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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에게 보내는 철학 서신] 1-4 “조작적 관점에서” (1) 길이와 조작주의
오피니언 갑오징어 (2020-02-06)

일러두기

 

※ 네 번째 에세이는 브리지먼의 '조작주의'를 소개하고 관련된 주제에 대한 논평을 제시하는 부분으로, 분량이 길어 네 개로 나누어 업로드될 예정이다.

※ 이번 편은 조작주의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길이라는 측정 지표를 활용해 드러낸 브리지먼의 분석에 집중한다. 


※ 브리지먼의 논의는 다음 원전을 바탕으로 소개한다.
    P. W. Bridgman, The Logics of Modern Physics, Macmillan, 1958. (1927년판과 사실상 같다. 본문에서는 『논리』라고 지시하기로 한다.)

※ 브리지먼에 대한 두 명의 대표적인 ‘주석가’인 헴펠, 장하석의 독해에 대한 논의는 다음 저술을 사용했다. 
    카를 C. 헴펠, 곽강제 옮김, 『자연과학철학』, 서광사, 2010. (영어판: Philosophy of Natural Science, Prentice-Hall, 1966.) 
    장하석, 오철우 옮김, 『온도계의 철학』, 동아시아, 2013. (특히 3, 4장)


4.1 측정, 그리고 경험주의

측정할 수 없다면 실험도 없다. 실험을 통해 무언가를 확인하려면, 실험 대상의 초기 상태는 어떻고, 변화의 방향은 어떠하며, 변화의 결과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지를 비교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비교할 수 있는가? 단위가 무엇이든, 분야가 어디든, 무엇을 물었든, 신뢰도가 높든 낮든, 학자들이 비교하는 것, 비교해야 하는 것은 ‘미터’와 같은 측정의 결과값이다. 측정 가능성은 실험의 조건이고, 실험을 통해 세계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경험 과학의 조건이다.

이번 에세이는 바로 이 측정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물리학자 브리지먼(Percy Williams Bridgman, 1882-1961)이 제창한 과학철학적 입장, 즉 ‘조작주의’를 다룬다. 브리지먼의 논의는 근본적으로 물리학을 다루었지만, 경험 데이터를 다루는 광범위한 분야에 큰 충격을 준다. 특히 심리학과 사회과학에서 ‘조작적’ 개념, ‘조작적 정의’는 여전히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나는 이 글 말미에서 생물학의 중요한 개념에 대해 생각할 때도 여전히 그의 논의는 흥미로운 통찰을 준다는 점을 보이고자 한다.

브리지먼의 핵심 주장, 즉 측정과 결부되지 않은 과학적 개념들은 의미가 없다는 주장은, 앞서 살펴본 논리경험주의의 전개 과정과 대조할만하다. 논리경험주의자들은 분석 명제, 다시 말해 경험 과학의 결과와 무관하게 참이거나 거짓인 명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는, 이러한 분석 명제가 경험 과학이 다루는 종합 명제와 가진 관계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적어도 『논리』에서, 브리지먼은 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경험 가운데서도 일정한 방법과 양적 척도를 활용한 측정에 대한 논의에 집중하여, 과학의 개념 체계를 지극히 세부적인 측정 과정으로 쪼개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아주 거친 도식이지만, 브리지먼의 저술을 검토하면서 나는 논리경험주의와 브리지먼 사이의 관계를 18세기 철학사에서 유명한 흄과 칸트의 관계처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리경험주의자들에게 칸트의 영향이 깊다는 주장은 이미 확인한대로다. 한편 비록 브리지먼은 논리경험주의와 동시기에 활동하기는 했으나, 과학적 개념이 의미를 얻는 기초는 곧 측정이라는 주장은 모든 지식의 원천을 경험으로 보았던 흄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브리지먼이 약간의 혼동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이런 혼동은 오히려 브리지먼이 과학철학 전체에서도 급진적인 경험주의자로 손꼽을 만한 견해를 보여주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창조적인 오해를 불러온 원인으로 평가해야 할 것 같다.


4.2 브리지먼: 고압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4.2.1 고압 세계의 개척자


브리지먼이 일종의 급진적인 경험주의자라고 평가하는 이런 진술이 어떤 의미인지 더 상세하게 밝히려면, 브리지먼이 물리학에 실제로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먼저 논의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반 물리학의 변화에 대한 사변처럼 보이는 그의 저술이, 그의 연구 역정에서 나온 통찰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논의는 그의 노벨상 수상 이유에 대한 위원회의 진술에서 시작하면 적절해 보인다.

브리지먼 교수는 우연한 기회에 고압 분야에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1905년경, 브리지먼 교수는 고압에서의 광학현상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리로 만든 장치 일부가 실험 중에 폭발하는 바람에 핵심 부품이 파괴되어 부품의 교환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 사이에 브리지먼 교수는 가압 장치를 다른 용도로 바꾸어 쓰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압력실 밀폐 장치의 설계를 바꾸어서 사용했는데, 그 성능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 밀폐 장치는 압력이 증가하면 밀폐 효율도 증가해서 압력이 새는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 주 1
 

압력계 앞의 브리지먼

그림 1 압력계 앞의 브리지먼. 노벨상 위원회의 페이스북 페이지 게시물(2018/04/21)에서. 4월 21일은 브리지먼의 생일이다. https://www.facebook.com/nobelprize/ 

브리지먼의 문제는 이것이었다. 기존의 압력계가 모두 폭발해버리는 상황 속에서, 눈앞의 이 가압 장치가 초고압을 달성했는지 확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기존의 방법과는 다른 물리적 방법을 통해 압력을 측정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 얻은 값이 정말로 기존의 방법이 나타내던 것과 동일한 그 값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이 글의 중후반에서 다시 확인하겠지만, 이 질문에 간단히 답할 방법은 없다. 연재 서두에서 도입했던 말을 사용하자면, 이 질문은 인식론적으로 이질적인 이들 측정 절차의 결과 값이 정말로 형이상학적으로 동등한 무언가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근거가 무엇이냐는 뜻이다. 

물론 고압 물리에 대한 브리지먼의 연구 경험만이 『논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책은 20세기 초반 물리학의 극적인 장면을 다수 담고 있다. 상대성 이론에 의해 모든 물리적 측정의 근본에 있는 시간과 공간의 규정이 변화한 것, 양자역학에 의해 미시 세계에 대한 이해가 완전하게 달라진 것이 대표적이다. 고압 물리의 개척자로서 마주했던 질문이, 물리학 전체에 걸쳐 제시되고 있는 것이 1927년 당시의 상황이었다고 말하면 될 것이다.

 

4.2.2 “조작적 관점에서(From the operational point of view)” 주 2 

『논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은 바로 “조작적 관점에서”이다.주 3 “조작적 관점”의 가장 큰 특징을 보여주는 진술은 바로 이것이다. “[물리학의] 개념이란, 그에 대응하는 일련의 조작 집합과 동의어이다(『논리』 5).” 다시 말해, 길이란 그것을 측정하는 여러 절차의 집합과 동의어이며, 시간 역시 그렇다. 그 측정 절차를 규정하기 위해 길이나 시간을 활용하는 물리학의 다른 많은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철학자들은 앞의 진술에서 ‘개념’과 ‘동의어’에 주목해서 『논리』를 읽었다. 『논리』를, 과학적 개념의 의미론에 대해 진술한 작업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앞선 에세이에서 여러 차례 살펴보았던 헴펠이 이런 독해를 내놓은 대표적인 학자이다. 하지만 이런 독해는, 브리지먼의 논의가 담고 있는 풍부한 함축을 드러내기 어렵다. 비록 쉽게 혼동할 수 있는 방식으로 쓰인 부분은 있으나, 『논리』는 의미론 이외에도 물리학의 토대에 있는 인식론적, 형이상학적 쟁점을 드러내는 책이다.


4.2.2.1 길이를 재다: 측정 속의 구심력과 원심력

브리지먼의 『논리』를 소개하는 통상적인 방식은 길이 개념에 대한 그의 분석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다. 물체의 길이보다 간단하고 명확한 측정 대상도 드문 이상, 이런 선택은 여기서도 반복할 만하다.

출발점은, 일상인들이 인간과 비슷한 크기의 사물을 재기 위해 일종의 자로 활용하는 막대이다. 딱딱한 물체, 예를 들어 구리로 된 막대를 길이 측정을 위해 사용하려 할 때, 사람들은 이 막대가 적어도 측정하려는 물체만큼은 그 길이 면에서 안정적이라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아주 많은 다른 믿음도 그 배경에 깔고 있다. 이 막대의 길이를 바꿀 수 있는 요인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막대의 온도, 중력으로 인한 막대의 휘어짐, 전자기력으로 인한 변형… 이들 요인이 무시할 만한 규모라는 믿음 없이, 우리는 결코 막대가 나타내는 값이 곧 측정하고자 하는 물체의 길이를 나타낸다는 점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논의는 정지한 물체에 대한 것일 따름이다. 상대성 이론은 방금 소개한 소박한 믿음을 무력화하는 손쉬운 방법을 하나 알려주었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물체는 빠르게 이동할수록 그 길이가 수축한다. 그런데 초고속으로 이동하는 물체의 길이를 정지한 물체와 비교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브리지먼의 예시는 코믹하지만 진지하다. 정지한 물체를 측정하기 위해 오차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조율해 놓은 자가 속도에 의해 변형되지 않도록 보존하면서 고속으로 주행하는 전차에 뛰어들어 탑승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처음부터 전차에 들고 탑승했던 자는 측정하려는 물체와 함께 가속을 받았으므로 수축해버렸을 것이고, 뛰어들기 위해 가속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자 역시 변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지한 물체와 고속 이동하는 물체의 길이를 측정하는 절차는 조금 다를 수 밖에 없고, 따라서 두 길이는 엄격하게 말해 서로 다른 조작 절차에 기반하는 값인 셈이다.

논의는 길이를 잴 물체의 규모를 따라 확대된다. 천체, 또는 천문학적 규모의 길이, 그리고 미시적 대상의 길이는 당연하게도 자로 잴 수 없다. 이들의 길이는 빛, 기하학, 역학의 몇 가지 법칙, 그리고 전자를 통해 측정한다. 인간적 규모의 세계를 조금만 벗어나도, 완전히 다른 종류의 측정 절차를 쓰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들 측정 대상 가운데 가장 작은 전자의 크기는 결국에는 추론을 통해 얻은 값이다. 물리학의 기초 개념인 길이조차도 서로 다른 여러 유형의 측정에, 또는 조작에 의존하고 있는 개념인 셈이다.

길이를 측정하는 행위는, 물리학의 변화나 길이 개념을 적용하는 범위의 확대로 인해 새로운 조작을 계속해서 필요로 한다. 브리지먼은 이렇게 측정 절차가 증식하는 현상을 두고 새로운 조작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고 표현한다. 과학적 개념을 곧바로 조작과 동일시하는 브리지먼의 조작적 관점을 받아들이는 한 이런 평가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평가는, (더 넓은 범위를 다루는 한편, 과거보다 더 정확한 법칙을 실험으로 입증해 냈다는 의미에서) 과학의 발전 속에서 일종의 원심력을 확인했다는 보고와 같다. 더 넓은 범위의 세계를 더 잘 해명하게 된 과학은, 예상치 못한 범위로 증식해 나가는 조작 절차, 그리고 그에 따라 더 많은 개념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길이 개념의 용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반대 방향의 힘, 즉 조작 절차의 증식을 억제해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길이를 재지는 못하게 만드는 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토록 많은 조작 절차가 모두 길이를 나타내고,주 4 과거의 (조작적) 개념을 적용할 수 없었던 폭넓은 현상에 적용된다고 할 수 있으려면, 공통의 구간에서 서로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절차, 즉 ‘이어붙이기’를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 길이, 광학적 길이, 전자 개념을 활용한 측정 모두는 공통의 규모에 대해서는 거의 같은 값을 산출해야만 한다. 이러한 절차를 여기서는 장하석을 따라 ‘비교동등성 확보 절차’주 5라고 부르기로 한다. 비교동등성 확보 절차는 일종의 구심력을 의도한 것이라고 볼 만하다. 과학적 개념의 일관된 확장을 위해서는, 좀 더 익숙한 조작 절차와 새롭게 도입되는 조작 절차가 서로 동떨어진 결과를 내놓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니 그렇다. 결국, 브리지먼은 길이 사례를 통해 과학적 개념과 조작 절차 사이에서 작용하는 두 방향의 힘을 읽은 셈이다. 말하자면, 과학적 개념과 조작 절차는 모두가 상대를 자신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논리』의 논평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말하자면 원심력에만 주목했다. 다시 말해, 브리지먼의 주장 가운데, 과학적 개념의 의미를 곧바로 그 개념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적 측정의 절차와 동일시하는 강한 주장에만 주목했다. 하지만 분명 그의 논의 속에는 과학적 개념이 가진 구심력에 대한 강조가 존재한다. 주 6  방금 논의했듯, 브리지먼의 논의는 아주 좁고 일상적인 범위에서 유효하던 길이 개념을 광대한 물리적 범위에 확장해 적용하는 방법을 다룬다. 그리고 이러한 확장은 원심력과 구심력을 모두 필요로 하는 과업이다. 다시 말해, 어떤 과학적 개념을 적용할 범위를 넓히는 원심력, 절차 사이의 ‘이어붙이기’가 실제로 경험 데이터를 통해 성립하는지 확인되어 이들 절차 사이에서 발생하는(또는 개념이 발휘하는) 구심력 없이 과학적 개념은 적절하게 확장되었다고 할 수 없다. 원심력과 구심력은 브리지먼의 논지를 정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같은 비중의 주목을 받아야만 한다.
 

____

주석

1. [물리학] 1946년 – 초고압력 생성 장비의 발명과 고압력 물리학 분야에서의 발견(퍼시 윌리엄스 브리지먼)  https://www.scienceall.com/%EB%AC%BC%EB%A6%AC%ED%95%99-1946%EB%85%84-%EC%B4%88%EA%B3%A0%EC%95%95%EB%A0%A5-%EC%83%9D%EC%84%B1-%EC%9E%A5%EB%B9%84%EC%9D%98-%EB%B0%9C%EB%AA%85%EA%B3%BC-%EA%B3%A0%EC%95%95%EB%A0%A5-%EB%AC%BC/ 

2. 나는 여기서 『논리』의 1, 2장에서 전개된 논의를 바탕으로 브리지먼의 논의를 간략히 요약하려 한다.

3. 콰인의 유명한 논문집 제목이 비슷한 문형인데, 콰인은 이 제목을 재즈 바에서 듣고 적은 것이라고 서론에서 밝히고 있다. 

4. 최근 철학계가 주목하는 하나의 사고 방식은 이것이 곧 자연종, 즉 인간의 마음과 독립적인 존재자라고 보는 사고방식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3부 전체를 들여 논의할 생각이므로, 여기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기로 한다. 

5. 『온도계의 철학』 2장. 

6. 장하석의 논의에서 도움을 받은 관점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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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우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
과학철학을 공부했다. 철학이 오늘날의 정교한 지적 분업 체계 속에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이 연재는 바로 이 고민에 대한 응답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다. 의학의 철학을 다룬 책 약간을 번역(공역)했고, 지금은 주로 교통과 철도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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