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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일 많은 대학원생의 피땀눈물] 연구실에서 나의 손은
Bio통신원(변서현)
(유리 플라스크와 시험관만 가득한 이런 실험실은 이제 없을 것이다. 출처: Pinterest)
몇 달 전이었던가, 연구실을 경험하고 전업 작가가 된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새로 쓰는 글이 있는데, 주인공은 생물학자야. 근데, 실험을 할 수 있는 장비는 하나도 없어.”
‘아니 이게 무슨 끔찍한 소리야,’ 나는 기겁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제발 파이펫 하나라도 손에 쥐어주면 안될까……”
농담처럼 한 이야기였지만, 실제로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는 사람들에게 장비는 자신의 손보다 훨씬 더 정교한 손이 되어주는 소중한 존재다. 장비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생명과학 연구자에게 장비를 하나도 주지 않았다니, 이렇게 잔인한 설정이 또 있을까.
각 분야의 연구실에는 분야별로 특화된 다양한 장비가 존재한다. 친구를 만나러 다른 연구실에 잠깐 들어갔을 때에는 우리 연구실에 없는 신기한 장비들이 보여 눈이 휘둥그레진 적이 많다. 면역학 연구자인 필자는 특히 같은 마우스 실험을 하는 신경과학 연구실의 장비들이 신기하다. 쥐를 관찰하는 완전히 다른 관점의 장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장비들은 연구실 투어를 온 손님들에게 교수님이 가장 열정을 가지고 소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연구실이 구비하고 있는 여러 기계들은 연구실이 수행할 수 있는 실험의 범위와 직결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해진다. 심지어는 필요한 장비가 없으면 직접 개발하기도 한다. 머리 속에 있는 가설을 증명 해내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장비를 찾아 헤매고, 가지고 있는 장비를 어떻게 써먹을지 고민하는 것도 연구자의 수많은 고민들 중 하나일 것이다.
최근 필자의 연구실은 장비와 관련해 홍역을 겪었다. 우리 연구실이 소속되어 있던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연구단 사업이 종료되면서, 연구단의 자산으로 등록되어 있던 수많은 장비들이 회수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 장비들의 목록에는 -80℃ 냉장고 여러 대, 생물안전캐비닛, 그리고 멀티채널 파이펫 같은 소위 ‘기본템’부터 무산소 배양 장비와 무균 마우스 사육 장치 같은 특수 장비까지 모두 있었다. 생명과학 연구실에서 없어서는 안될 기본적인 것들이 회수 예정 목록에 모두 있었다. 이 목록이 실제로 집행되었다면 필자의 연구실은 새로운 연구비를 구해 장비를 구축할 때까지, 기약 없는 시간 동안 그 어떤 실험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치 일상생활을 해야 하는데 손이 잘려나간 느낌이었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혼란스러웠던 상황은 좋은 방향으로 일단락된 것처럼 보인다. 여러 규정과 책임자 간 논의와는 별개로, 과학을 하고싶어 실험실에 있는 대학원생들이 그 상황들을 지켜보기에는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무것도 없고, 미래를 확신할 수조차 없어 참담한 심정이었다.
이런 경험들을 뒤로 하고, 학회에서 외국 연구자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결국 연구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로 ‘장비의 안정성’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속한 연구실의 연구비 사정과는 관계없이, 적어도 장비만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장비를 구축하기 위한 자본과 소유권, 관리비용, 사용 권한 등 복잡한 권리들이 서로 얽혀 있는 상황에서, 연구자가 장비를 자유롭게 사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장비의 구축과 유지에 대해 한국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있는 제도는 신규 임용된 책임연구자를 위한 ‘스타트업 펀드(Startup Fund)’[1]와 고가의 장비를 연구소 단위에서 관리하는 ‘핵심연구시설(Core Facility)'[2]제도 등이 있다. 특히 핵심연구시설 제도는 연구실 별로 구비하기 어려운 장비를 대학 또는 연구소 단위로 구입하고, 장비를 관리할 전문가를 고용해 연구자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장비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이 제도를 통해 연구실은 큰 비용을 지출하지 않아도 되고, 상주하는 관리자가 장비를 유지하니 수리 비용도 감소할 수 있다. 점점 더 비싸고 어려운 장비를 사용하기를 요구하는 현대 과학의 특성 상, 다수의 연구 분야에서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장비들은 연구실보다 큰 단위에서 구축 •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이득일 것이다. 한국은 최근에 와서야 유사한 분야의 장비를 한 곳에 모으는 정도의 핵심연구시설 제도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3] 이미 외국에서는 유전자 변형 생물체의 제작이나 다양한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을 전문 업체 대신 맡아 진행하는 등 장비의 유지를 넘어 필요한 핵심 기술을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시설이 구축되어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4]
얼마전 필자가 상주하는 건물에 극저온전자현미경(cryo-EM)이 새로 들어왔다. 한국에서는 단 두 대 밖에 없는 장비라고 한다. 유명 저널들의 논문에서 이미 cryo-EM을 사용해 다양한 발견을 새로 해내고 있는 걸 보았었다. 필요한 장비가 필요한 위치, 필요한 순간에 존재하지 않으면 연구를 할 수 없다. 반면 새로운 장비의 등장은 새로운 연구 결과를 세상에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내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고 내 손이 백 람다[5]의 증류수를 따내지 못하는 한, 우리의 연구는 항상 셀 수 없이 다양한 장비와 함께한다. 이 기회를 빌어 상상도 못할 장비를 만들어준 세계의 공대생들에게 찬사를 빌어본다.
<참고 문헌>
[1] Elie Dolgin. (2018-07-09), How to start a lab when funds are tight, Nature.
https://www.nature.com/articles/d41586-018-05655-3
[2] Julie Gould. (2015-03-26), Core facilities: Shared support, Nature.
https://www.nature.com/nature/journal/v519/n7544/full/nj7544-495a.html
[3]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보도자료, (2018-06-08), ‘과기정통부, 연구장비 공동활용 촉진 나선다. -「핵심연구지원시설 조성 프로젝트(core 사업)」시범 추진-‘.
https://www.msit.go.kr/web/msipContents/contentsView.do?cateId=mssw311&artId=1384496
[4] Harvard Medical School Core Facilities.
https://corefacilities.hms.harvard.edu/
[5] ‘마이크로리터(μL)를 의미하는 생명과학 분야의 은어. 그리스어 λ에서 왔으나, 그 유래는 불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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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으로 이미 출판된 지식이 아닌, 지식이 만들어지는 연구의 과정을 현장의 연구자이자 대학원생인 필자가 경험을 토대로 소개합니다. 연구실에서 있었던 일, 연구자들 간의 대화 등을 소재로 한국의 연구실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작은 의견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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