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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으로 조망하는 생명현상] 생물학적 인과율과 확률론
Bio통신원(분도78)
환원주의와 인과성
질병의 원인을 단일 유전자 수준에서 특정할 수 있게 된 오늘날의 우리에게, 생물학적 인과관계에 대한 의문은 새삼스러울 수도 있다. 암, 노화, 면역질환 등 의학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분자적 작용 기전에 기반한 치료제가 개발되고, 유전체 해독을 통해 개개인의 질병 발생을 예측할 수 있는 기술에 근접해 있다. 대중의 눈에는 생명 현상이 분자 혹은 유전자 수준의 엄격한 인과율에 의해 지배되는 기계적 작용인 것처럼 보일 법도 하다. 하지만 원인 X가 결과 Y를 일으킨다는 것이 생물학에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1 전통적인 분자생물학적 관점에서는 막수용체(membrane receptor)에서의 분자 결합이나 DNA 염기서열 전사 등 최초 유발 사건(initiating event)으로부터 세포 차원에서의 최종 결과(outcome)까지의 분자적 경로를 대체로 선형적이면서 단방향성의 생화학적 연쇄 과정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 대사경로(metabolic pathway)의 경우 최종 대사산물(代謝産物)의 되먹임(feedback) 작용으로 인해 닫힌 경로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아 단일한 대사회로(回路)로서의 개념이 중요해진다. 이 두 사례 모두 환원주의적 접근이 유효한 경우로서 일종의 논리회로(logic gate)로서의 수학적 유비(類比)가 성립되고, 원인-결과 관계를 비교적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그림 1).
그림 1 : 왼쪽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 세포내 신호전달 경로, 연쇄작용과 정보처리, 되먹임 회로. (Image sources: NIH National Human Genome Research Institute, Team Sendai 2016, Vrije Universiteit Brussel)
복잡성, 비선형성, 확률적 과정
단방향성 분자적 경로가 그 자체로 고립되어 있고 다른 경로와의 상호작용이 적은 경우, 앞에서 언급한 환원주의적·분자생물학적 패러다임은 생체계를 이해하는 데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경우에서조차 인과적 사슬이 단지 확률적(stochastic) 관계로 이어져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고전적인 유전형(genotype)-표현형(phenotype) 관계에 있어서도 특정 DNA 염기서열 자체 뿐 아니라 그것을 해독하는 분자적 기작(“reading machinery“), 즉 수십 종류의 단백질 및 리보좀 구조의 종합적인 작용에 의한 결과로서 표현형이 결정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2 이와 더불어 세포핵, 세포막, 미토콘드리아, 미세소관 등의 세포 미세구조 역시 유전정보 전달 과정에 관여하는 인자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단방향 경로로 인식되고 있는 유전자 발현 경로에서도 여러 단계적 요인의 집합적·임의적 과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생체 분자적 기작은 분지형(分枝形)의 경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선형적 경로의 개념이 사실상 붕괴하고, 비선형 동역학에 기반한 접근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되먹임 메커니즘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사경로의 예에서는 단방향적 과정으로의 단순화마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복잡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어, 전체적인 대사작용의 연결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스템적 해석이 필수적이다(그림 2).1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방대한 효소반응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분석하는 것을 넘어, 궁극적으로 각각의 관계망 사이를 연결해 주는 동적(動的) 패턴을 밝혀내는 작업이 된다.3
그림 2 : 세포 대사 경로의 연결망. (Image source: Macmillan Education)
생명 : 역동적인 순환적 인과론으로
금세기 시스템 생물학의 약진으로 큰 변화를 맞고 있기는 하나, 생명과학 및 의약학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은 아직 결정론적 인과율의 견지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세기 말 이론적 체계가 완성되어 곧 자연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고전 물리학이 다음 세기에 예상치 못했던 변혁을 맞이했던 것처럼, 다소 경직화·형식화되어 버린 듯한 현대 분자생물학의 인과론적 관점 역시 점차 더 유연하고 비결정론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의 핵심에는 아마도 생물학적 확률이론이 자리할 수 있다.4 추측컨대 복잡한 임의적 과정들의 확률적 중첩(superposition)과 얽힘(entanglement)으로 기술될 생체계의 인과관계 사슬망은, 오래 전 사이버네틱스 이론가들이 상상했던 것과 같이 스스로가 원인인 동시에 결과가 되는 하나의 “자가 인과(auto-causation)“ 체계로서 유전현상과 대사작용을 설명할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그림 3). 이러한 순환 인과율(circular causality)적 개념은 거대분자 → 세포내 소기관 → 세포 → 조직 → 기관 → 개체에 이르는 생체계의 다차원적 현상을 통합적인 이론으로써 조망하는 기본 틀을 제공하는 동시에, 질병과 질환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길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5 그러나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이론생물학의 방법론이 한층 진화된 형태로 발전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림 3 :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그리는 손“ (1948). (Image source:National Gallery of Art)
참고문헌
1. M. Bizzarri, D. E. Brash, J. Briscoe, V. A. Grieneisen, C. D. Stern, M. Levin, A call for a better understanding of causation in cell biology. Nature Reviews Molecular Cell Biology 20, 261-262 (2019)
2. D. Noble, Genes and causation.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Royal Society A 366, 3001-3015 (2008)
3. J-C. Letelier, M. L. Cárdenas, A. Cornish-Bowden, From L’Homme Machine to metabolic closure: step towards understanding life. Journal of Theoretical Biology 286, 100-113 (2011)
4. T. Nakajima, Probability in biology: overview of a comprehensive theory of probability in living systems. Progress in Biophysics and Molecular Biology 113, 67-79 (2013)
5. K. M. Tasaki, Circular causality in integrative multi-scale systems biology and its interaction with traditional medicine. Progress in Biophysics and Molecular Biology 111, 144-14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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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을 전공한 수리생물학 연구자입니다. 정교하고 복잡한 낱낱의 생명 현상을 때로는 멀리서, 전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인 연구 내용을 다루기보다는, 교양인의 관점에서 비형식적인 에세이의 성격을 갖는 연재를 시도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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