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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인물로 본 의학의 역사] 메리 맬런, “장티푸스 메리”라는 이름을 신문 1면에 도배하다
Bio통신원(글깎는의사)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를 빼놓고 2020년을 떠올리긴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3월 말, 국제보건기구(WHO)의 범유행(pandemic) 선언 이후 코로나19는 그야말로 전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중국에선 우한을 중심으로 확진자 8만 명을 넘겼고 한국 또한 증가 폭은 감소했지만, 확진자 수 9천 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1] 현재 5천 명을 넘겨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 수를 기록한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상황에 부닥쳐 있고, 확진자 수 3만 명을 목전에 둔 스페인에서도 코로나19는 흉흉한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지역은 피해 가는 듯 보였지만, 서부 아프리카 지역을 시작으로 감염자가 늘어나고 있어 국제보건 단체의 염려를 더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감염자의 경우, 회복을 위해 산소호흡기와 감염확산 차단이 가능한 의료시설이 필요한데 아프리카 지역에선 이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 확산과 관련하여 여러 사람의 이목을 끌었던 것 중 하나는 무증상 감염자의 존재였습니다. 감염자 본인은 별다른 증상을 나타내지 않지만, 타인에게 질병을 옮길 수는 있는 무증상 감염자는 고열 유무를 통해 일단 환자를 거르려 했던 초기 방역 지침을 뚫고 코로나19가 지역사회 감염으로 확산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지역사회 감염이란 감염경로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를 말하죠.
어떻게 보면, 역사를 바꾸는 것을 전쟁이라 말할 수도 있을 거예요. 여기에선 세계대전과 같은 국가 간의 전쟁이 중요하긴 하죠. 하지만, 병원체와의 전쟁 또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파죽지세로 세계를 삼키려 했던 알렉산더 대왕을 막은 것은 열병이었고,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고대 그리스의 패자가 되었던 아테네를 쓰러뜨린 것 또한 감염병이었습니다. 『총, 균, 쇠』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지적했듯 8만 명이 넘는 병력을 지닌 잉카군을 168명의 스페인 군대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감염병으로 인한 혼란 때문이었다고 하지요.[2] 14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으로 약 1억 명이 사망하자 기존 질서를 상징하던 종교는 권위를 잃었습니다. 심지어 세균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공중보건이 시작된 20세기 초에도, 스페인 독감은 전 세계를 강타했지요. 이 병의 경우 20~40대 사망률이 높았기에, 제1차 세계대전을 조속히 마무리하는 데 영향을 미쳤지요.
이런 질병에 맞서 인류는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했고, 이로 인해 한숨 돌린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여전히 감염병이 우리 일상을 위협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지요. 지금도 그러한데, 이전에는 어땠을까요. 물론, 역사 이래 감염병을 어떻게 다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19세기만 해도 감염병은 나쁜 기운(瘴氣, miasma)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여겼기에, 사람들이 감염병을 다루는 방식은 지금과 전혀 달랐어요. 로베르트 코흐(Robert Heinrich Hermann Koch, 1843~1910)가 1877년 탄저균을 발견하고 세균 이론이 정식으로 받아들여진 이후에야 사람들이 감염병을 대하는 자세는 지금과 비교 가능해졌지요. 막 세균에 관한 이론이 정립되고 있었지만, 아직 예방이나 치료법이 없던 시기의 기록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지금 마주한 사태를 따져보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오늘은 막 20세기 초엽으로 들어서던 미국 뉴욕주의 한 인물을 살펴보려 해요. 아일랜드 이주민으로, 요리사로 일하던 메리 맬런(Mary Mallon, 1869~1938)입니다. 그는 미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장티푸스(typhoid fever) 무증상 보균자로, 수십 명에게 장티푸스를 옮겼다는 이유로 신문 1면을 장식하고 평생 감금당해야 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당시 발견된 유일한 장티푸스 무증상 보균자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이민자의 지난한 삶과 감염병의 공포
맬런의 삶을 살피기 전에 먼저 장티푸스에 관해 간략히 알아볼까요? 장티푸스는 티푸스균에 의해 발병하는 질환인 티푸스(typhus)의 하나로, 티푸스에 속하는 유명한 병으로 발진티푸스도 있지요. 장티푸스는 살모넬라 타이피(Salmonella typhi)에 감염되어 발생하며, 주로 균에 오염된 음식이나 물로 인해 옮겨집니다. 고열, 오한, 두통이 나타난 뒤 복통과 설사를 동반하기에 증상에 관한 적절한 처치와 함께 항생제 투여를 하게 됩니다. 최근에는 장티푸스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는 1% 이하로 낮아졌어요.[3] 하지만, 치료 방법이 없던 시절 10%의 사망률로 악명이 높던 장티푸스이기에 발생 즉시 방역 대책을 수립해야 하는 제1군 감염병으로 분류되어 있지요.
20세기 초, 뉴욕시는 대도시로 부자와 빈자가 각기 자신의 영역에서 살고 있었어요. 주로 이민자로 이뤄진 가난한 이들은 창문이 없어 빛도 들어오지 않고 환기도 안 되는 좁디좁은 방에 모여 살았지요. 열악한 주거 환경에 과밀집된 인구가 위생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던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감염병으로 고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티푸스도 사람들을 괴롭혔던 병 중 하나죠. 1912년에 발표된 논문을 보면, 1907년 맨해튼에선 매주 최소 19명에서 최대 107명까지 장티푸스에 걸렸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4]
감염병을 차단하기 위해선 일단 사람 사이 물리적 거리가 중요하지요. 가까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병이 확산하므로, 거리를 만들어 감염병을 옮길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건데요. 당시 뉴욕시에서 이런 개념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론 감염병 차단을 위해 환경 개선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환경 개선 노력은 쉽사리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았어요. 그나마, 사진을 통해 사회를 바꾸려 했던 제이컵 리스(Jacob A. Riis, 1849~1914)가 펴낸 사진집 『세상의 절반은 어떻게 사는가』가 이민자들이 공동주택에서 겪는 고통을 널리 알렸습니다.[5] 이에 영향을 받아 뉴욕주는 1901년 공동주택규제법안(Tenement House Act)을 발효해 공동주택 시설을 규제하기도 했지요.
그림. 리스가 담아낸 공동주택의 실상은 끔찍했다. 전 세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수백만 명의 이주자가 뉴욕시에 살고자 했고, 그들은 공동주택에서 거주하는 것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불량한 거주 환경은 부족한 영양 상태, 가혹한 노동 조건과 결합하여 온갖 질병을 끊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중 강력한 것은 단연 감염병이었고, 폐렴, 콜레라 등이 사람들을 괴롭혔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고자 했어요. 세균 이론은 이전의 기운을 통한 감염 이론과 달리, 명확히 감염원을 확정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셈입니다. 이때 활약하던 것이 위생 공학자(sanitary engineer)였어요. 이들은 수도 시설 개선을 조언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감염을 퍼뜨리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자 했습니다. 이런 위생 공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조지 소퍼(George A. Soper, 1870~1948)는 뉴욕주에 살던 톰슨 부부로부터 의뢰를 받습니다.[6] 휴가철에 빌려주는 주택이 있는데, 지난여름에 놀러 온 가족에게 장티푸스가 생겼는데 원인을 확인해달라는 거였지요.
소퍼는 물이나 음식 등으로 장티푸스 감염이 시작되었는지 조사해보았지만, 문제가 있었어요. 이 지역에서 해당 기간에 장티푸스에 걸린 것은 오로지 이 집안 뿐이었던 거지요. 식자재나 물은 주변 사람들이 같은 곳에서 공급받았기 때문에 이 집에서만 장티푸스가 나타날 이유가 없었어요. 주변 상황을 수소문해 가던 소퍼는 장티푸스 발병 3주 전, 요리사가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요리사가 훌륭한 복숭아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내놓았음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로부터 소퍼는 대담한 추론을 내놓습니다. 이 요리사가 “건강 보균자(healthy carrier)”, 즉 본인은 증상을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세균을 옮길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 것이죠.[7]
이 사람을 찾으면 자신이 미국 최초의 건강 보균자를 발견하리라 확신한 소퍼는 이 요리사, 메리 맬런이 일한 집을 찾아다니기 시작합니다. 맬런이 일했던 여러 집에서 장티푸스 발병 사례가 있었음을 확인한 소퍼는 자신의 추론이 확신이라 믿었죠. 맬런은 일하던 곳을 여러 번 바꿨는데, 그가 일하던 곳에서 총 22명이 장티푸스에 걸린 것으로 소퍼는 확인했어요. 그는 결국, 맬런이 현재 일하는 장소를 찾아내게 됩니다. 맬런은 당시 바운 씨 가족의 요리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미 그 집에도 장티푸스에 걸린 사람이 둘 있었죠. 소퍼는 맬런을 만나 그가 건강 보균자이며 다른 사람에게 질병을 옮길 수 있음을 설득하고 검사대상물로 혈액, 소변, 대변을 채취하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요. 결국, 소퍼는 뉴욕시 보건 위원회의 힘을 빌리려 했고, 공중보건 개선에 헌신한 여의사 조세핀 베이커(Sara Josephine Baker, 1873~1945)가 경찰과 함께 도주하던 맬런을 붙잡게 되지요.
맬런이 건강 보균자라는 증거가 있었다면 보건 위원회가 신병을 구속한 일은 정당화될 수 있을 거였어요. 하지만, 그때까지 나온 것은 맬런이 일한 곳에서 장티푸스가 발병했다는 정황 증거뿐이었어요.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냐고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 뉴욕시에선 한 주에 수십 명의 장티푸스 감염자가 발생했어요. 맬런이 일했던 곳과 장티푸스 발병 위치가 우연히 겹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죠. 하지만, 맬런이 요리사로 일하던 게 문제였어요. 맬런이 손을 잘 씻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지금처럼 손 소독제가 발전한 것도 아니니, 당시 위생 도구로 손을 씻었다 해도 세균을 완전히 박멸하기 어려웠을 가능성도 크죠. 단, 그가 일하던 곳이 “보통은 장티푸스 감염이 생기지 않는” 부잣집이었다는 게 문제였어요. 네. 맬런은 못 사는 이들에게만 걸리는 감염병을 부자들에게 옮기는 더러운 존재로 여겨졌던 거예요.
맬런은 처음에 뉴욕시에 있는 윌러드 파크 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이후 시 옆의 작은 섬인 노스브라더 섬의 리버사이드 병원으로 옮겨져요. 그동안 맬런의 검사대상물을 채취했고, 대변에서 살모넬라균이 검출되면서 그가 장티푸스 건강 보균자라는 결론이 내려졌고요. 이 사실이 어떤 경로로 인해 언론사로 넘어가, 『뉴욕 아메리칸』 1909년 6월 20일 자는 “장티푸스 메리”를 자극적인 그림과 함께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었어요. 요리를 하는 한 여성이 죽음의 기운을 뿌리고 있는 광경이 미국 전역으로 퍼지는 순간이었죠.
그림. 신문은 메리 맬런의 이름과 구금 장소를 실명으로 내보내며 그에게 “장티푸스 메리”라는 별명을 붙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죽음을 뿌리는 마녀 요리사 그림이다. 맬런의 이야기가 화가의 상상력을 자극했는지, 아니면 이 그림이 신문의 구미에 맞았는지, 그림은 신문 1면의 절반을 차지했고 당연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역사에 맬런의 기록이 남게 된 것은 이 신문 기사 때문일 것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장티푸스 메리”, 26년 동안 섬에 구금 당하다
구금 당시 38세였던 맬런은 리버사이드 병원에서 나오기 위해 노력했어요.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자신이 보균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외부 연구소로 검사대상물을 보내기도 했지요. 하지만 맬런의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갑니다. 문제는, 맬런이 비록 최초로 확인된 장티푸스 건강 보균자이긴 했지만, 1909년에는 이미 뉴욕시만 해도 다섯 명의 보균자를 확인했다는 데 있지요. 이들은 모두 남성이었고, 누구도 구금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1910년 12월 2일 자 『뉴욕 타임스』에는 「걸어 다니는 장티푸스 공장 소개」라는 기사가 실렸어요.[8] 이 기사에 소개된 “장티푸스 존”은 36명에게 장티푸스를 옮겼지만, 그가 치료에 협조적이라는 이유로 구금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만, 당시에 장티푸스 치료법 같은 건 없었어요. 여러 화학 약품이 치료라는 명목으로 바로 환자에게 적용되곤 했지요. 장티푸스균이 쓸개에 모여있다고 생각한 의사들은 맬런에게 담낭절제술을 권했어요.[9] 하지만 맬런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아직 마취학과 출혈에 대한 대응, 항생제 등이 없던 시절에 수술을 거부한 것이 그렇게까지 비난받을 일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더구나, 강제 구금되어 주변 환경에 적대심을 느끼던 맬런 처지라면 어땠을까요. 또, 헨리에타 랙스의 이야기에서도 소개했지만, 오랫동안 의사들이 연구를 위해 사람을 납치하고 알 수 없는 치료를 시행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어요. 이는 아직 의학이 새로 도입된 학문이자 실천이었고, 사람들은 의학에서 극단적인 정보 비대칭 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생각해보면 과장은 있을지언정 크게 틀린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었던 것이죠.
처음 소퍼의 제안에 불응하고, 보건 위원회의 조세핀 베이커로부터도 도망쳤으며, 병원의 지시도 잘 따르지 않던 맬런에겐 여러 겹의 낙인이 씌워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가 남성이었다면, 그가 이민자가 아니었다면, 그가 부유한 계층에 속했다면, 그가 당대의 여성을 향한 고정관념을―적당한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에 충실하며, 일하지 않는―벗어나지 않았다면 그만이 장티푸스 건강 보균자라는 이유로 평생 구금이 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림. 당대의 주목받는 생활 양식은 언제나 공격의 대상이 되곤 했지만, 20세기 초 여성의 생활은 감염병과 연결 지어지곤 했다. 이 그림은 가정부가 집주인의 옷자락이 끌리는 치마를 터는 모습을 그렸는데, 먼지에서 장티푸스, 폐결핵, 독감이 피어 나온다. 이 위험한 세균과 병균을 끌어들이는 것도, 치우는 것도 모두 여성의 일로 그려졌다. 출처: 논문[10]
그는 한번 풀려나긴 합니다. 구금된 지 3년이 지난 1910년, 맬런은 자유의 몸이 되었어요. 조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직업을 바꿀 것, 개인위생을 철저히 할 것, 한 달에 한 번씩 보건국에 보고할 것. 여기에 동의한 맬런은 일 년 넘게 조용히 지내요. 직업도 세탁부로―훨씬 고되고 급여도 적은―바꾸고, 보고도 충실히 했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나자, 맬런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사라집니다. 문제는, 그 후 맬런이 다시 요리사로 돌아갔다는 거예요.
1915년 초, 맨해튼에 있는 슬로언 여성 병원에서 장티푸스 감염이 발생합니다. 25명이 감염되었고, 조사에 들어간 사람들은 한 요리사가 취직했다가 사라졌음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메리 브라운이라는 이름을 쓴 그 요리사가 맬런이었다고 사람들은 확신하지요. 결국, 맬런은 붙잡혀 다시 리버사이드 병원에 구금되었고, 이번엔 23년 동안 섬에 갇혀 살게 됩니다. 그가 왜 다시 요리사를 시작했는지, 아니, 사실 그 요리사가 정말 맬런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여러 가지 정황 증거로 인해 총 26년의 구금 생활을 했다는 것, 그리고 그 증거를 뒷받침했던 것은 과학적인 자료가 아니라 맬런에게 씌워진 낙인이었다는 거예요.
감염병, 그 복잡한 이름
맬런 이야기는 감염병에 걸린 사람을 현대 사회가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우선, 비록 그에게만 씌워진 건 아니라 할지라도, 그에게 부여된 악명은 우리가 질병의 원인을 한 사람이나 지역에 붙들어 매려 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좋은 예지요. “장티푸스 메리”와 초기 코로나19를 가리킬 때 사용된 명칭 “우한 폐렴”은 그런 의미에서 닮은 꼴이에요. 그것이 정치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 현대 사회는 감염병의 인과를 확인하려는 강박에 매여 있는 셈이고, 이것이 과연 감염병을 대처하는 데 유용한 자세인가? 라는 의문을 품게 만들죠.
다음, 격리에 관해 맬런 사례는 중요한 지점을 웅변하고 있어요. 격리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아직 감염 방식, 병리, 치료법 등이 알려지지 않은 감염병에 대한 적절한 격리는 시간을 벌어 문제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오래된 대처법이고, 이 방식이 여전히 필요함은 코로나19 또한 증명하고 있지요. 그러나, “적절한”이라는 말에는 언제나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충분한 격리 기간과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런 방법을 설정하는 데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할까요? 49명에게 장티푸스를 옮겼다는 이유로 평생 한 사람을 구금한 것은 타당할까요? 이 질문이 불편한 이유는, 감염병 환자를 대하는 일에 있어 우리는 언제나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환자 혼자서 질병의 결과를 떠안는 다른 질환과 달리, 감염병은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된다는 점에서 생각을 무척 복잡하게 만듭니다. 감염병 환자를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하자니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줄 것 같고, 자유를 제한하는 등 강제적인 방법을 마냥 적용하자니 환자가 지닌 권리가 손상되는 것이죠. 개인과 사회가 감염병을 놓고 정면으로 충돌할 때,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중간 높이의 시점”일 거예요. 개인의 눈높이에서 본다면 사회가 병을 이유로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기는 어렵습니다. 사회의 눈높이에서 본다면, 사회 성원의 보호를 위해 개인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해지죠. 이 두 시점 중 어느 한쪽에만 매몰되지 않을 때, 우리는 문제 해결을 향해 한 걸음 디딜 수 있게 될 거예요.
예컨대, 우리는 평소에 허용되기 어려운 방식으로 코로나19 감염자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2015년 메르스 사태 이후 개정된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76조의2와 그 「시행령」 제32조의2에 따르면, 감염자의 주민등록번호, 주소, 휴대전화번호, 처방전, 진료기록부, 출입국관리기록, 신용카드·직불카드·선불카드 사용, 교통카드 사용, 영상정보, 위치정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보를 평소에 수집한다고 하면 이는 민간인 사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감염확산이라는 특수 상황에선 어느 정도까진 수집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시민의 이동과 접촉이 이전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난 현대 사회에선 효과적인 해결책일 거예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 얼마나, 얼마만큼 동안 정보 확인을 허용할 것이며 이는 어디까지 공개될 수 있는가에 관한 구체적이고 정밀한 논의입니다. 정보 수집이 만사를 해결한다는 생각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빅브라더를 허용하는 일로 이어지겠고, 정보 수집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은 걱정 때문에 효과적인 방법을 발로 차버리는 일이 될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장티푸스 메리” 사례는 언론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그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경고이기도 해요. 특히나 사람들이 공포에 휩싸여 있는 때에는 더욱더. 뉴스가 더 많은 노출을 위해 자극적인 제목과 그림을 달 수밖에 없다면, 그에 신뢰를 부여하기는 어렵겠죠.
나가며
버지니아 울프가 소설 『제이콥의 방』에서 적은 말로 맬런에 관한 생각을 마무리하려 해요. “재앙, 살인, 죽음, 질병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고 웃으며, 마차의 계단을 뛰어오르는 방식이 우리를 나이 들고 죽게 만든다.” 감염병 앞, 우리는 무엇을 보고 웃고 있나요?
참고문헌
1. COVID-19 Coronavirus Pandemic. Worldometer [Internet]. Mar 23, 2020 [cited at Mar 23, 2020]. Retrieved from: https://www.worldometers.info/coronavirus/
2. 재레드 다이아몬드. 김진준, 옮김. 총, 균, 쇠. 문학사상사; 2005. 107쪽.
3. 제1군 전염병(장티푸스). 질병관리본부 [Internet]. 일자불명 [cited at 2020년 3월 23일]. Retrieved from: http://www.cdc.go.kr/CDC/cms/content/mobile/31/49731_view.html.
4. Bouduan CF. Typhoid Fever in New York City Together with a Discussion of the Methods Found Serviceable in Studying its Occurrence. Am J Pub Health 1912;2(6):431-447.
5. 제이컵 A. 리스. 정탄, 옮김. 세상의 절반은 어떻게 사는가. 교유서가; 2017.
6. 수전 캠벨 바톨레티. 곽명단, 옮김. 위험한 요리사 메리. 돌베개; 2018.
7. Marineli F, Tsoucalas G, Karamanou M, Androutsos G. Mary Mallon (1869-1938) and the history of typhoid fever. Ann Gastroenterol 2013;26(2):132-134.
8. Guide A Walking Typhoid Factory. New York Times. Dec 2, 1910 [cited at Mar 24, 2020]. Retrieved from: https://www.nytimes.com/1910/12/02/archives/guide-a-walking-typhoid-factory-adirondack-woodsman-found-to-be.html.
9. Clarke T. Typhoid Marys gallstones to blame. Nature. May 23, 2001 [cited at Mar 24, 2020]. Retrieved from: https://www.nature.com/news/2001/010524/full/news010524-12.html.
10. Hansen B. The Image and Advocacy of Public Health in American Caricature and Cartoons from 1860 to 1900. Am J Pub Health 1997;87(11):1798-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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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소아치과 전문의가 된 다음, 새로 공부를 시작해서 국내에서 의료인문학 박사를, 미국에서 의료윤리 석사를 취득했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의학에 관한 서사적 접근과 의료 정의론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한겨례>에 칼럼을 연재 중이며, 의료윤리 이슈를 소설, 영화 등으로 풀어낸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썼다. 현재 의학의 모습에 영향을 미친 문제적 개인들의 이야기를 살펴, 의료 현실을 바꿀 가능성을 찾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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