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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인물로 본 의학의 역사] 제임스 배리, 남장여자 군의관이 되다
Bio통신원(글깎는의사)
역사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겠지만, 여성의 직업이 늘어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거예요. 아주 오래전, 전설로 남은 몇몇 모계중심사회 또는 여성사회를―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마조네스가 대표적이죠―빼면, 모든 사회는 남성 중심이자 남성의 규칙으로 돌아가는 사회였다가 점차 여성의 참여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을 밟았다고 볼 수 있을 거예요. 물론 그런 변화는 최근 백몇십 년 사이에 급속도로 일어난 것이니 역사 전체가 그런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요.
어쨌든, 그 결과 우리는 사회에서 여러 충돌을 봅니다. 여성이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게 당연해진 이 시대, 사람들은 자녀 양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한쪽에선 여성의 사회참여를 더 확장하고 더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입니다. 다른 한쪽에선 남성, 여성이 아닌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찾기 위해 움직입니다. 2020년 초를 달구었던 여러 소식 중에는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와 여자대학교 입학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있었죠. 글을 쓰는 현시점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이 문제는 앞으로도 답을 요구할 텐데요.
이런 질문들은 각자 다른 문제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각기 다른 질문과 다양한 답이 필요한 문제기에, 위에서 한 단락으로 문제를 모아 놓는 것도 이상해 보이죠. 하지만, 19세기 군의관으로 복무했던 한 의사의 사례는 이 문제가 분리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음을, 오히려 한 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지 묻습니다. 오늘 살펴보려는 것은 영국 의사 제임스 배리(James Miranda Steuart Barry, c. 1789~1865)의 이야기입니다. 배리의 삶으로 들어가기 전, 언젠가 유행했던 수수께끼를 하나 살펴보려 해요.
아버지와 아들이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1] 아버지는 사고 현장에서 급사했고 아들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지요. 그런데 의사가 아이의 수술을 집도하려다가 소리칩니다. “저는 수술을 할 수 없어요. 이 아이는 내 아들입니다.” 의사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학생들에게 물었더니 다양한 답이 나왔다고 해요. 아버지가 친부가 아니라거나 의사가 갑자기 정신이 이상해졌다, 아버지가 되살아난 것이라는 답까지 나왔다지요. 하지만 간단한 답이 있습니다. 의사가 아들의 어머니라는 것 말이죠.
이 이야기는 우리 마음에 내재한 편견 하나를 보여줍니다. 특정 직업은 특정 성별에 속한다는 것. 이미 여성이 의사가 된 지도 오래, 우리는 병원에서 많은 여성 의사를 만남에도 의사는 남성이라는 편견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19세기에는 말할 것도 없지요. 의사는 당연히 남성의 직업이었습니다. 당대 전쟁터에서 이름을 날린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1910)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라고 여겨진 돌봄 노동을 하는 간호사를 전문직으로 만들기 위해,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맞서 싸웠지요. 하지만 그것은 나이팅게일이 남성이 하지 않는 일을 선택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가 의사가 되려 했다면 글쎄요, 나이팅게일의 이름이 지금처럼 기억되진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한편, 많은 분께 이름이 아직 익숙지 않으실 배리라는 군의관은 이 이야기에서 무슨 상관일까요? 그가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해 싸웠던 걸까요? 그는 발령지에서 책으로만 본 제왕절개 수술을 성공시켜 어머니와 아기의 목숨을 구해냈으며, 뛰어난 진료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해요. 하지만, 그것과 여성 지위 향상은 무관하겠죠. 그가 이 모든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은 죽은 다음의 일입니다. 향년 70세로 (이것은 묘비에 기록된 것으로, 이 부분이 위 생몰 연도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배리의 과거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을 마감한 의사의 시신을 염한 여성이 비용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 사실을 폭로하게 되었거든요. 바로, 배리가 여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림. 1820년경에 그려진 제임스 배리의 초상. 목을 가린 목도리가 눈에 띄며, 남성이라고 상정하고 그렸겠지만, 상당히 여성적인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눈매와 입술에 주목하라. 출처: Wikimedia Commons
아니, 40년을 넘게 의사를, 그것도 군의관으로 생활을 한 사람이 여성인지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던 겁니다. 심지어 배리는 임신한 적도 있었다고 해요. 지금의 성별 분류에 따르면 크로스드레서(crossdresser, 이성의 복장을 하는 사람)에 속하는 배리는 당시 사회의 성별에 따른 직업 구분에 도전한 사람이었고, 자신이 사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으며, 심지어 제삼의 성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한 것이죠. 그의 삶이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죠. 과연 성별과 직업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더하여 전 의료인으로서 궁금해요. 과연, 제가 하는 일은 얼마나 특정 성별에 가까울까요? 예를 들어, 치과는 남성적인 일일까요? 여러 방식으로 답할 수 있는 이 질문에 관해, 배리의 삶을 통해 다가가 보려 합니다.
배리, “남자의 지혜를 공유”하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배리는 1789년 제레미아 버클리와 메리 앤 리오던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입니다.[2] 둘 사이에는 마거릿 앤 버클리라는 딸이 있었지요. 이 딸이 아마, 나중에 배리를 사칭하게 되었을 겁니다. 그럼 배리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냐고요? 어머니 메리 앤의 오빠 중 한 명이 제임스 배리였어요. 아버지 제레미아가 일찍 죽고 난 뒤 궁핍에 처한 메리 앤은 딸을 오빠에게 의탁했고, 마거릿 앤은 런던으로 가게 됩니다.
삼촌 제임스 배리 또한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요. 하지만 예술가였던 그에겐 영향력 있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베네수엘라 혁명가였던 프란시스코 미란다 장군(Sebastián Francisco de Miranda, 1750~1816)과 부헨 백작 데이비드 스튜어트 얼스킨(David Steuart Erskine, 1742~1829)이 있었어요.[3] 부헨 백작은 초기의 여권론자 중 한 명이었고, 그는 『꿀벌』 (The Bee)라는 수필집에서 젊은 여성의 교육을 주장합니다.[4] 여성에게 교육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중국의 전족처럼 여성의 정신을 얽어매는 일이라는 것이었죠. 당시 혁명적인 주장을 폈던 부헨 백작이 프란시스코 장군과 함께 친구의 조카에게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연구자들은 보고 있어요.
왜냐하면, 1809년 삼촌 제임스 배리가 사망한 후 마거릿 앤은 제임스 배리가 되는데, 이때 사용하는 이름이 “제임스 미란다 스튜어트 배리”거든요. 미란다와 스튜어트는 배리(이전 마거릿 앤)의 교육을 후원한 프란시스코 장군과 부헨 백작의 성이죠. 또, 배리는 에든버러대학교 의학부를 마치면서 졸업논문으로 서혜부 탈장에 관해 쓰는데, 이 논문을 프란시스코 장군과 부헨 백작에게 헌정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논문의 제언(책 등의 첫머리에 쓴 글)이에요. 그는 그리스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을 인용합니다. “나의 젊음이 아니라, 내가 남자의 지혜를 공유하고 있는지 생각하라.” 남성에게 주로 생기는 서혜부 탈장에 관한 논문이었기에 심사자들은 아무 생각 없었을 것 같지만, 배리의 정체를 생각해보면 위 인용문은 의미심장하죠.
1812년 의사가 된 배리는 1816년 희망봉에 도착합니다. 군 복무를 선택한 그는 영국령이었던 남아프리카 지역에 배치되었고, 두 가지 특이사항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끕니다. 하나는 그가 진료에서 탁월함을 보였다는 것, 다른 하나는 아무리 잘 쳐줘도 18세 소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거예요. 의학부를 졸업하고 3년 수습으로 병원에서 일했으니 20대 중반이어야 하는데 말이죠. 이런 평은 그가 의학부를 다닐 때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동년배 학우들은 그가 나이를 속여서 입학했다고 의심했지요. 누구도 그를 여성이라고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수염이 나지 않고 목소리가 높고 피부가 고우니 소년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는 곧 군 병원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됩니다. 의료 감독관이 된 건데요. 이 업무는 지역 의약품 수입과 의사·약사 면허 발급을 관리하는 등 의료 쪽에서 실권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의 직무는 그의 성향과 충돌합니다. 타고난 개혁가이자 부족한 것을 보고 참지 못하는 배리는 병원 등 의료시설의 비위생과 태만을 고치려고 분주했고, 약품 수입에서 부패가 발생한 것을 고발했어요. 하지만, 당시 식민지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반대편을 늘리는 지름길이었죠.
충분한 지원 없이 배리는 좌충우돌했고, 그 와중에 많은 지배층을 적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그가 위생과 소독을 중시했기에, 치료율은 개선되기 시작해요. 이런 노력은 그가 옮겨 다니던 부임지마다 반복됩니다. 병원 위생과 수도 개선이 그의 주력 사업이었죠. 예컨대, 이후 유명한 크림 전쟁 시기 그리스 코르푸섬에서 일하던 배리는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다친 병사들을 코르푸섬으로 이송해달라고 요청했고, 그의 병원으로 온 환자 462명 중 사망자는 단 17명뿐이었다고 해요. 그 숫자는 당시 작은 항구도시의 하루 사망자보다 적은 수였다고 하니, 배리의 노력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죠. 이를 놓고 배리를 예방의학의 선구자라고 표현한 글도 있지요. 그도 그럴 것이, 역학의 선구자라는 칭송을 듣는 존 스노우(John Snow, 1813~1858)가 통계 자료와 지도를 통해 런던 콜레라의 원인이 오염된 물이었음을 밝혀낸 것이 1854년이었거든요.
그런 와중, 마찬가지로 크림 전쟁에서 환자를 돌보던 나이팅게일은 배리를 만나게 돼요. 그가 배리를 보고 남긴 말이 인상적입니다. “내가 군 전체를 통해 만났던 사람 중 가장 냉혹한 인간이었다.” 배리는 누구보다 거친 표현을 쓰고 성급하게 움직였다고 해요. 그것이 자신의 성별을 가리기 위한 과장된 몸짓이었는지, 배리 자신의 원래 성격이었는지는 알기 어렵죠.
이렇게 군 병원 시설 개선을 위해 노력하던 배리는 1865년 이질로 사망합니다. 그의 사망과 함께 진짜 성별이 밝혀지면서 세상은 다시 한번 배리의 이름을 듣게 되었고, 무수한 소문과 추측이 떠돌게 되지요. 사실 배리는 양성구유자(hermaphrodite,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모두 가진 자)였다던가, 그가 식민지에서 근무할 때 엄청난 결투를 벌였다던가, 조그마한 체구로 무시당하자 상대방을 묵사발로 만들었다든가 하는. 꾸며진 이야기는 배리는 어떻게 자기 진짜 성별을 감추었는가에 관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그를 남성이라고 오인할 수밖에 없었음에 환상의 색을 입히는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그것은, 배리가 여성을 숨기고 두각을 나타내었음을 가리려는, 더 나아가 여성과 남성의 역량이 같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의 병적 증상이라고 읽어볼 수 있는 부분이지요.
그림. 1777년 9월 『런던 매거진』에 실린 기사 데온(Chevalier d’Éon, 1728~1810)의 초상. 배리가 최초로 성별을 사칭한 인물은 아니다. 1748년 인도의 전투에 참전하여 용감함으로 이름을 날린 제임스 그레이(James Gray)는 부상으로 후송된 뒤, 자신이 사실 그레이의 전처 한나 스넬(Hannah Snell, 1723~1792)이었다고 밝혔다. 전역 후 스넬은 자신의 유명세를 활용해 여관을 운영했다. 또, 런던에 살던 프랑스 외교관, 데온을 놓고 사람들은 여성이지만 남성인 체하는 인물이라고 짐작하곤 했다. 하지만 데온의 사후, 그는 가끔 여장하며 루이 15세를 위해 간첩으로 일한 남성이었음이 드러났다. 출처: 논문[4]
물론 배리가 단 한 번도 성별을 들킨 적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해요. 1841년 황열병에 걸려 앓던 배리를 방문한 두 군의관은 잠들어 있는 배리를 보고 그가 여성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 순간 깨어난 배리는 정신을 차리고 엄숙하게 말했다 하지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켜달라고. 두 군의관은 동료를 향한 신의 때문이었는지 그 비밀을 지켰어요. 덕분에, 배리는 남성으로서 죽었고, 경력 동안 자신의 ‘남성다움’을 유지했습니다.
거꾸로 묻기: 의사는 어떤 성별이어야 하는가?
배리의 죽음은 하나의 시작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의 삶이 질문을 던졌다는 것에 더하여, 그가 죽었던 1865년은 영국 최초의 여성 의사 엘리자베스 가렛 앤더슨(Elizabeth Garrett Anderson, 1836~1917)이 면허를 받았던 해이기도 하니까요. 물론, 미국에선 이미 1849년에 엘리자베스 블랙웰(Elizabeth Blackwell, 1821~1910)이 여성 최초로 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어요. 그에 비하면 영국은 늦었죠. 하지만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당시까지 ‘신대륙’의 의학 교육은 그렇게까지 정비된 상태는 아니었다는 거예요. 미국 의사들은 경력과 인정을 위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즉, 앤더슨의 경력에 더 방점이 찍히는 것은 그가 의학에서 전통적으로 인정받던 유럽, 더구나 런던에서 그 모든 저항을 넘어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의사가 되고 싶어 에든버러대학교에—배리가 졸업한 바로 그 학교—입학하려 했지만 거절당한 이후 의학교 여성 입학에 관한 법정 투쟁을 벌인 소피아 잭스-블레이크(Sophia Jex-Blake, 1840~1912)와 함께 1874년 런던여성의학교(London School of Medicine for Women)를 설립했고, 19세기 여성의 의학교 진학을 허용했다가 20세기 의학 교육 개혁과 함께 한동안 여성 의학 교육을 중단했던 미국과 달리 여성 의사 양성을 이어갑니다.
물론, 배리의 삶을 여성 교육의 쾌거라고 읽기에는 한계가 있지요. 그는 철저히—심지어 성별을 들킨 경우에도 상대방에게 침묵의 맹세를 요구하여—자기 성별을 감췄고, 오히려 더 거칠게 행동하여 다른 사람이 의심하지 않도록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이니까요. 그는 남성을 사칭한 사람이었고, 거짓 정체성을 통해 직업적 성취를 보장받았어요.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비난이 제기되어도 할 말은 없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런 생각은 우리가 젠더에 관해 지닌 고정관념으로 인한 것은 아닐까요? 오로지 남성과 여성, 두 가지 성별만 있으며 다른 것은 그저 오류, 착각, 또는 질환일 뿐이라는. 배리가 이 주제에 관해 남긴 글이 없으므로 알 수는 없지만, 그가 트랜스젠더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아니, 더 나아가, 그를 트랜스젠더라고, 지금보다도 훨씬 남녀의 구별이 명확하고 그 선을 넘는 것이 일탈이 아니라 죄악시되던 시대에 자신을 남성이라고 믿었던, 그저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태어났을 뿐인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해보는 건 어떤지요. 이런 생각이 혹시 배리가 수행했던 일들에 그늘을 드리운다면, 그리하여 트랜스젠더 의사라니, 어처구니없군, 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의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이 아닐까요.
저는 궁금합니다. 내 주치의가 트랜스젠더라는 것이 내 진료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요. 저는 의아합니다. 만약 젠더가, 성별이 진료에 영향을 미친다면, 과연 어떤 성별이 의업을 맡아야 하는지요. 저는 신기합니다. 돌봄에 있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성격적 특질, 즉 세심함, 부드러움, 예민함, 날카로움, 심미성, 심지어 공감 등은 주로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왜 우리는 의사가 ‘남성’이어야 한다고 무심코 생각하는 걸까요. 그것은 앞면에는 학이 그려져 있는데 뒷면에는 100원이라고 표기된 것처럼, 앞뒤가 잘못 인쇄된 동전 같은 게 아닌지요. 다시 말하면, 의업에 어떤 성별의 특징이 어울린다고 말할 때, 이미 우리는 무언가 뒤섞인 그림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의사’라는 그림은 그저 자상한 아버지 같은 인물이 아니죠. 그는 아픔을 보듬으면서도 세심하고 날카롭게 질병에 접근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버지와 선생의 권위를 지녀,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질환의 시간에 환자를 붙들어 줄 지지대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의사’라는 인물은 원체 혼성(混成), 아니 혼성(混性)의 존재입니다. 마치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남성의 삶을 살았던 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의사가 특정 성별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오히려, 여러 성별로—소위 제삼의 성까지 포함하여—이뤄지는 게 의사의 정체성이 발전하는 데 더 좋은 건 아닐까요. 그리하여, 특정 성별이 지닌 성격적 특성이 그 직업을 대표하는 대신, 환자와 의료인의 만남에 중요한 가치들을 성숙시킬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한 건 아닐까요.
배리와 나이팅게일, 다르지만 같은 두 궤적
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훨씬 더 유명한 인물이었던 나이팅게일은, 배리를 만난 일에 관해 혹평을 늘어놓습니다. 그가 배리의 죽음에 관해 전해 들은 뒤에 쓴 한 편지에서 배리에 관해 기술한 부분 전부를, 앞서 인용한 부분까지 포함해 다시 옮겨볼게요.
나는 그런 상스러운 질책을 평생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나는 어떤 여자보다 더 많은 욕을 들어왔으니까요. 배리는 (그녀의) 말 위에 앉아 있었고, 나는 햇빛 아래 모자만 쓴 채 하스피탈스퀘어를 지나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병사들, 병참부원들, 하인들, 야영지 동료 등등으로 이뤄진 군중 한가운데에 나를 서서 기다리게 했지요. 내가 질책을 받는 동안 (그녀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신사처럼 처신하고 있었어요.
(그녀가) 죽은 뒤 나는 (그)가 여성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냉혹한 사람은 (그녀)였어요.[5]
어쩐 일이었을까요. 나이팅게일이 배리를 너무 싫어해서 거짓 편지를 써서 보냈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죠. 공적인 글도 아닌 가족에게 쓴 편지에서 상대방을 일부러 사건을 꾸민다는 건, 수신자가 배리와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한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으니까요. 배리가 거친 말을 한 것은 사실일 거예요. 그리고, 그 사건을 회상하는 나이팅게일은 이미 배리가 여성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림. 1813년에서 1816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되는 배리의 초상. 목깃을 잔뜩 세운 소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은 당대에도 신기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배리는 여성에게 주어지는 편견은 피했다 할지라도 평생 이상한 인물로 여겨졌을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눈초리를 극복하기 위해 취했던 전략이 남성성의 과장이라면, 그것이 과연 배리가 만나고 상대해야 했던 환자, 병원, 사회에 좋은 일이었을까? 배리 개인에게는? 출처: Wikimedia Commons
우선, 왜 배리는 나이팅게일에게 거칠게 대했을까요? 누군가는 자신이 얻지 못한 여성으로서의 성취를 얻은 나이팅게일을 향해 반감을 보인 것이라고 말해요. 수긍이 가는 구석이 있는 해석이지만, 그랬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죠. 어찌 됐건 군의관으로서 인정을 받던 배리인 만큼, 사회적 지위를 질투했다고 생각하는 건 어색하지요—더구나 나이팅게일은 훌륭한 가문 출신이니, 출생을 명확히 밝힐 수 없는 자신과 그를 비교했을지도 의심스럽고요. 더구나, 배리는 여자 환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해요.[3] 그 인기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그래서 배리가 동성애자였다는 추측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여자 환자를 수동적인 존재로 각하시키는 견해일 뿐이니 그렇게 설득력이 있진 않지요—적어도 이 두 가지를 연결했을 때, 배리의 행동 양식을 그려봄 직하지요. 그는, 남성성을 과장되이 표현했을 거예요. 외모와 목소리 때문에 계속 의심을 받던 그이니만큼, 행동을 과장하는 것은 효율적인 전략이었겠죠. “상스러운 질책”이나 여성 환자들의 환심을 사는 태도는 배리의 남성 사칭을 돕는 연기라고 보는 게 타당할 거예요.
또, 나이팅게일이 배리를 향한 부정적인 평가를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편지에서 배리는 자신이 평생 들은 욕보다 더 “상스러운” 표현을 쓰는 자이며, 그는 “말 위에” 있는데 자신은 “햇빛 아래 모자만 쓴 채” 서 있고, 배리는 “짐승처럼 행동”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신사처럼 처신”하죠. 이 대조를 질책을 듣던 그 순간에 떠올리지는 않았을 거예요. 회상은 언제나, 내가 지금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과장하는 요소들을 끼워 넣기 마련이죠. 네, 나이팅게일은 그녀, 배리가 “남성”이었음을 강조하려 하고 있어요. 나중에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지만, 자신이 직접 만났던 배리는 그곳에 있던 누구보다도 남성적이었다는 거지요.
하지만 배리가 누구보다 남자처럼 보였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단지, 당시 사회에서 배리가 자기 삶을 걸어가는 데 필요했던 스타일일 뿐이었다고—남성적인, 누구보다도 남성적으로 보였던 여성—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요. 그가 한 일은 어찌 보면 참으로 “여성”적이었으니까요. 나이팅게일과 배리가 수행한 일은 거의 비슷했어요. 두 사람은 태만하고 불결한 군 의료를 개혁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요. 환자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고, 더 좋은 환경에서 환자가 쉴 수 있도록 했고, 이것만으로도 환자 생존율이 극적으로 증가할 만큼 당시 시설은 열악하기 그지없었어요. 세균 이론이 아직 확립되기 전이었던 탓도 있지만, 사람들이—특히 군 지휘부 등 고위 “남성” 관료들이—위생의 가치를 몰랐던 거죠. 사람들이 필요를 인식하고 있는 일을 성취하기도 쉽진 않지만, 다들 필요를 깨닫지 못 하는 일을 해낸다는 것은 불굴의 의지 없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에요. 어찌 보면 친하게 지낼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이었던 거지요.
두 사람의 길은 달랐어요. 한 사람은 남장한 의사로, 한 사람은 간호사로 살아갔지요.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일은 아닐 거예요.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삶을 걸어간 거니까요. 그리고 그 걸음에, 성별은 별로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지요.
참고문헌
1. 에머 오툴. 박다솜 옮김. 여자다운 게 어딨어. 창비; 2016.
2. du Preez HM. Dr James Barry: The Early Years Revealed. S Afr Med J 2008;98:52-58d.
3. 사라 버튼. 채계병 옮김.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자신을 바꾼 사람들. 공감; 2000.
4. Hurwitz B, Richardson R. Inspector General James Barry MD: Putting The Woman In Her Place. BMJ 1989;298:299-305.
5. Heilmann A. Neo-/Victorian Biographilia and James Miranda Barry. Switzerland: Palgrave Macmillan; 2018. p.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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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소아치과 전문의가 된 다음, 새로 공부를 시작해서 국내에서 의료인문학 박사를, 미국에서 의료윤리 석사를 취득했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의학에 관한 서사적 접근과 의료 정의론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한겨례>에 칼럼을 연재 중이며, 의료윤리 이슈를 소설, 영화 등으로 풀어낸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썼다. 현재 의학의 모습에 영향을 미친 문제적 개인들의 이야기를 살펴, 의료 현실을 바꿀 가능성을 찾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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