건 다 하는구만. 담뱃값만 아껴도 그게 얼만데. 차는 구시렁대면서도 옆 차와 통신을 하면서 1차선으로 빠져나와 부스 옆에 섰다.
영우는 흡연부스로 들어가서 담배를 한 대 입에 물었다. 어찌나 잔소리가 심했는지 차에서 서둘러 나오면서 깜빡한 모양이다. 호주머니를 다 뒤져도 라이터가 없었다. 다행히 부스에는 한 명이 더 있어서 라이터를 빌려 불을 붙인다. 세상인심이 아무리 험해져도 라이터 빌려주는 건 마치 DNA에 새겨진 것처럼 변함이 없었다.
불을 붙여 한 번 훅하고 연기를 마시고 내뱉으면서 한숨까지 같이 내놓는 영우. 백 번은 더 해봤을 돈 계산을 머릿속으로 다시 해본다. 얼추 일 년이다.
아니 난 좀 더 너하고 같이 있고 싶어. 내가 애인이 있어 아님 가족이 있어. 부모님이야 내가 걱정만 끼치지 않으면 두 분이서 잘 사실 거고.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만 하는 놈이 애인이 생길 것도 아니고, 별로 바라지도 않는다고. 고양이 녀석이야 죽을 때까지 데리고 있겠지만 벌써 7살이야. 몇 년 뒤엔 헤어질 수밖에 없지. 살아있는 녀석과 해어지는 건 이번이 두 번째지만 정말 못할 일이더라고. 거기다 택배보조로봇도 사고로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고.
구독 서비스를 하면 너를 새로운 차에 이식할 수 없잖아. 이제 남은 건 너랑 고양이뿐인데. 어쩌겠니. 너라도 있어야지. 지금 돈을 모으고 있으니까 한 일 년 뒤면 새 차를 살 수 있을 거야. 물론 너를 이식하면 인공지능을 다운그레이드 하는 거지만 고객이 원하면 해준다고 상담원이 그러더군. 그러니 조금만 더 참자. 요새 벌이가 좀 줄었지만 그래도 아끼면 매달 50만 원씩은 모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영우의 생각과 계산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기도 하다. 매달 50만 원씩 모으는 건 지금 정도의 일이 계속 있고 다른 변수가 없을 때의 최선의 최선을 다한 결과일 뿐이고, 확률적 필연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언제나 보여줬다. 겨우 서른다섯이지만 영우도 그런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변수는 고양이였다. 나이가 들 대로 든 고양이는 이전보다 자주 아팠고, 이젠 영우와 같이 차를 타고 다닐 수가 없어 낮 동안은 그저 집에서 잠만 잘뿐이었다. 영우가 저녁에 들어가 봐도 사료가 줄어있질 않았다. 병원에라도 데리고 가야 하는데 크게 어디 아프진 않은 것 같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차 말대로 차도 손봐야 했다. 아는 정비소가 그래도 싸게 잘 해줬는데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어떻게든 두어 달에 한 번씩은 점검을 해줘야 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차든 고양이든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영우가 담배 피러 나간 사이 차도 계속 구시렁대고 있었다.
멍청한 주인. 아니 지겹지도 않나 벌써 10년인데. 다른 사람들은 5년이면 바꾼다고. 구독을 하면 3년마다 바꿀 수도 있고 말야. 뭐 하러 굳이 돈을 모아서 차를 사고 날 이식할 생각을 하냐고. 그럴 돈이 있으면 원룸이라도 반지하 말고 지상층으로 좀 옮기지. 하여간 정만 많아가지고 그러니 노조 하다가 해고당하고 저 모양이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통하지가 않아. 꽉 막혔어. 인간이 어쩜 저리 생겨먹었냐고. 참 세상 잘 살겠다. 사람 좋아봤자 지만 힘들다는 걸 서른이 훌쩍 넘어도 모르나. 아이고 참 답답해서 없는 눈에 눈물이 나올 지경이구만. 나도 담배나 한 대 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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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아주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시선으로 과학의 역사 곳곳에 드러난 혹은 숨은 여러 사건을 바라보고 이를 엽편소설 형식으로 씁니다. 소설이니 당연히 팩트가 아닌 점도 있습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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