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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른 미국 생활] EP 1. 영어 잘하시겠어요?
종합 이승원 (2020-05-25)

오랜만에 연락된 지인들과 안부를 나누거나 처음 만나는 한국 분들과 자기소개를 주고받는 와중에 "10년 넘게 미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말이 "와, 영어 잘하시겠어요."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항상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도 영어 좀 잘하고 싶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영어가 가능했기에 학위 과정을 마칠 수 있었을 테고, 미국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살 수 있었겠죠. 그러나 제가 영어를 잘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이나 겸양, 혹은 완벽주의자라서가 아닙니다. 저는 언어(language)로서의 영어가 아닌 도구(tool)로서의 영어를 구사하는 낮은 단계의 영어 사용자이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제 분야에서 통용되는 표현과 단어를 외워서 활용하는 것이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에 여전히 부단한 노력을 써야 하는 단계라는 거죠.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여전히 추켜세우시거나 심지어 잘난 척하는 것 아니냐고 오해하시는 분들도 계셔서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르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미국에서 지내온 시간 동안의 대부분을 실험실에서 홀로 보냈기에 영어를 쓸 시간이 많이 없었습니다."
 

실험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영어를 사용하는 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혹여 쥐나 곤충 혹은 식물 같은 다른 종의 생명체와 대화할 수 있다면 생명과학이 지금보다는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은 나만의 망상일런지

[그림 1] 실험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영어를 사용하는 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혹여 쥐나 곤충 혹은 식물 같은 다른 종의 생명체와 대화할 수 있다면 생명과학이 지금보다는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은 나만의 망상일런지...


일단 먼저, 미국에 올 당시로 돌아가서 제 영어 수준이 어땠는지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2005년 7월, 미국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나서 미국을 상징하는 한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 갔습니다. 그래도 몇 개월의 어학원 경험과 스터디그룹 활동을 통해 영어로 말하는 것을 나름대로 수련했기에 제 영어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지라 카운터로 성큼성큼 가서 "Can I have a number 1 set?"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종업원은 "?" 하는 얼굴을 짓더니 "Do you wanna have number 1…. what?"이라고 하더군요. r 발음이 부정확해서 그랬을까 싶어서 이번엔 좀 더 혀를 꼬아 다시 한 번 더 말했더니, 잠시 고민하다 "OK, you wanna number 1 combo?"라고 말하더군요. 그렇습니다. 미국에서는 세트 메뉴를 combo 혹은 meal이라고 하더라고요.

아차 싶었습니다. '내가 틀린 영어를 쓴 건가? 그럼 이 친구는 나를 우습게 알려나?'라는 오만 생각이 머리를 스쳤죠. 자신감이 급격하게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돌발 상황은 헬게이트를 열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계산대를 톡톡 누르며 종업원은 곧이어 바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히어로고?"

음?????? 생판 처음 들어보는 영어였습니다. 히어로는 영웅인데 여기 왜 튀어나오는 것일까요? 무너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제 뇌의 한구석에 정돈되어있는 매뉴얼대로 대답해봅니다.

나: "I beg your pardon?"
종업원: "히어로고?"
나: "I am sorry?"
종: "(슬슬 짜증 남) 히어로ㄹ고?"

20년 가까이 배워온 영어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한국의 영어교육에 대한 원망이 들더군요. 오만 생각이 다 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을 어떡하든 이겨봐야겠다는 생각에 매뉴얼이고 뭐고를 떠나 그냥 자존심을 버리고 다시 한 번 더 물어봤습니다. "I am sorry but I don't understand."라고 조심스레 이야기하자 그 종업원은 상기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Here, or to go?"라고 또박또박 끊어 이야기하더군요. 아하, 레스토랑 안에서 먹을 건지, 아니면 가져갈 건지를 묻는 것이었네요. 이쯤 되니 그 종업원에게 정말 미안하기도 하고, 저 자신도 너무 부끄러웠기에 저는 조용히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Take out, please."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고, 미국 동부와 중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햄버거집인 five guys. 아직도 주문할 때는 긴장을 한다

[그림 2]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고, 미국 동부와 중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햄버거집인 five guys. 아직도 주문할 때는 긴장을 한다.

 

이렇게나 부족했던 저였기에, 제가 선택한 전략은 "최대한 사람들과 많이 그리고 자주 부딪히자"였습니다. 석사과정을 밟았던 대학교는 Ann Arbor라는 도시에 있었는데 이곳은 university town이라 치안도 좋았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서로 모임을 하는 것이 꽤나 자연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저희 학과 동기들도 서로 뭉치기 좋아해서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에 여기저기서 모임을 가졌죠. 학업과 연구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사람들과 만나는데 보냈습니다. 그렇다고 한국 친구들과 만남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모임 참석을 권유하면 그 어떤 자리도 마다하지 않고 참석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네요. 첫 2년을 보냈던 Ann Arbor에서 할로윈 파티만 4번을 갔으니 말 다 했죠. 남들의 눈치 따윈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씩 영어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져갔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저에게 질문하더군요. 미국의 공용언어(official language)가 무엇인지 아냐고요. 저는 영어와 스페인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웃으면서 "미국에는 공용언어로 지정된 언어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널리 일반적(commonly)으로 사용되는 것이 영어일 뿐이지, 그 어떤 언어도 미국에서는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수년이 지난 후 이 말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 사건을 다룬 기사에서도 이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1].) 이에 덧붙이며 그 친구는 "의사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의아한 말일 수는 있겠지마는, 그게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가치와도 일치하지 않을까"라고 말하며 제게 항상 자신 있게 머리를 들고 이야기해도 괜찮다고 어깨를 토닥거려 주더군요. 이 짧은 문답 이후로 저는 영어가 단순한 도구가 아닌 문화 자체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과 동기들과의 home party. 대부분 연락이 끊어졌지만 그래도 한두 명은 여전히 연락 중

[그림 3] 과 동기들과의 home party. 대부분 연락이 끊어졌지만 그래도 한두 명은 여전히 연락 중.

 

국립국어원의 정의에 따르면 언어는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 또는 그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라고 합니다 [2]. 그렇기에 언어를 알아가는 것은 사회관습과 문화 역시 이해한다는 것도 포함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미국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수준 높은 영어를 구사하더라도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아무리 수사적 스킬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대화가 끊임없이 진행되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그리고 개개인의 성격과 성향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서로의 관심도 특히 말하는 상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경우 수사적 한계를 넘어서는 것 같더군요. 예를 들어, 미국인들 중 대다수는 스포츠를 좋아하고 자신이 응원하는 팀 혹은 라이벌리(rivalry)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대학 혹은 프로 미식축구에 열광하는 사람이 많죠.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꽤나 많습니다. 한국과 비교해서 서로 지지하는 정당 혹은 정치인에 대해서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시되지 않는 분위기이죠. 자동차나 장비류, 심지어 총기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많기도 하구요. 이런 주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금세 서너 시간은 훌쩍 지나는 게 다반사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언어로서의 영어가 내포하고 있는 미국의 문화를 배워가는 것이고, 아직도 저는 그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굳이 문화라는 넓은 의미가 아니라 좁은 의미로 도구로서의 영어라는 측면만 보더라도 제가 영어를 잘한다고 말하긴 힘듭니다. 일례로, 미국에 온 지 5~6년쯤 지나고 나서 주변을 돌아볼 시간이 생기면서 깨달은 것인데, 꽤 많은 사람이 영어--좁게는 미국인부터 넓게는 영어를 주 언어(main language)로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두 가지 오해를 가지고 있지 않으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건 바로 "영어는 한국말과 달리 존댓말이 없다"라는 것, 그리고 "표현이 직설적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존댓말의 경우,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고 써봤을 표현인 "would you please...", 그리고 그와 비슷한 용례의 "would you mind"나 "do me a favor" 혹은 "please let me" 같은 정중한 표현은 일종의 예의를 차린 존댓말로 볼 수 있죠. 미국 사람들은 모두 이름(first name)을 편하게 부른다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특히나 노교수님 같은 경우는 "Dr. 성(last name)"이라고 호칭하며 경칭만을 사용하기도 하죠. 어떤 경우에는 이름(first name)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어가 직설적이라는 건 더더욱 큰 오해입니다. 영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미국과 영국은 풍자와 조소로 점철된 코미디 문화가 일상화된 곳이기도 하고요. 오히려 한국 사람들에 대한 미국 사람들의 선입견 중 하나가 "한국인들은 말이 짧고 직설적이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짧게 그리고 빨리빨리 표현하다 보니 그렇게 직설적인 (straightforward) 표현을 사용하는 게 당연하기도 하지만요. 결국은 영어도 마찬가지로 그때그때 상황과 경우에 맞는 말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네요. 결국 It depends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영어가 직설적이라고 느끼는 건 아마도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인들의 주된 화법이 두괄식을 따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로 상징되듯 미괄식 화법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에게는 하고자 하는 말이 먼저 나오는 화법을 직설적이다라고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오히려 먼저 제시된 본 명제를 설명 혹은 논증하기 위해 비유나 예시를 한국어보다 더 많이 사용한다고 느낄 경우가 많습니다. 캘리포니아 사투리라고 많이 알려진 표현입니다만 문장의 말끝마다 "like (~처럼)"을 붙이지 않으면 설명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하죠. 박사과정 시절의 경험인데, 어떤 개념을 세 문장 내로 간단히 답하라는 질문에 열 문장, 스무 문장으로 풀어쓰는 학생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이런 경우 대다수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답을 정확히 잘 모르면서 뱅뱅 돌려가며 비유적인 말만을 지껄이는, 속된 말로 "썰을 푸는" 경우였죠. 같이 채점하던 동부 필라델피아 출신 친구는 이런 습관을 가리켜 BS(직역하면 소의 분변 정도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투덜댔습니다. 시험에서 요구하는 답은 일반적인 대화(casual conversation)와는 다름에도 전혀 따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불평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길게 주저리 이야기했지만, 사실 미국에 학위 과정 혹은 연구 과정으로 나오시는 분들은 영어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의무교육과 고등교육에서 가르치는 영어교육의 수준은 상당히 높다고 생각합니다. 언어 소통이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연구실적만으로 당당히 학위를 받아 가는 사람들도 많이 봤을 정도니까요. 물론 그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난 사람들이기에 예외적인 경우이긴 합니다만, 지금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를 준비를 하는 분 중 그들보다 더 뛰어난 분도 분명히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같이 28살이라는 늦은 나이와 생애 해외여행 한 번도 못했던 사람도 미국에 와서 적응하며 살 정도면 비록 영어 능력이 제한적이라도 할지라도 삶을 영위하는데 너무나도 중요한(critical) 건 아닐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도 여러 사람에게 말합니다. #영어좀잘하고싶다아아아

 

[영어와 관련한 조금 다른 미국 생활의 사소한 팁]
1. 박사 후 연구과정을 나오는 경우 영어시험 점수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2020년 현재 TOEIC 점수도 제출이 가능하니, 미국으로 나오실 생각이 있으신 분은 반드시 미리 TOEIC이나 기타 다른 영어시험을 준비하셔서 비자 발급에 문제가 없도록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2. 의외로 까다로운 영어는 식자재와 관련된 경우입니다. 고기 부위나 생선 종류, 그리고 채소의 명칭은 적응하시는데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습니다.
3. 만약 영어 회화를 준비하고 계신 분이라면 '만연체'를 지우시길 권합니다. 짧은 문장으로 하나씩 말하는 게 더 대화에 용이합니다.
4. 많은 분이 "You'd better"를 부드러운 권유라고 생각하고 많이 사용하시는데, have to와 같은 의미의 강한 어조를 내포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encourage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출처:
[1] Kaur, FYI: English isn't the official language of the United States, https://edition.cnn.com/2018/05/20/us/english-us-official-language-trnd/index.html
[2]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View.do?word_no=224753&searchKeywordT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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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원 (University of Cincinnati College of Medicine)

과학이 생활 속에 녹아드는 삶을 바라는 소시민이자 생명과학 노동자. 현재 University of Cincinnati에서 Postdoctoral researcher로 생체시계(biological clock) 분야를 연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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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1 댓글작성: 회원 + SNS 연동  
회원작성글 싸연  (2020-05-25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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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미국 사람들중 외국인이 영어를 구사하면 알아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못알아 듣겠다는 투로 되묻는 사람들이 가끔있습니다
발음에 짜증을 내는것도 있고 한편으론 조롱하는겁니다 인종차별을 은근히 그렇게들 하는겁니다
어쩌겠습니까? 다 좋은 미국인만 있는것도 아니고 외국인 특히 아시아인의 한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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