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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소설로 읽는 과학자이야기 39. 『문맹』
Bio통신원(과학작가 박재용)
꽤 유명한 건물들이 내 손을 거쳤네.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 와익셔의 레글리 홀, 버킹검의 윌런교회. 물론 내 절친한 동료이자 존경하는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과 함께였어.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시 전체 건축 감독관이기도 했지. 당시 재건되는 런던의 모든 건물은 내 허락을 거쳐야 지을 수 있었어.
갈색 곱슬머리가 감싸고 있는 두개골은 컸던 반면 턱은 좁았다. 회색 눈동자는 우울해 보였고, 굽어진 등은 그렇지 않아도 별로 크지 않은 그를 더 왜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집고 이야기를 시작한 그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환하게 밝았다.
현미경을 발명한 건 내가 아니지. 하지만 말야 나야말로 제대로 된 현미경을 만든 사람이란 말야. 복합현미경이란 물건은 내가 만든 거지. 네덜란드의 레이우엔훅도 내 영향을 받았지. 그가 쓴 논문을 검증한 것도 나고 말이지. 마이크로그라피아라는 책도 내가 썼어.
망원경도 내가 발명한 건 아니지만 제대로 별을 보기 위한 건 내가 만들었단 말이야. 갈릴레이 영감은 어떻게 그렇게 허접한 망원경으로 관측을 했는지 모르지만 말야. 내가 제대로 된 망원경을 만들었기 때문에 천문학자들이 별을 관측하기가 쉬워졌지. 그뿐인가 목성의 대적점도 내가 발견했거든.
그거 아나? 뉴턴의 고리도 사실은 내가 발견한 걸세. 뭐 그거야 내가 발견한 것 중에선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지. 더구나 뉴턴이 내 성과를 훔친 게 한두 번이라야 말이지.
내가 만든 발명품은 그 말고도 여럿이 있어. 압력게, 풍속계, 개량된 온도계, 습도계도 모두 내가 만든 걸세. 어떻게 보면 내가 최초의 기상학자라고도 할 수 있지.
로버트 보일경의 조교로 있을 때 공기 펌프를 만들기도 했네. 기체의 압력과 부피의 관계에 대한 보일경의 법칙은 그 펌프로 확인한 결과이지.
그러나, 말을 잇던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원래 창백하던 그의 안색은 더 하얗게 변했고, 회색 눈동자도 살짝 떨렸다.
그러나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결국 물리학이었어. 가장 오랜동안 공을 들이고 고민을 했지. 자 이 책 이 페이지를 한 번 읽어보게.
그가 펼친 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1674년 런던에서 지구의 운동에 관한 논문이 한 편 출간되었다. 논문의 저자는 조만간 이제까지 알려진 것과는 세부적으로 크게 다른 우주 체계를 선보일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세 가지 가설에 기초하고 있었다.
“첫째로 모든 천체들은 그것의 중심을 향해 작용하는 인력 또는 중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천체들은 우리가 지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 자신의 부분들을 끌어당겨 그것들이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권 안에 있는 다른 천체들도 끌어당긴다.” 그렇기 때문에 해와 달뿐만 아니라 수성, 금성, 화성 등의 행성들도 지구와 그 궤도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둘째 가설에서는 모든 물체가 일단 운동을 시작하면 새로운 힘의 작용을 통해 원 또는 타원 궤도나 다른 궤적을 그리며 굴절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직선 운동을 한다고 했다.
“셋째 가설은, 끌어당기는 힘은 그것이 작용하는 물체가 힘의 중심에 가까이 있을수록 더 강하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그 페이지를 다 읽기를 기다리곤 말을 이었다.
자연의 책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진다고들 하지. 튀코 브라헤는 지구상에 태어난 인간 중 가장 밝은 눈을 가진 자였어. 또 하늘의 천체를 바라보는 것을 일생의 업으로 삼고 단 한 번도 소홀히 하지 않았지. 그러나 자연의 언어인 수학을 제대로 알지 못했지, 그래서 그가 관측한 자료는 요하네스 케플러를 통해서 빛을 발해야 했지. 위대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또한 수학자 출신. 그의 위대한 업적은 금성과 달을 망원경으로 본 것이 아니지. 그는 수학의 언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을 끝내버렸지. 그뿐인가 하위헌스도 데카르트도 수학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비밀을 넘봤네.
비천한 나는 튀코와 마찬가지로 그 수학의 언어를 말하고 쓰지 못하는 문맹이었다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이런저런 병을 앓았고 덕분에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못했네. 천신만고 끝에 옥스포드에 들어왔지만 학사금이 없어 토마스 윌의 조수가 되어 화학실험을 도왔고, 보일의 조수가 되어 펌프를 만들어야 했지. 수학을 공부할 시간이 없었어. 원형 진자를 사용해서 시계를 만들고 결국 왕립학회의 실험관리인이 되었지.
물론 변명일 수 있어. 열심히 노력한 결과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관사에 머물 수 있게 되었고 학회의 종신회원이 되었으니 그때부터 수학을 해도 늦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말야, 난 내 실험에 이미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도 그것이었어. 난 베이컨의 사상으로 왕립학회를 이끄는 사람이었어.
난 늘 말했지. 과학은 기술을 도울 수 없어도, 기술은 과학을 도울 수 있다고. 그걸 증명한 것도 나였고.
그러나 아 뉴턴, 지랄맞게 고귀한 뉴턴이여. 이 시대 누구보다 앞선 수학자. 내가 중력에 대해 이야기하자 뉴턴은 중력을 수학으로 만들었네. 내가 관성을 말하자 뉴턴은 힘과 가속도의 법칙을 간단한 식으로 만들었네. 그래 인정하지 그는 내가 직관적으로 생각했던 걸 누구보다 아름답게 표현했어. 더구나 누구도 반박할 수 없도록 아주 치밀하고 정교하게 증명해냈지.
뉴턴이 나타나자 세상이 바뀌었어. 그리고 그와 나는 서로 극도로 혐오했어. 내 아이디어를 훔치고 날 무시하는 그를 어떻게 용납할 수 있냔 말이지. 난 내가 학회의 장으로 있는 동안 그가 학회에서 어떠한 자리도 갖지 못하게 하리라 결심했고, 그 역시 내가 학회에 있는 동안 학회에 오길 거부했지.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네. 나는 그보다 일곱 살이나 많고, 또 항상 병에 시달리고 있었어. 내가 그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날 것이고, 내가 떠난 뒤 난 뉴턴의 이름 아래 묻힐 거라고.
그대로 되었네. 내 초상화는 학회에서 떼어졌고, 내가 남긴 자료와 논문들은 학회에선 볼 수가 없었지. 학회에서 난 완전히 사라진 사람, 그 이름을 말하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지. 내가 뭘 하겠나.
로버트 훅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다시 밝은 안색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이제 난 만족스럽네. 이렇게 마젤란에 오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나. 더구나 여기선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다들 알고 있더군. 갈릴레이 영감도 내 연구를 아주 흡족해했고 말야. 보일경도 아주 반가워했지. 더구나 뉴턴은 내가 있다는 이야길 듣자 마젤란으로 오길 거부했다고 하지? 그 다운 일이야. 그는 다른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생각이 없어. 그는 다른 이들의 어깨를 밟고 올라서는 일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로버트 훅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결국 자연은 수학으로 설명해야 하는 게 맞으니까. 적어도 물리학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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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훅(Robert Hooke FRS, 1635년 7월 28일 ~ 1703년 3월 3일)은 영국의 자연 철학자이며, 과학 혁명기에 이론과 실험 양면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자 박물학자, 그리고 과학자이다.
로버트 훅은 영국을 대표하는 과학자 중의 한 명으로, 현대 현미경학의 기본 본질이 되는 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를 출판하였으며 세포(cell) 이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다. 그리고 용수철과 같은 탄성체의 복원력과 변형력의 관계를 나타내는 훅 법칙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그는 현미경을 사용하여 화석을 관찰하고 초기 진화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화학에 있어서는 로버트 보일의 진공펌프 제작에 관여하여 보일의 법칙 발견에 일조하기도 하였으며 연소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레고리안식 망원경을 제작하여 화성과 금성을 관찰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건축학에 있어서도 관여하였는데, 런던 대화재 이후 도시 재건을 위한 설계사의 수장을 지냈다고 한다. 빛의 굴절 현상을 관찰하여 빛의 파동성 이론을 지지하였고, 뉴턴의 고리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공기가 다른 물질에 비해 구성 요소 간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의 소립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리라 추측하였다. 또한, 로버트 훅은 중력의 작용이 역제곱법칙을 따를 것이라 추론하였는데, 이는 후에 아이작 뉴턴에 의해 중력의 법칙으로 증명되었다.
훅은 1662년 왕립 학회(Royal Society)의 회원이 되었으며 그의 다재다능한 능력은 많은 왕립 학회 회원들의 실험에 도움을 주었으며 한편으로는 왕립학회를 신사들의 잡담장소에서 과학자 사회의 원형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한 사교적인 과학자였다.
* 위키 백과에서 발췌함.
* 본문의 책 내용은 schuller, V., Der leibniz-Clarke Briefwechsel, berlin (1991) <라이프니츠, 뉴턴 그리고 시간의 발명> 은행나무 194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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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아주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시선으로 과학의 역사 곳곳에 드러난 혹은 숨은 여러 사건을 바라보고 이를 엽편소설 형식으로 씁니다. 소설이니 당연히 팩트가 아닌 점도 있습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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