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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인물로 본 의학의 역사] 데이비드 레이머, 여성의 삶을 강요받다
Bio통신원(글깎는의사)
여러 사건을 덮고 있는 코로나19를 한 꺼풀 벗겨 내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되는 이슈는 아마 성(性)이리라 생각합니다. 다수에 의한 여성의 성적 착취를 인터넷을 통해 구현한 n번방 사건과 함께 성추행·폭력 사건들이 계속 불거지고 있습니다. 또, 올해 안에 결론을 내야 하는 임신중절 관련 결정이 있지요. 2020년 초, 한 부사관이 성전환하고 계속 복무하길 원했던 일이나 트랜스젠더 여성이 여대 입학을 포기한 사건도 빼놓을 수 없지요. 소설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고 영화로도 제작되어 하나의 지표가 되었던 『82년생 김지영』을 필두로, 페미니즘이 목소리를 드높이면서 『이코노미스트』는 현재 청년층에서 가장 뜨거운 갈등이 성별 갈등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1] 제가 생활에서 들은 바로 보아도, 한때 한국 사회를 나눠놓았던 세대 갈등보다 지금은 성별 갈등이 더 심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림. 열 살 때의 브렌다 레이머. 출처: BBC
갈등이 심해지는 것은 결코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문제가 곪아 터질 때까지 표출되지 못하는 상황을 나쁜 것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한편, 갈등으로만 끝나는 것도 결코 환영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 삶은 남성이나 여성으로만 이뤄지지 않기에, 상대방의 자리를 만들고 그것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도록 노력할, 때로는 강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삶은 자멸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상대방의 자리를 만든다는 것이 생각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유리천장과 경력단절이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여성이 회사 등 집단에서 승진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유리천장이고, 사회 초년기에는 직업을 가졌으나 결혼과 임신 후 직업을 그만두는 것이 경력단절이지요. 여성들이 이런 문제를 겪고 있으니, 남성의 승진을 제한하고 강제적으로 남성에게 육아를 할당하는 정책을 쓰는 것은 어떻습니까? 당장은 평등한 사회를 구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곧, 남성이 자신들의 유리천장과 경력단절을 놓고 분노를 표현하지 않을까요? 한번 남성에게 제한을 부여했으니, 이번엔 여성에게 제한을 부여하면 될까요? 이런 접근을 미봉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결국, 문제를 계속 한쪽에게 전가할 뿐이지 해결이 된 건 아니므로.
하지만 우리는 이런 해결책만을 떠올리게 되는 모양입니다. 한 사람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는 방식, 이를 일찍이 니체는 “여인들이 사내처럼 되어가고 있다”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2] 진정한 자, 즉 남을 원망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이가 별로 없기에 서로를 깎아내리기에 급급하다는 것이죠. 학술적 논의에선 아시다시피 이를 하향 평준화라 부르며 비판합니다. 평등에 몰두한 나머지 모두가 가진 것을 빼앗기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 말고 다른 접근법은 없을까요? 어떤 해결책을 생각해봐야 할까요?
여성이 그 자체로 긍정될 수 있는 방식, 그리하여 남성이 그 자체로 긍정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게 답이 될 수 있겠지요.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적 지향의 다양성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일이기도 할 겁니다. 이런 방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오랫동안 우리 생각의 틀이 무언가 중심을 놓는데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중세는 신을, 근대는 인간을 사유의 중심에 놓고 모든 것을 방사형으로 짜 맞추었죠. 현대 사상은 이를 공격해 왔습니다. 특히,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서구 사상이 어떤 중심을 통해 수립되어 있음을 오랫동안 비판해 왔습니다. 남성과 여성이라면 남성이 중심이 되고, 말과 글이면 말이 중심이고, 인간과 동물이면 인간이 중심인 중심들의 목록을 통해 우리 생각의 틀이 형성되어 있다는 거였지요. 이런 중심이 있는 사고 체계에선 누군가를 그 자체로 긍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둘 중 하나가 중심인 사태를 벗어나야, 각각이 서로 자신의 자리를 잡을 수 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겠지요.
이런 생각에선 여성에겐 여성의 자리를, 남성에겐 남성의 자리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결코 현재 역사, 문화적으로 정립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저 우연히 정립된 것일 뿐,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고 또 변화해야 하는 목록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남성에게 특정 직업이 어울린다거나, 여성은 어떤 성격을 타고난다는 말이 절대, 절대 아닙니다. 대신, 타고난 것을 억지로 바꾸거나 고치려고 하는 대신, 그것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간에.
이런 생각을 전개하면서, 생물학적 경향을 억지로 바꾸려 했던 시도로 인해 결국 안타까운 결말을 맞은 한 사람을 소개하려 합니다. 데이비드 레이머(David Reimer, 1965~2004)는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여성으로 길러졌고, 오랫동안 알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다시 남성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60년대 한창 목소리를 높이던 성과학(Sexology) 때문인데, 이 분야의 여러 연구자는 생물학적 성별을 양육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레이머의 삶은 그것은 잘못된 접근임을 보여주는 예시로서 의학사에 남았습니다.
하나 주의할 것은 이런 이야기가 너무도 쉽게 오해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가정들을 끌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성별을 양육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여자아이에게 로봇을 쥐여주면 안 된다는 말이나 남자아이는 집안일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자아이는 핑크를, 남자아이는 파랑을 좋아한다는 것도 문화적 가정일 뿐,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자에게 ‘너는 남자야’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 주변 환경을 모두 맞춰 어딜 둘러봐도 자신을 남자로 생각하게 만드는 일은 실패합니다. 그것은 반대도 마찬가지겠지요. 아직 누군가가 자신을 어떤 성으로 정의하게 되는 이유는 알기 어렵습니다. 생물학적인 요인과 문화적 요인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거라 봐야겠지요. 중요한 것은, 그 결정에 족쇄를 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상대방의 자리를 긍정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여성을, 그리고 남성/여성 이분법을 벗어나는 성을 지닌 이들을 배제해 온 남성 중심의, 동일성의 권력을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브루스, 브렌다, 데이비드
레이머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선 꼭 소개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성과학자였던 존 머니(John Money, 1921~2006)는 젠더 정체성(gender identity), 젠더 역할(gender role),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 등 현재 우리가 성과 관련한 문제를 논의할 때 흔히 사용하는 개념을 도입했으며, 변태 성욕(sexual perversion)이라는 표현을 성도착(paraphilia)으로 바꾼 인물이었습니다.[3] 머니는 2,000편에 가까운 논문과 책을 저술했고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주저 『동성애자, 이성애자, 그 사이 (Gay, Straight, and In-Between)』에서 성적 본능을 부정하고 대신 당시 심리학에서 유행하던 행동주의 이론(Behaviorism)을 성 문제에 적용하려 합니다.[4]
이 부분을 좀 더 살펴보고 넘어가야겠지요. 버러스 프레더릭 스키너(Burrhus Frederic Skinner, 1904~1990)의 주도 아래 한때 심리학을 대표했던 행동주의 이론은, 개인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현재 행동의 원인을 과거 자극에서 찾습니다. 도구적 조건형성(instrumental conditioning), 즉 강화(reinforcement)와 처벌(punishment)을 통해 행동을 조절할 수 있으며 행동은 외부적 관찰을 통해 예측과 통제를 할 수 있다는 행동주의는 심리학의 수학화, 과학화를 이끌었습니다. 머니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리비도(libido), 성충동이자 생명의 힘을 부정하고 대신 성행동 또한 외부 자극을 향한 유기체의 반응이자 어떤 의미에서 훈련된 것이라고 보고자 했지요.
그림. 머니는 성과 젠더 정체성에 관한 엄청난 양의 연구를 남겼으며 젠더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개념이 정립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가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내세운 사례들로 인해 이후 비판받게 되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데이비드 레이머의 사례다. 출처: Getty Images
여기에서 머니는 “신체정신(bodymind)”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그는 성행동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생물학적 결정론을 부정하고 성은 여러 요인의 연쇄를 통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펼쳤지요. 사회 구성주의(social constructionism), 즉 모든 것은 사회와 문화로 결정된다는 이론이 태동하던 때였습니다. 현재는 사회 구성주의가 이론을 주도하던 90년대를 넘어 생물학적 결정론과 문화적 결정론을 종합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기에 머니의 주장이 어색하게 다가오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전 세대의 본능 중심 이론을 거부한 머니는 신체와 정신이 연결된 것이므로, 생물학적 조건은 학습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젠더 중립성(gender neutrality), 즉 아이는 처음에 중성으로 태어나 성장하면서 성을 형성해 간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5]
1967년, 머니는 이미 주목받는 학자였고 그는 텔레비전 방송에서 자신의 주장을 자신 있게 펼칩니다. 이 방송을 주의 깊게 보던 한 부모가 있었습니다. 쌍둥이 브루스와 브라이언을 키우던 론 레이머와 자넷 레이머였지요. 6개월 때 아기들이 소변을 보기 어려워하는 것을 안 레이머 부부는 브루스와 브라이언을 병원에 데려갔고, 포경(phimosis, 포피가 음경 귀두를 덮은 상태)이라 포경 수술(circumcision)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안타깝게도 수술에서 사고가 발생하여 브루스의 성기가 절단됩니다. 1960년대, 성기 재건술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부부는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남자로 키우자니 성기가 없어서 성생활도 결혼도 불가능할 텐데, 해결책은 없을까 고민하던 차였습니다. 그때, 머니의 방송을 보면서, 레이머 부부는 브루스의 성별을 바꾸는 것을 고려하게 됩니다.
레이머 부부는 당시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연구를 수행하고 있던 머니에게 연락을 취했고, 머니는 그들을 돕기로 합니다. 머니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연구하던 학설을 증명하는 최고의 사례가 될 거라 믿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성에 관한 어떠한 자극에도 노출되지 않은 영아의 상태에서 성기를 상실했으니, 머니의 젠더 중립성 이론을 적용한다면 브루스에게 적절한 성적 성장 환경을 제공하여 그를 여성으로 성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이미 1965년에 존스 홉킨스는 최초의 완전 성전환 수술에 성공한 바 있습니다.[6] 머니가 이를 이어 아동의 성별을 완전히 바꾸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성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는 셈이었지요. 20대 초반이었던 레이머 부부가 브루스에게 주어질 여러 치료를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어쨌든 부부는 치료에 동의했고, 브루스는 이름을 브렌다로 바꿨습니다. 남성 호르몬 조절을 위해 고환 절제술도 시행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브루스의 흔적을 지우고 브렌다를 여아로 키우는 일만 남았다고 모두 믿었습니다.
머니는 브렌다와 레이머 부부를 매해 면담하며 결과를 평가해 나갔습니다. 머니는 브렌다가 성공적으로 여아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브렌다가 실험적으로 훌륭했던 것은 이전에 성적 기형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한 성전환의 결과를 내보일 수 있음에 더하여 쌍둥이인 브라이언이 실험 대조군의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머니는 여기에 “존/조안 사례(John/Joan case)”라는 이름을 붙여 학계에 보고했고, 이후 상당히 오랫동안 성 재지정(sex reassignment)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확고한 증거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림. 브라이언과 브렌다가 유치원에 가기 시작하던 시점의 모습. 브라이언은 전형적인 ‘남아’의 모습으로, 브렌다는 ‘여아’의 모습으로 키웠지만, 이 방법은 결코 브렌다의 정체성을 바꾸지 못했다. 출처: 『As Nature Made Him』[5]
그러나, 이면에선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성적 어휘와 행동을 자신 있게 내보여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한 머니는 레이머 남매 또한 이를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브렌다에게 여성 역할을, 브라이언에게 남성 역할을 시키곤 했습니다. 그러나, 가족과 주변의 눈에 브렌다는 그다지 여아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아 옷차림을 시키고 장난감도 여아의 것이었지만, 브렌다는 리본 드레스를 좋아하지 않았고 선머슴처럼 행동했습니다. 사춘기에 들어서자, 브렌다는 여성 호르몬을 주입받습니다. 몸에서 이차 성징이 나타나는 게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브렌다의 목소리는 굵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남성 호르몬은 다른 기관에서도 분비되기 때문에 브렌다가 남성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지만, 고환 절제술과 여성 호르몬 주입을 받는 아이에게서 나타날 만한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브렌다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잘못되었다고 계속 느꼈지만, 부모와 브렌다를 상담하던 치료사 모두 그것은 정상적으로 나타나는 혼동일 뿐이라고 일축했습니다.
결국, 13살이 된 브렌다는 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을 거부하고 만약 자신에게 머니와의 면담을 강요하면 자살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레이머 부부는 아이가 고통을 겪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그가 겪은 수술과 치료에 관해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브렌다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내가 느낀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괴짜가 아니었다. 나는 미친 게 아니었다.”[5] 브렌다는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여성 정체성을 버리고, 이름을 데이비드로 바꿉니다. 성전환 수술을 받은 데이비드는 1990년 결혼하고 세 아이를 입양합니다.
데이비드의 이야기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7년 생물학자 밀턴 다이아몬드(Milton Diamond, 1934~)와 정신의학자 키스 시그먼슨(H. Keith Sigmundson)이 데이비드가 겪은 문제를 논문으로 발표하면서부터였습니다.[7] 논문은 머니의 보고와 달리, 데이비드가 여성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했고 성기의 외과적 성형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음을 주장하지요. 1998년, 잡지 『롤링 스톤』에 기자 존 콜라핀토(John Colapinto, 1958~)가 「존/조안의 진짜 이야기 (The True Story of John/Joan)」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싣습니다. 데이비드를 인터뷰한 존은 의료적 접근의 문제와 함께 데이비드가 겪은 고통을 심층 보도하여 2000년 미국 잡지 편집장 협회로부터 보도 상을 받았고, 내용을 보충하여 『자연이 그를 만든 대로: 소녀로 길러진 소년』이라는 책을 펴내게 되지요.
이로 인해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하기도 했던 데이비드. 하지만 그의 삶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맙니다. 형제 브라이언의 죽음, 이혼, 실직으로 우울증을 겪던 데이비드가 결국 2004년 자살하고 만 것이죠. 다른 요인도 영향을 미쳤지만, 데이비드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애초에 그에게 가해진 조작의 상흔이었습니다. 그의 자살은 모호한 생물학적 성을 타고난 아이에게 태어나자마자 성 지정(sex assignment)을 위한 수술을 시행하는 것을 막는 쐐기가 됩니다.
긍정의 도구를 찾을 것
성별 갈등의 문제를 생각해보기 위해 데이비드의 사례를 살펴본 것은, 성별 갈등의 문제를 표면이 아닌 그 구조에서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지금 사회는 성별 갈등이 어떤 식으로 불거지고 있는가, 다시 말하면 누가 무엇을 놓고 싸워서 차지할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각자의 몫을 상상해보지 않았기에, 해결책은 여성과 남성의 구분을 없애고 모두가 하나가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으로 귀결합니다. 겉보기에 멋진 표현처럼 보이는 이것은 당장 문제는 해결할 수는 있으나, 전제가 틀렸기에 이상한 쪽으로 흐르게 됩니다. 예컨대, 일부 페미니즘 옹호자가 트랜스젠더의 자리를 부정하는 이유는, 이들이 과거 ‘남성’이 독점하던 자리를 탈취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남성 대신 여성이 들어서야 하는데, 트랜스젠더가 끼어 들어오면 안 되므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분리되어 있으며 이것이 갈등을 불러오는 것은 분리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단일 성별을 위해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전통 사회는 남성 사회였고, 현대 사회라고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여성들이 남성의 질서에 편입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여성이 직장 생활을 하고 자기 주도적인 삶을 꾸리는 것, 이는 과거 남성의 성 역할을 탈취한 것으로 여겨지기에 남성의 반발을 삽니다. 남성 사회는 기존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 진출을 막아섭니다.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은 이들을 부르는 이름인 타자의 대표가 여성인 것은, 기존 사회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비단 한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계몽의 시대, 휴머니즘이 신을 끌어내리고 대신 그 자리에 놓았던 “인간”은 모든 인간이 아닌, 백인,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 유산계급, 교육을 받은 자만을 의미했으니까요.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남성 사회를 인간 사회로 바꾸면 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여성이 배제되지 않는 사회는 당연히 우리가 모두 추구해야 할 목표로, 현실에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성을 배제하지 않기 위해 중립적인 인간을 설정한다면, 그런 논의는 각자가 지닌 고유성을 탈각시킵니다. 예컨대, 앞서 말씀드렸지만 아이를 성 중립적으로 기르기 위하여 남자아이에게 핑크 옷과 공주 인형을 쥐여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접근은 기존에 역사, 문화적으로 설정된 남녀 역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을뿐더러,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부정해야 할 어떤 것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각자 나타내는 고유성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남성/여성의 이원론적 구분을 벗어나는 다른 성 정체성을 추구하거나 가지는 이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이를테면 트랜스젠더를 남성, 여성으로 편입시키고 기존 틀을 벗어나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트랜스젠더 여성이 ‘여성적인’ 옷을 입지 않는 것 등) 여전히 그들이 지닌 고유함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데이비드가 삶과 죽음으로 증명했던 것은 자신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그에게 (그것이 생물학적이든, 사회적이든, 문화적이든 어떤 경로로 인하여) 주어진 무언가를 수용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며, 아무리 사회가 부정하고 강제하더라도 그것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성에게 여성이 되라고, 동성애자에게 이성애자가 되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과거 특정 성별이, 위치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권력을 다른 위치에 이양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힘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 권력을 독점하고 타자를 억압하던 과거의 편견에 가득 찬 체제는 이제 철폐해야겠지요.
그림. 작가, 페미니스트, 운동가였던 오드리 로드는 자신을 “흑인, 레즈비언, 어머니, 전사, 시인”으로 정의하곤 했다. 로드는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반발했지만, 흑인 페미니즘과 백인 페미니즘이 다름을 명료하게 언급하기도 했다. “흑인 페미니즘은 흑인 얼굴을 한 백인 페미니즘이 아니다.” 분노와 저항이 새로운 억압을 불러와서는 안 됨을, ‘주류 페미니즘’에 속할 수 없던 로드는 이미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출처: Guardian[9]
시인 오드리 로드는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허물 수 없다”라는 에세이를 쓴 바 있습니다.[8] 근대 남성의 억압하는 권력을 흉내 내는 방식으로 결코 그 집은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도구, 모두가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참고문헌
1. South Korea women are fighting to be heard. The Economist. Apr 8, 2020 [cited at Apr 21, 2020]. Retrieved from: https://www.economist.com/special-report/2020/04/08/south-korean-women-are-fighting-to-be-heard.
2.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7. 283쪽.
3. Ehrhardt AA. John Money, Ph.D. J Sex Res 2007;44(3):223-224.
4. Money J. Gay, Straight, and In-Between: The Sexology of Erotic Orienta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5. Colapinto J. As Nature Made Him: The Boy Who Was Raised as a Girl. New York: Harper Perennial; 2013.
6. Witkin R. Hopkins Hospital: a history of sex reassignment. The Johns Hopkins News-Letter [Internet]. May 1, 2014 [cited at Apr 23, 2020]. Retrieved from: https://www.jhunewsletter.com/article/2014/05/hopkins-hospital-a-history-of-sex-reassignment-76004/.
7. Diamond M, Sigmundson HK. Sex Reassignment at Birth: A Long Term Review and Clinical Implications. Arch Pediatr Adolesc Med 1997;151(3):298-304.
8. 오드리 로드. 주해연, 박미선 공역. 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 2018.
9. Kwon RO. Your Silence Will Not Protect You by Audre Lorde review―prophetic and necessary. The Guardian. Oct 4, 2017 [cited at Apr 27, 2020]. Retrieved from: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7/oct/04/your-silence-will-not-protect-you-by-audre-lorder-review.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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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소아치과 전문의가 된 다음, 새로 공부를 시작해서 국내에서 의료인문학 박사를, 미국에서 의료윤리 석사를 취득했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의학에 관한 서사적 접근과 의료 정의론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한겨례>에 칼럼을 연재 중이며, 의료윤리 이슈를 소설, 영화 등으로 풀어낸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썼다. 현재 의학의 모습에 영향을 미친 문제적 개인들의 이야기를 살펴, 의료 현실을 바꿀 가능성을 찾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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