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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인물로 본 의학의 역사] 마거릿 생어, 피임의 권리를 위해 싸워 이긴 전사는 왜 우생학자라고 비난당했을까?
오피니언 글깎는의사 (2019-09-02 09:56)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 269조와 270조를 위헌 결정했습니다. 형법 269조는 자기낙태죄라고 하여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는 조항이고 형법 270조는 동의낙태죄로 의사가 임신한 여성의 동의를 얻어 낙태한 경우를 처벌하는 조항이지요.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었습니다. 자기결정권이란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성인이 국가 권력 간섭 없이 일정한 사적 사항을 직접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개인이 모든 사항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이를테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습니다.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선택 중 어느 쪽을 우선할 것인지를 놓고 두 진영은 임신중절에 대해 설전을 벌여왔습니다. 생명권을 우선하는 쪽은 임신중절이 태아의 생명을 앗아가므로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요. 반대쪽, 선택권 또는 자기결정권을 우선하는 쪽은 임신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며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관해선 그 주체가 온전히 선택권을 가진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태아는 언제부터 인간인가”, “배아(또는 인간이라고 인정되기 전 태아)도 생명권을 인정받는가”와 같은 문제가 대두하지요. 아무리 여성이 자기 몸에 대해 선택할 수 있을지라도, 타인, 즉 아기의 생명을 빼앗으면서까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태아의 발달 과정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선을 긋는 일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 논의는 파행을 거듭해 왔습니다. 예컨대, 임신 12주 이내의 태아가 인간인지 아닌지를 법이 판단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미국의 경우 공화당과 민주당 어느 쪽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관련 제도와 여건은 계속 변화해 왔지요. 현 트럼프 정권하에서 2019년 4월 앨라배마주 정부가 인간생명보호법(Human Life Protection Act)를 입안하여 임신중절을 금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한편, 이런 논의 과정에서 생명권과 자기결정권에서 벗어나 부부의 재생산권(reproductive rights)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재생산권이란 무엇일까요? 1994년 카이로에서 열린 인구‧개발 국제회의(International Conference on Population and Development)는 재생산권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모든 부부와 개인이 자녀 수와 그 시‧공간을 자유롭게 책임 있게 결정하며 그를 위한 정보와 방법, 최고 수준의 성‧재생산 건강을 누릴 권리를 지니는 것.”[1] 생명권 대 자기결정권 논의에서 태아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방해하는 존재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재생산권은 부모에게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릴 권리와 그에 필요한 정보, 방법을 요청하지요. 여기에서 태아란 숙고하는 부모의 열망이 탄생시키는 존재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논의일 뿐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어요. 당장 임신중절 하느냐 마느냐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책임 있는 결정과 재생산 건강의 권리가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이 생각은 임신중절 논의와 빼놓을 수 없으며 정책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지닙니다. 예컨대 사후피임약을 생각해볼까요. 생명권을 엄격히 주장하는 쪽에서 사후피임약을 허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반면,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쪽에서 사후피임약을 규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재생산권은 책임 있는 개인이 충분한 정보 아래에서 사후피임약을 사용할 것을 말하며, 그 사용에 관해 일찍부터 교육 등을 통해 알고 있을 것을 요청합니다.

이런 생각은 생각보다 오래되었어요. 지금부터 약 백 년 전, 미국의 간호사이자 사회운동가 마거릿 생어(Margaret Sanger, 1883~1966)는 “여성의 근본적인 자유는 어머니가 될 것인지, 몇 명의 아이를 가질 것인지 선택하는 데에 있다”라고 말하며 산아제한운동(Planned Parenthood)을 벌이고 여성에게 피임법을 보급하고자 했습니다.[2] 당시 피임을 설명하는 출판물도, 피임과 임신중절도 불법이었기에 생어는 몇 번이나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그의 운동은 여러 방향에서 결실을 보았고, 1960년 생어가 그레고리 굿윈 핀커스(Gregory Goodwin Pincus, 1903~1967)에게 의뢰하여 만든 경구용 피임약은 세계를 변화시켰어요.

 

1917년 시카고 기차역에 선 마거릿 생어

그림. 1917년 시카고 기차역에 선 마거릿 생어. 그는 간호사, 사회운동가, 뛰어난 선전가로 여성의 피임권 확보를 위해 싸웠다. 출처: Time

 

목표가 이뤄지는 것을 눈으로 보며 세상을 떠난 위대한 운동가 생어. 하지만 이후 여러 연구자는 생어를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우생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지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세계를 뒤흔들었던 과학 이론 우생학은 뛰어난 인간의 출생 장려와 열등한 인간의 출생 제한을 통해 인간종을 개량하려던 거대한 기획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를 유사 과학으로 분류하며 부정하지만, 그 면면은 여전히 우리 삶에 남아 있지요. 생어를 비판하는 측은 그가 본격적인 우생학자였으며 그의 산아제한 또한 종국적으로는 더 나은 인종을 위한 기획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반대편은 생어가 우생학의 개념을 활용했을지언정 그것은 재생산권을 위한 정치적 기획이었을 뿐, 우리가 생각하는 우생학과 생어의 생각에는 거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어느 쪽에 더 가중치를 줘야 할까요. 여러 글은 생어가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우생학에 발을 들인 것은 아쉽다 정도로 기술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가 우생학자였다고 말한다면, 생어의 기획이 빛을 잃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나치의 절멸을 정당화했던 우생학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생어의 삶을 간략히 짚어보고 그가 우생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는 정말 “우생학자”였는지 살펴보려 해요. 이 작업은 앞서 설명한 재생산권의 위치를 분명히 하는 역할도 할 겁니다. 탄생에 개입하는 일이 지닌 복잡한 결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예시이기 때문이죠.

 

피임 금지에 반기를 든 생어, 클리닉을 열다

생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살피는 일이 흥미로운 것은, 그가 ‘정직한’ 보고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자서전 『산아제한을 위한 나의 투쟁(My Fight for Birth Control)』과 『자서전(Autobiography)』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실관계를 바꾼 부분이 여럿 있습니다.[3]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생어는 목적 달성을 위해 적과 손을 잡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당시 불법이었던 피임 시술을 합법화하기 위해, 의사(당시 주로 남성)만이 피임 시술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모두 양도했습니다.[4] 아직 불법이었던 시기, 피임 시술은 여성의 영역이곤 했어요. 이를테면 20세기 초 미국의 의학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드라마 <더 닉(The Knick)>을 보면 수녀가 피임과 임신중절을 돕는 모습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성 산파와 산모에게만 허용되어 금남(禁男)의 자리였던 출산이 의학의 영역이 되면서 남성이 이를 주도하게 되었던 것처럼, 피임 시술도 같은 길을 가게 되었던 것이죠.

소개하는 장면이 이런 생어의 정치적 면모를 잘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를 다루는 책은 뉴욕 브루클린에 있었던 클리닉에서 체포당하는 순간으로 시작하곤 합니다.[5] 신문과 잡지 발간으로 여성에게 피임에 관한 정보를 보급하던 생어는 1916년 산아제한 클리닉을 열었지요. 피임에 관한 정보를 담은 전단을 나눠주고, 방문한 여성에게 피임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모두가 불법이었어요. 클리닉은 대성황이었고 근처에서 몰려온 여성으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며칠 뒤, 뉴욕시 경찰이 들이닥쳤고 생어는 구치소에 갇혔어요. 보석금으로 풀려난 생어는 바로 클리닉을 열었고 경찰이 다시 들이닥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소요는 대중의 눈을 끌었고, 그것이 생어가 겨냥했던 것이었어요. 피임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만든 그는 재판을 통해 원하는 바를 성취합니다. 1918년 산아제한 클리닉에 대한 판결에서 뉴욕 항소법원 판사 프레데릭 크레인(Frederick E. Crane, 1869~1947)은 질병의 예방이나 치료를 위한 경우라면 의사가 피임기구 등을 처방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판시하게 됩니다. 생어는 의사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한 달 동안 형을 살게 되었지만요.

 

1916년 브라운스빌에 만든 산아제한 클리닉에서 뉴욕 경찰에게 체포당하는 생어

그림. 1916년 브라운스빌에 만든 산아제한 클리닉에서 뉴욕 경찰에게 체포당하는 생어.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1873년 입법된 컴스탁 법(Comstock Laws)은 피임과 산아제한에 관한 공적 담론을 금지해 왔습니다. 이 법은 미국 정치인 앤서니 컴스탁(Anthony Comstock, 1844~1915)의 이름을 딴 것으로, 그는 사회의 도덕성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요. 그 결과 중 하나가 컴스탁 법이었는데, 이 법은 미국 우정공사(USPS)가 음란, 피임기구와 약, 성기구 등 성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우편물을 전달하면 범죄로 규정했어요. 법은 점차 다른 운송 수단이나 개인이 해당 내용의 출판물을 판매, 대여, 전달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법을 여러 집단이 반대했지만, 그중 가장 주목할만한 운동을 벌였던 것이 생어였어요.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이었던 생어는 어머니가 거듭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다가 일찍 세상을 뜬 것을 보았습니다. 또, 주변 여성들이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음을 알았죠. 생어는 책과 강연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의 경험을 예로 들며 피임법 보급의 중요성을 역설하곤 했어요. 색스 부인의 사례가 대표적이죠.[3] 1912년 여름 응급 전화를 받고 달려간 생어는 색스 부인이 자가 임신중절을 하려고 먹은 독극물 때문에 빈사 상태에 있음을 발견합니다. 다행히 목숨을 구한 색스 부인은 의사에게 한 번 더 임신하면 죽게 되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방종하지 말라며 남편과 각방을 쓰라고 조언할 뿐이었죠. 몇 달 뒤, 다시 임신한 색스 부인은 사망하고 맙니다.

20세기 초, 당시 부유층은 몰래 임신중절을 하고 있었어요. 이전 우리나라처럼 낙태죄가 있는 상황에서 음성의 낙태 클리닉이 운영되었고 의사들은 비싼 돈을 받고 낙태 시술을 해주곤 했지요. 생어는 저소득층과 노동자가 임신중절에 접근할 수 없는 현실에 분노했습니다. 유럽에 갈 기회가 생긴 그는 현지에서 이뤄지고 있는 산아제한 방법을 배웠어요. 1914년 미국으로 돌아오자, 생어는 『여성 반란(The Woman Rebel)』이라는 신문을 발간하여 여성이 임신이라는 생물학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죠. 전면으로 컴스탁 법에 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1916년 산아제한 클리닉 개설과 폐지, 1923년 산아제한 연맹 개설, 산아제한 클리닉 재개설, 여성용 피임기구 밀수, 1929년 산아제한입법 국가위원회 조직 등 생어의 운동은 계속됩니다. 1932년 일본에서 선적한 피임기구가 불법 기구로 세관에 걸리자, 생어는 소송을 제기하지요. 상고법원이 의사가 피임기구를 요청하여 선적한 경우 환자의 복지를 위해 이를 막을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70년 동안 자리를 지켜 온 컴스탁 법은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그 약”의 개발로 세상이 뒤바뀌다

생어는 여성이 아기를 가질지 결정할 수 있기를, 그리고 태어난 아이에게 세상이 더 안전한 곳이 되길 바랐습니다. 즉, 서두에 말씀드린 재생산권의 초기 형태를 주장했던 것이죠. 이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조력을 얻었던 집단이 우생학자와 인구조절론자들이었어요. 인구조절론은 기하급수적인 인구 성장이 산술급수적인 식량 생산을 초과하므로 자연적으로 빈곤이 발생한다는 영국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의 인구 이론에 기대고 있었죠. 이들은 산아제한을 통해 빈곤층의 수를 감소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생어는 재생산권을 얻기 위한 투쟁에서 이들과 손을 잡습니다.

우생학과 마찬가지로 인구조절론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비인간적인 이론으로 여겨지고 있어요.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은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 가난에 머물게 만드니, 이들에게 지원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는 국제원조에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되어 저개발국을 지원해선 안 된다는 논리로 활용됩니다. 게다가 인구를 줄이기 위해서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재생산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요. 하지만 생어는 방법으로서 ‘산아제한’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당시의 유력인사들(우생학자와 인구조절론자는 당시 선진 과학으로 여겨졌습니다)과 함께하며 힘을 기른 생어는 1950년 핀커스에게 피임약 개발을 의뢰하게 되지요. 핀커스는 1930년대 토끼의 체외 수정(시험관 아기에서 말하는 실험실에서의 수정을 의미합니다)을 연구했던 시대를 앞선 생물학자였으며, 포유류 번식을 전문분야로 삼고 있었어요.[6]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의 실험에서 메리 셸리(Mary Wollstonecraft Shelley, 1797~1851)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리고는 핀커스를 괴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핀커스에게 생어가 부탁합니다. 저렴하며, 사용하기 쉽고, 절대 실패하지 않는 피임약을 개발해달라고. 핀커스는 여성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여성의 생식 주기를 조절하는 호르몬 중 하나) 주입이 토끼에서 배란을 막았음을 보인 연구가 이미 1937년에 수행되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에게도 같은 실험을 해볼 법했지만, 당시엔 피임약 개발에 대한 필요가 없었죠. 핀커스는 프로게스테론을 경구 투여 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만 하면 될 거로 생각했어요. 이미 자연은 피임의 방법을 마련해 놓고 있다고 믿으며.

 

최초의 경구 투여 피임약 이노비드

그림. 최초의 경구 투여 피임약 이노비드. 약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 가격은 10불로, 현재 가치로는 거의 10만 원에 가까운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이 약을 처방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그 약”은 여성이 교육과 노동으로 진출하는 길을 확보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그는 저렴하면서도 확실한 투약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합성 프로게스테론을 찾고, 다양한 종류를 실험하여 경구 투여에 적절한 형태로 만들어냈죠. 운도 뒤따랐어요. 그가 선택한 노르에티노드렐(norethynodrel)에는 우연히 합성 에스트로젠인 메스트라놀(mestranol)이 섞여 있었고, 오염된 약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옴을 알게 됐지요. 결국, 노르에티노드렐에 메스트라놀을 적정 비율로 더한 이노비드(Enovid)가 탄생했어요. 이노비드는 미국 식품의약처(FDA) 승인을 받는데도 어려움을 겪지만(그래서 1957년에는 월경 관련 증상 치료제로 우선 출시됩니다) 결국 1960년 시장에 등장합니다.

1960년 당시 미국의 출산율은 여성당 3.65명이었어요. 출산율이 높다 낮다 말하는 데에는 정치·경제적 고려가 들어가지만, 지금 기준으로 볼 때(현재 미국 출산율은 여성당 1.80명입니다) 상당히 높은 편이었죠. 많은 여성이 이노비드를 원했고, 첫해에 가격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40만 명의 여성이 처방을 받았습니다.[7] 1963년 가격이 내려가면서, 처방받는 여성의 수는 230만 명으로 증가하지요. 우리나라에선 그렇게까지 대중화되지 않았기에 적절한 명칭이 없지만, 미국에선 굳이 다른 수식 없이 “그 약(The Pill)”이라고 부르는 이노비드 덕분에 세상은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컴스탁 법 철폐, 피임약 개발과 같은 엄청난 업적을 남긴 생어는 1965년 미국 대법원이 피임약과 방법의 사용을 막는 법이 사생활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해석한 그리스월드 대 코네티컷(Griswold v. Connecticut) 판결까지 목격하게 됩니다. 1966년 사망한 그는 당당한 승리자였어요. 그런데, 이후에 생어에게 혐의를 두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가 우생학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것이죠. [8]

 

우생학에서 생어 구출하기는 성공할까

다시 1920년대로 돌아가 볼까요. 당시 우생학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하나의 분류로 묶어내긴 어려워요. “우생학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이들이 하던 생각이 다양했기 때문이죠. 물론 우생학이 ‘적합한’ 이들의 출생을 권장하고(긍정적 우생학) ‘부적합한’ 이들의 출생을 막는(부정적 우생학)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는 탓도 있지만, 우리가 현재 과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그렇듯 사람들은 우생학의 내용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누군가는 우생학이 탁월한 능력을 갖춘 집단의 출생을 장려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고, 누군가는 가난한 자와 도덕적이지 못한 자의 출생을 막는 학문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누군가는 정신질환자나 장애인과 같이 생물학적 문제를 유전시킬 수 있는 자에게 불임 시술을 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지요.

이후 미시시피 충수절제술(6, 70년대 미국 남부에서 수천 명의 흑인 여성 맹장염 환자에게 맹장 절제를 한다고 하면서 자궁 절제를 같이 시행한 일)이나 벅 대 벨 판결(Buck v Bell, 미국 대법원이 지적장애를 포함한 ‘부적합자’에게 강제 불임시술을 시행하는 것을 허용한 판결로, 명판사로 유명한 올리버 웬델 홈스가 결정문을 써 그의 흑역사로 남았다) 등이 사람들에게 회자하기 시작합니다. 국가가 개입하여 사람들을 불임시술한 것은 독일 나치 제국에서나 벌어지는 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 동네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죠. 사람들은 말 그대로 경악하여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비난하기 시작했어요. 불임시술 대상이 장애인과 가난한 흑인이었기에, 사람들은 우생학이 동시에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캐리 벅은 지적장애가 있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양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림. 캐리 벅은 지적장애가 있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양부모 밑에서 자랐다. 벅이 임신하자 양부모는 그 또한 지적장애가 있어 제대로 된 처신을 하지 못해 생긴 일이라고 여겨 (사실은 양부모의 친척이 그를 강간한 것이다) 벅에게 불임시술을 해달라고 주 정부에 청원했다. 우생학을 지지하던 앨버트 프리디(Albert S. Priddy)는 법원에서 확실한 불임시술 명령을 받길 원했고, 벅과 비슷한 사례들을 모아 재판을 진행했다. 벅의 불임시술을 다룬 벅 대 벨 재판에서 대법원이 주가 강제 불임시술을 할 수 있음을 결정했고, 미국에서 장애인에게 강제 불임시술을 하는 근거가 되었다. 출처: Encyclopedia Virginia

 

생어는 “적합한 이들로부터 더 많은 아이를, 부적합한 자들로부터 더 적은 아이를—이것이 산아제한의 핵심 이유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저술에서 우생학을 옹호했다는 공격을 받게 됩니다.[9] 실제로는 생어가 이런 말을 남긴 것이 아니라, 글을 발표했던 학술지에 연달아 실려 있던 사설에 실린 표현이라고 해요. 게다가, 그가 우생학자 집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생어는 강제적 방법으로 출생을 조절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일한 흠결이 있다면, 지적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강제 불임시술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던 부분일 거예요. 이 부분은 우생학의 문제에 포함되지요.[10] 생어는 지적장애인이 자발적으로 산아제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가 ‘적합자’의 출산을 장려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여성이 출산을 결정할 수 있기를 바랐을 뿐, 더 많이 낳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생어의 관심은 여성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스스로 임신에 관해 결정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것은 저소득층과 노동자 계층 여성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었지요. 그들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원치 않은 임신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생어에게 출산 문제를 묻다

생어의 삶은 미국 산아제한, 더 크게는 임신과 관련한 여성의 결정권이 확대되어 가는 역사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가 전력투구한 끝에 누구나 피임에 관해 묻고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피임약의 개발은 여성이 남성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피임약 개발 이후 미국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급상승했습니다.[11] 생어의 성공은 그의 전략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산아제한 클리닉의 개설, 피임기구 수입, 피임시술 합법화 등의 과정에서 생어는 작은 것을 내어주어 중요한 것을 취하며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지요. 인구조절론, 우생학과의 협력도 이런 이대도강(李代桃僵)의 하나로 바라보면 되는 일일까요.

물론 말씀드린 것처럼 생어가 본격 우생학자 또는 인종차별론자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잘못일 거예요. 그가 가졌던 생각이 일부분 우생학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생어를 비난하는 쪽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려울 것 같아요. 하지만 생어가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생어의 삶을 보면서, 그리고 이후에 일어났던 논쟁을 보면서 결국 문제가 되는 부분은 ‘강제성’임을 배웁니다. 누구도, 어떠한 입장과 지위도, 사람의 출생을 좌우해선 안 됩니다. 필요하다면 정보와 방법을 제공해야 할 것이며, 자신을 위해 어떤 선택을 내리는 것이 좋은지 충분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사회는 아이가 태어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제도와 문화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선택은 오로지 부모의 것이어야 합니다. 이토록 찬란한 업적을 남긴 생어의 삶을 흐리고 있는 것은 결국 그가 ‘비적격자’ 일부의 임신을 강제로 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장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낙태죄 위헌 결정에서 시작했습니다. 관련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지고 계실 겁니다. 저도 어느 방향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단, 이후 제도가 어떻게 결정되든 간에, 그 결정은 부부가 충분히 숙고하여 아이를 가지는 결정을 하고,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어야 할 거예요. 더는 국가나 사회가 출산에 강제로 개입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습니다. 굳이 하나 더 덧붙이자면, 모두 아시는 것처럼 2019년 현재 한국의 출산율은 역대 최저이자 세계 최저를 기록하고 있지요. 임신중절을 막는 것이 결코 출산율을 높이는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고, 그것이 부모와 자녀에게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나쁜 세상을 주고 싶은 부모는 없을 테니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태어난 아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백 년 전, 생어가 말했던 것처럼요. “나는 아기들에게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를 원합니다.”[12]

 

참고문헌

1. Programme of action of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n Population and Development, Cairo, 1994. New York (NY): United Nations; 1995.
2. Sanger M. Woman and the New Race. New York (NY): Brentanos Publishers; 1992.
3. Wardell D. Margaret Sanger: Birth control’s successful Revolutionary. Am J Public Health. 1980;70(7):736-742.
4. 바버라 에런라이크. 조영, 옮김. 건강의 배신. 서울: 부키; 2019.
5. Cox V. Margaret Sanger: Rebel for women’s rights. Philadelphia (PA): Chelsea House Publishers; 2005.
6. Eig J. The Birth of the Pill: How Four Crusaders Reinvented Sex and Launched a Revolution. New York (NY): W. W. Norton & Company; 2014.
7. Gibson M. One Factor That Kept the Women of 1960 Away From Birth Control Pills: Cost. Time [Internet]. Jun 23, 2015 [cited at Aug 28, 2019]. Retrieved from: https://time.com/3929971/enovid-the-pill/.
8. Valenza C. Was Margaret Sanger a Racist? Fam Plann Perspect. 1985;17(1):44-46.
9. Sanger A. Eugenics, Race, and Margaret Sanger Revisited: Reproductive Freedom for All? Hypatia. 2007;22(2):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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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Sanger M. Margaret Sanger: An Autobiography. New York (NY): W. W. Norton;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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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교육연구센터)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소아치과 전문의가 된 다음, 새로 공부를 시작해서 국내에서 의료인문학 박사를, 미국에서 의료윤리 석사를 취득했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의학에 관한 서사적 접근과 의료 정의론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한겨례>에 칼럼을 연재 중이며, 의료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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