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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밖 과학읽기] 해부학자 (빌 헤이스 저, 양병찬 역/ 알마)
Bio통신원(LabSooniMom)
해부학을 배운 적은 없다. 다만 의과대학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던 그 시절. 그 맘 때가 되면 풍겨오는 냄새가 있었다. 우리는 그때쯤이면 늘 서로의 얼굴을 보면 이야기했다. ‘그때가 왔구나’
[해부학자]는 빌 헤이스의 '해부학 청강기'이다. 그가 정작 의대생들은 혀를 내두르는 그 맘때 풍겨오는 그 냄새의 현장에 간 이유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도 해부학을 통한 자기 발전을 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해부학의 바이블이라고 불리는 [그레이 아나토미 Grey’s Anatomy](1)의 저자 ‘헨리 그레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1858년 처음 출판된 이래로 미국에서만 37판이 출판되었으며 열 가지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160년이 넘도록 그 명색을 유지하고 있는 [그레이 아나토미]의 저자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아이작 뉴턴,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영국의 왕립학회 정회원이었다. 위대한 책을 썼지만 하얀 도화지처럼 알려진 것이 없는 그의 인생을 찾아 빌 헤이스는 해부학 실습실로 들어간 것이다. 이 책의 초반엔 1860년 성 조지 병원의 해부학 실습실 사진이 있다. 빌은 이 사진을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 놓고 시신 앞에서 심각한 표정의 헨리 그레이의 표정을 보고 또 보며 헨리 그레이가 성 조지 병원에 등장했던 1850년대와 현재 해부학 실습실의 자신을 번갈아 이야기하며 하얀 도화지를 채워 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헨리 그레이가 위대한 책을 쓰고 천재와 같은 삶을 살고 35세의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는 이야기를 빼면 그의 삶의 서사는 어디서도 찾기 힘들었다. 빌은 헨리 그레이의 발자국을 그의 책 [그레이 아나토미]로 돌아가 되짚어 본다.
이 책에는 없지만 인터넷에서 찾은 초판의 수정본을 보면 ‘헨리 그레이, 왕립학회 회원’ 이란 글자 밑에 이 책에 나온 수많은 삽화를 그린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또 다른 헨리인 ‘헨리 반다이크 카터’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 줄엔 저자와 닥터 카터가 공동으로 해부했음을 명시했다. 빌은 헨리 그레이를 찾기 위해 그와 함께 이 책을 쓴 ‘헨리 카터’를 쫓아간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그는 런던 웰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헨리 카터의 일기를 요청한다. 해부학 실습이 있던 어떤 날은 샌프란시스코 대학 도서관의 고서 보관실에 하얀 장갑을 끼고 등장한다. 일기를 읽으며 과거 헨리 카터가 지나간 성 조지 병원의 복도를 상상하고, 헨리 그레이와의 만남의 순간을 찾기 위해서 오래된 그들의 주변 인물에 대한 책들을 들춰보면서 말이다.
(출처: https://wellcomeimages.org/indexplus/image/M0016989EA.html Wellcome Collection gallery (2018-03-29))
빌은 약대 학생들, 물리치료과 학생들 그리고 의대생들과 함께 해부학 실습을 한다. 청강생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실습해 임했고 메스로 자르고 손으로 만지면서 두 헨리의 삶을 느껴보고자 한다. 어쩌면 외워야 할 것이 많고 잘라봐야 할 것이 많아 쉽게 지나치기 쉬운 근막을 홀로 실습실에 남아 눈과 손에 담아놨던 건 근막을 꼭 집어 강조하던 헨리 그레이에게 숙제 검사를 맡는 기분은 아니었을까.
책의 표지에는 헨리 카터가 그린 목의 동맥을 그린 삽화가 있다. 근섬유의 세세한 표현, 흑백이지만 강력하게 표현해낸 목동맥과 눈을 감고 있는 표정의 얼굴까지 헨리 그레이의 [그레이 아나토미]에 꼭 맞는 화려한 옷을 덧입힌 그림이다. 헨리 카터는 논문에 들어갈 그림을 한 번 봐달라는 그레이의 부탁에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청해서 그를 도와주겠다고 한다. 그것이 그들의 공동작업의 시작이었다. 지라에 대한 논문으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 헨리 그레이와는 다르게 의대를 막 졸업한 헨리 카터의 미래는 불확실했다. 1853년 3월 19일 자 의학잡지 [랜싯]에 실린 그의 “의학 화가”에 대한 광고는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앳된 모습의 헨리 카터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는 일기장에 세세히 기록한 것처럼 스스로를 절제하는 사람이었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신앙에 대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그레이 아나토미]가 출간된 즈음 그는 인도에 군의관으로 떠나게 된다. 해부학 교과서를 만든 그가 해부학과 헨리 그레이와 성 조지 병원을 떠나 인도로 간 것은 완전히 독립된 새로운 삶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영국 땅을 밟았을 때엔 그는 해부학자가 아닌 역학자이자 미생물학자이자 공중보건학자가 되었다.
빌이 해부학 실습을 할 때 지도를 해주던 테어너는 해부학 실습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총체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완벽한 이해가 불가능해요. 해부학에 대한 이해의 상당 부분은 여러 신체 부위들을 동시에 다룸으로써 형성돼요.”
헨리 그레이를 만나기 위해 들어갔던 해부학 실습, 그리고 그를 찾기 위해 만났던 헨리 카터를 통해 빌은 인체구조에 대한 예리한 통찰 얻었고 [그레이 아나토미] 뒤의 한 인간의 성장의 길을 같이 걸었다. 그리고 또 하나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전염병이란 죽음으로 헨리 그레이의 모든 것이 태워 없어져 하얀 도화지가 된 것처럼 연인의 죽음을 목도하며 정작 수많은 시신 앞에서 죽음이라는 도화지는 실습실에서 채우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시간 여행을 마친 기분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런던, 빌이 있는 샌프란시스코 대학의 해부학 실습실, 그리고 연인 스티브와 함께 그 두 해부학자의 발자국을 따라간 현대의 런던의 모습이 빌의 살아있는 문체에 오롯이 담겨 두 해부학자의 이야기를 넘어 자신과 함께 해부학 실습을 하는 이들 그리고 그의 연인의 모습을 마치 영상으로 나에게 보여준 듯했다.
헨리 카터의 섬세한 삽화들과 함께 타임슬립에 올라 보길… 빌의 말처럼 무엇인가를 위해 질주하는 과거의 두 해부학자와 중년의 빌과 목표를 향해 배움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을 만나 보길…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체와 죽음은 각기 배우는 곳이 다르다. 인체는 해부학 시간에 시신을 해부하며 배우는 거지만, 죽음이란 사랑-사랑하는 누군가와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1) 원 제목은 [Anatomy: Descriptive and Surgical 해부도와 상세한 설명이 달린 해부학] 이었지만 줄여서 [그레이 아나토미]라 불렀고 후기 판본에서 정식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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