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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일 많은 대학원생의 피땀눈물] 왜 나는 안전할 수가 없어
Bio통신원(변서현)
(대학원생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생각보다 너무 많다. 그림 출처: http://blogs.nature.com/naturejobs/2018/03/21/be-mindful-of-your-safety-in-the-lab/)
#1. 두 시간짜리 실험 수업의 조교를 하고 온 지친 날의 늦은 밤, 연구실 선배와 그날의 당번이었던 설거지를 하다가 2리터 크기의 유리 눈금실린더를 싱크대에 떨궜다. 실린더가 박살 나면서 내 새끼손가락의 살을 찢어 놓았고, 선배의 도움으로 근처 응급실에 가서 7바늘을 꿰맸다. 약 한달 정도 장갑을 못 껴서 동물실험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2. 새벽 1시쯤, 몇 안 남은 연구실 사람들과 슬슬 퇴근을 하려고 일어나던 중에 이상한 화학물질이 타는 냄새를 맡았다. 무서웠지만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나섰고, 바로 아래층에 있는 오토클레이브에서 나는 냄새라는 걸 알았다. 오토클레이브에 충분히 들어있어야 하는 증류수가 하나도 없어서 멸균 중이던 플라스틱들이 과열되어 녹아버린 것이었다. 오토클레이브를 돌린 실험실의 사람을 찾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연구실에 몇 년 째 있다 보면 여러가지 안전사고를 경험하게 된다. 위의 사례들은 실제로 필자가 직접 경험한 것들이다. 특히 화학이나 생명 분야를 다루는 연구실에서는 꽤 자주 다치거나 대피하는 일이 생긴다. 다른 연구실에서 페놀을 엎어 우르르 뛰쳐나오기도 했고, UV등이 켜진 걸 모르고 후드 안에서 실험하다가 태닝한 것처럼 까맣게 타버린 동료의 팔도 보았다.
이렇게 다양한 안전사고의 상황 속에서 대학원생은 자신의 안전을 신뢰할 수 있을까. 필자는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안전에 대해 유달리 예민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의 안전을 누군가 보장해주고 있다는 그 어떤 정보도 받은 적이 없었다. 특히 산업재해보험 가입이 당연시 되는 연구원 또는 직원들과 달리, 대학원생들은 매 학기마다 4대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안전의 불확실성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대학원생의 안전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제도는 생각보다 잘 구성되어 있다. 연구실안전법에 따라, 대학 등 연구 주체의 장은 연구원과 대학원생 등 연구활동 종사자의 상해와 사망에 대비하여 종사자를 피보험자로 하는 보험에 가입하도록 하고 있다. (제14조)[1] 필자의 대학 또한 2008년부터 연구활동종사자 대상 상해보험에 가입해 두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2] 안전점검(제8조)와 정기 건강검진(제18조)도 실시하도록 법제화되어 있고, 실제로 대부분의 대학원생이 매년 경험하고 있다. 즉, 연구자의 안전을 위한 법이 존재하며, 제도로서 강제하는 의무는 어느정도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연구 환경은 안전할까? 그리고, 안전을 위해 감수해야 하는 여러 불편은 연구자들을 충분히 설득하는데 성공했을까? 2012년에 미국과 영국 등 여러 나라의 연구자를 대상으로 진행된 설문 연구에서, 연구 환경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과는 달리, 안전하지 않았다. 또한 안전 규정들과 연구자의 생활, 연구의 효율성 간에 나타나는 괴리들이 해결되고 있지 않음이 드러났다.[3] 특히 필자는 올해 연구실의 연구안전관리담당자 역할을 맡으면서 연구실이 실제로 안전한지, 그리고 담당자로서 하고 있는 여러 일들이 정말로 나의 안전에 도움을 주고 있는지 고민했다.
안전관리담당자 일을 하고, 주변의 대학원생들과 연구실의 안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많이 공감했던 것은 대학원생이 스스로 연구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각 연구실 별로 지정되어야 하는 연구실안전관리담당자의 대부분이 중간 연차의 대학원생이다. (연안법 제5조에 의거, 대학원생이 안전관리담당자로 지정될 수 있다.) 정기점검에서 점검자를 따라다니며 지적을 받는 사람도 학생이고, 그 지적들을 개선하기 위해 이것저것 안전장치들을 구입해 설치하는 사람도 학생이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에 있지만, 그만큼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스스로 보장하기 위한 노동을 추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필자의 대학에서는 개교 이후 처음으로 각 연구실의 시약전수조사를 진행했는데, 대학원생들이 수백 수천 종의 시약들을 모두 데이터베이스에 직접 입력해야만 했다. 안 그래도 밤늦게까지 실험과 연구에 치여 사는 대학원생들이 이 일을 하기에 작업량이 너무 많다는 항의가 여러 번 있었지만, 대학 안전팀에서는 ‘대학원생들 본인의 안전’을 위해 직접 진행하여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을 뿐이다. 연구실 안전의 총책임자인 대학은 안전의 확보를 위해 대학원생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불이익이 따른다.” 식의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고, 그 어떤 동기 부여도 볼 수 없었다. 결국 연구실의 안전을 위한 모든 개선책들은 대학원생의 불만이 가득한 가운데 진행되고, 대학원생들은 나의 안전과 피곤함 사이에서 타협할 수 밖에 없다. 이 타협은 결국 미래의 사고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런 사례와는 반대로, 긍정적인 변화를 확인한 사례도 없진 않다. 연구실의 안전과 직접적으로 관련한 사례는 아니지만, 필자의 대학에서 2017년 포항 지진 이후 보여주고 있는 여러 변화들이 그렇다. 대학이 직접 나서서 캠퍼스 곳곳에 대피소를 마련하고,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을 입간판을 세웠다. 사무실, 강의실, 연구실 별로 구분된 대처 요령을 유인물로 배포해서 매일 확인할 수 있게 했고, 학기마다 안전팀 주도로 지진대피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대학이 먼저 체계적으로 장치를 마련하고 구성원들이 쉽게 따를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성함으로써, 연구자들이 협조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학생과 노동자의 사이에서 어느 곳에도 끼지 못하고 헤매야 하는 대학원생은 연구 수행에서의 불안 뿐만 아니라 안전에서까지 불안한 상황에 놓여있다. 얼마나 먼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연구 안전을 관리할 수 있는 전담 인력을 확충하고 대학원생이 스스로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제도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연구자의 안전이 확보되고 연구자의 불안이 해소되었을 때, 더 좋은 연구를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1] 국가연구안전정보시스템 (2019-9-21),
https://www.labs.go.kr/modedg/contentsView.do?ucont_id=CTX000006&menu_nix=3SUK52A6#
[2] 포항공대 신문 (2008-3-26), 연구활동 종사자 상해보상보험 가입,
http://times.postech.ac.kr/news/articleView.html?idxno=3727
[3] Richard van Noorden, (2013-01-02), Safety surey reveals lab risks, Nature,
https://www.nature.com/news/safety-survey-reveals-lab-risks-1.1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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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으로 이미 출판된 지식이 아닌, 지식이 만들어지는 연구의 과정을 현장의 연구자이자 대학원생인 필자가 경험을 토대로 소개합니다. 연구실에서 있었던 일, 연구자들 간의 대화 등을 소재로 한국의 연구실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작은 의견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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