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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생명과학 이야기] 자연사박물관이 살아있다!
Bio통신원(곽민준)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에는 살아 움직이는 공룡 전시물 ‘렉시’가 등장한다. 렉시는 밤이 되어 살아난 직후 주인공 래리를 무섭게 쫓아가며 극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 뻔했으나, 쫓아간 이유가 사실은 주인공과 놀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에는 그 이미지가 완전히 바뀌어, 래리는 물론 관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의 귀여운 마스코트가 됐다.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세계 각지 자연사박물관의 마스코트는 전시관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공룡이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빠져봤을 공룡은 모든 자연사박물관의 최고 히트 상품이자 얼굴마담이다. 그래서 대부분 자연사박물관은 공룡을 전면에 세워 박물관을 홍보하고 관객을 유치한다. 그러나 지난달 방문했던 런던의 영국 자연사박물관은 달랐다. 놀랍게도 박물관 중앙에는 예상했던 거대한 공룡이 아닌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 대왕고래의 화석이 전시되어 있었다.
영국 자연사박물관의 주인공이 처음부터 고래였던 것은 아니다. 지금 대왕고래가 위치한 박물관의 중심 힌치 홀(Hintze Hall)에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디피(Dippy)’라 불리던 공룡 디플로도쿠스의 화석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디피는 무려 100년 넘게 영국 자연사박물관을 지켜온 박물관의 마스코트이자 상징이었다. 디피를 대왕고래 화석으로 교체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에서는 SNS를 통해 ‘savedippy’라는 반대 운동이 펼쳐졌을 정도로 일개 화석 복제품치고는 엄청난 인기와 팬을 보유하고 있기까지 했다. 그랬던 디피를 도대체 왜 영국 자연사박물관은 대왕고래 화석으로 교체한 것일까?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숨겨져 있다. 먼저 4년 전 인터뷰에서 마이클 딕슨 박물관장은 복제품인 디피를 진품 고래 화석으로 교체하는 것은 10여 년에 거쳐 진행되고 있는 진품 화석 전시 위주로의 박물관 개보수를 위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1). 무려 8000만여 개의 표본을 보관 중인 세계 최고의 자연사 수집기관이기도 한만큼 굳이 박물관의 간판이 복제품, 그것도 세계에 여럿 있는 가짜 화석일 필요는 없다고 느낀 듯하다2). 더불어 지난달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 직접 만난 영국 자연사박물관 척추동물 분야 수석 큐레이터 리처드 사빈의 말에 따르면, 힌치 홀에 공룡이 아닌 대왕고래를 설치하면 방문객들이 다른 전시를 조금 더 구경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그는 자연사박물관 방문객 대부분의 첫 목표는 디피와의 셀카였다고 했다. 그리고 셀카의 대상이 바닥에 서 있는 공룡에서 천장에 매달린 고래로 바뀌면서 관람객들은 사진찍기 더 좋은 위치를 찾아 다윈이 앉아있는 힌치 홀의 계단을 오르고, 2층 전시관을 구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대왕고래의 전시가 자연사박물관에 방문은 했지만 정작 자연사에는 큰 관심 없는 방문객들이 더 많은 전시를 관람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도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영국 자연사박물관의 새 얼굴 Hope Blue whale을 뒤에서 찍은 사진.
사진 속 계단을 올라 2층에 가야 고래가 잘 보이는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이런 설명들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공룡을 보기 위해, 그리고 디피를 만나기 위해 박물관에 방문하는 수많은 이들을 외면한 채 대왕고래를 선택한 박물관의 결정이 사실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디피에 이어 박물관의 주인이 된 대왕고래의 이름과 그 의미를 듣고 나서는 그들의 결정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왕고래의 이름은 Hope, 희망이다. 영국 자연사박물관은 이 이름이 ‘지속 가능한 미래를 그리는 인류의 힘(symbol of humanity's power to shape a sustainable future)’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3). 흰긴수염고래, 흰수염고래라고도 불리는 대왕고래는 무분별한 고래사냥으로 인해 20세기 중반 멸종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다행히 1966년 국제 협약을 통해 포경이 금지되며 대왕고래는 멸종이라는 최악의 사태는 피하게 됐다. 이는 인류가 동물의 멸절을 막고 보호하기 위해 협약을 체결한 첫 사례로 꼽힌다. 영국 자연사박물관은 인간의 간섭으로 멸종위기에 처했으나 다시 인간의 노력으로 그 위협에서 벗어나고 있는 대왕고래를 박물관의 얼굴로 택함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인간과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디피 대신 호프를 선택한 영국 자연사박물관의 결정이 객관적으로 확실하게 좋은 선택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매우 훌륭한 결정이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과학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다양하다. 기술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을 건강히 오래 살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의 진짜 힘은 수많은 선택과 결정의 순간을 마주하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의미 있는 삶을 효과적으로 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에게 삶을 살아가는 지혜와 교훈을 선물해주는 것이야말로 과학의 진짜 가치라는 뜻이다. 영국 자연사박물관에는 수많은 전시물과 과학적 정보가 있다. 열 시간 넘게 관람한 필자도 전시물을 모두 보지 못하고 떠나야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그곳을 방문한 방문객 중 그 많은 정보를 모두 얻어가는 이는 없다. 대부분은 기껏해야 하나 혹은 둘 정도의 지식이나 이미지만을 머릿속에 담은 채 박물관을 나서는 게 전부다. 그리고 이전까지 그 이미지는 대부분 거대한 공룡 디피였다. 이제는 더 거대한 고래 호프이고 말이다. 아마 대부분 방문객은 호프를 보며 ‘우와 크다!’ 정도의 생각밖에 안 할 것이다. 하지만 그중 일부라도, 아니 하루에 열 명이라도 그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알고, 지난 백 년간 대왕고래를 둘러싸고 벌어진 인류 사회의 사건들을 배우고 ‘공존하는 자연’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넣은 채 박물관 문을 나선다면 자연사박물관은 ‘과학과 사회가 만나는 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다 한 것으로 생각한다.
과학은 인류에게 삶을 살아가는 지혜와 교훈을 선물해준다고 말했다. 필자는 이것이 우리가 과학을 배우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사실을 토대로 더 안락한 삶을 살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인간 사회와 닮아있는 자연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고 배우며 진보하기 위해, 즉 과학적 지식으로 얻은 지혜를 통해 조금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과학을 배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과 공존하자는 메시지를 담고서 매년 수백만 명을 만나는 영국 자연사박물관 호프의 등장이 매우 반갑다. 그리고 호프에 매우 감사하다. 많은 과학자가 하고자 하는 일이지만 쉽게 하지 못 하는 일, 과학이 사회를 바꾸는 일을 대신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호프만큼 많은 대중을 만나지는 못한다. 그래도 과학을 조금 잘 아는 이라면, 혹시 과학을 직접 하는 프로 과학자라면 주변 사람 열댓 명 정도에 과학적 지식을 통해 배운 교훈을 알려주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살아있는 우리가 죽어있는 고래 화석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많은 생명과학인들이 주변인들과 일상 속 생명과학 이야기와 그 교훈을 나누기를, 그리고 이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본다.
[참조]
1) http://www.knn.co.kr/47407
2) 디피의 실제 화석은 미국 카네기 자연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 화석의 복제품은 영국 자연사박물관 외에도 여러 곳에 많이 있다.
3) https://www.nhm.ac.uk/discover/news/2017/july/museum-unveils-hope-the-blue- whale-skeleto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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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통해 나의 지식과 생각을 표현하는 게 즐거운 평범한 생명과학도입니다. "일상 속 생명과학 이야기" 를 통해 일상생활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 생물학적 물음에 대한 답과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생활의 지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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