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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인물로 본 의학의 역사] 테라노스가 건드린 잘못된 믿음, 『손쉬운 검사 한 번이면 우리는 건강해질 수 있다』
Bio통신원(글깎는의사)
2015년 미국 최고의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으로 평가받는 스타트업)으로 시장 가치 약 90억 달러로 평가받던 테라노스(Theranos). 이 회사가 주목을 받고 투자금을 끌어모으는 데엔 스탠퍼드대학교를 중퇴하고 발명을 통해 자수성가한 것으로 알려진 최고경영자(CEO) 엘리자베스 홈스(Elizabeth Holmes)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피 한 방울로 수백 가지 질병을 검사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든다고 호언장담했고, 애플 스티브 잡스(Steve Jobs)를 흉내 낸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 상대방을 바라볼 때 절대 깜빡이지 않는 눈, 중성적인 목소리로 투자자를 사로잡았어요. 그러나, 『월스트리트저널』 탐사보도 전문 저널리스트 존 캐리루(John Carreyrou)가 2015년 10월 15일 특종을 터트리지요. 테라노스가 진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질병 중 실제로 그들이 개발한 기계 ‘에디슨(Edison)’이 진단할 수 있는 것은 네 가지뿐이었고, 나머지는 기존 검사기를 통해 결과를 확인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그 결과도 미심쩍다는 것이었어요.
테라노스는 그동안 확보한 정치력과 자금력을 동원하여 캐리루와 내부고발자, 전·현직 직원을 압박하지만 캐리루는 후속 보도에 성공하면서 결국 테라노스라는 거대한 거짓말을 무너뜨립니다. 테라노스는 미국 식품의약처(FDA) 등 관련 기관이 진행하는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고, 홈스는 결국 CEO직을 내려놓고 향후 10년 동안 상장 회사 임원이나 이사로 재직할 수 없게 되었죠. 이 모든 과정을 담은 책 『배드 블러드』는 웬만한 스릴러 못지않은 긴장감과 공포를 선사합니다.[1] 홈스가 거물 투자자들을 속여 넘겨 온 과정을 보면서 어떤 면에선 감탄스럽기도 하지요. 미국 국무장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조지 슐츠(George P. Shultz), 마찬가지로 국무장관을 역임했으며 외교관으로 유명한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현 국방부 장관인 제임스 매티스(James Mattis) 등 유명 정치인을 이사진으로 들이고 투자를 받았으며, 심지어 폭로기사를 쓰고 있던 『월스트리트저널』 소유주인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Keith Rupert Murdoch)도 투자하게 했으니까요.
캐리루는 테라노스가 폐업하게 된 이유를 잘못된 기업 문화와 당시 미국에서 불던 스타트업 투자 광풍에서 찾습니다. 이걸 끼워 맞춘 게 홈스가 지닌 천재적인 사기술, 또는 엄청난 자기 홍보 역량이라고 보지요. 캐리루가 책에서 제시한 진단에 동의합니다. 더불어 그 진단에 하나 더 얹고 싶은 게 있어요. 왜 사람들은 홈스를, 테라노스를 믿었을까요? 단지 묘령의 여성인 홈스가 내보이는 외모에 속아서? 무언가를 믿게 되는 이유는 단방향으로 이뤄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믿음을 주는 대상에 대해 믿으려고 하는 마음이 결합하여야 탄생하지요.
심리학은 믿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확증편향을 말합니다. 확증편향이란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그에 맞춰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경향성을 말하지요. 소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라는 사람의 마음. 어쩌면 홈스는 이 부분을 잘 건드렸던 것은 아닐까요? 2000년대에 본 여러 기술적 발전처럼, 새로운 기술이 인류 건강을 급진적으로 증진하리라는 믿음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축약하고 있는 것이 의학의 생의학적 모형(biomedical model)입니다. 신체라는 기계에서 고장 난 부분을 고치면 건강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축약한 것이 테라노스가 주장한 피 한 방울로 질병 수백 가지를 진단한다 아니었을까요.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렸네요. 간략히 엘리자베스 홈스의 이야기와 테라노스 사태를 정리하고, 이 사건이 조명하고 있는 우리 마음속 생각 한구석을 살펴보려 해요.
홈스, 잡스의 터틀넥을 입다
홈스 가(家)는 한때 명망 있던 가문이었지만 엘리자베스 홈스의 할아버지 대에 영락했다고 해요. 혼자 노력으로 어느 정도 지반을 다시 닦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홈스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 많았습니다. 스탠퍼드대학교에 진학한 그는 공과대학 부학장 채닝 로버트슨(Channing Robertson)의 강의를 들으며 질병 진단과 치료를 동시에 할 수 있는 팔 패치(patch) 관련 특허를 냅니다. 로버트슨은 홈스가 여러 분야를 끌어들이는 발상에 감탄했고, 대학원생 셔낙 로이(Shaunak Roy)를 붙여 창업을 돕도록 했어요. 스타트업 리얼타임 큐어스(Real-Time Cures)가 출범했습니다. 이후 홈스는 치료(therapy)의 thera-와 진단(diagnosis)의 –nos-를 결합하여 사명을 테라노스로 변경하지요.
테라노스는 초반 가족 인맥을 통해 투자를 받았지만, 패치를 개발하는 것은 여의치 않았어요. 특허를 내는 것과 실제 제품으로 완성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지요. 결국, 테라노스는 패치를 포기하고, 휴대용 검사 장치를 개발하는 쪽으로 선회합니다. 홈스는 손가락을 찔러 얻은 혈액 소량에서 여러 물질을 측정할 수 있기를 바랬어요. 장치가 개발되고 가정에 배급된다면, 사람들은 원하는 때 언제든 혈액 검사가 하게 될 수 있을 거로 전망했지요. 그들은 ‘테라노스 1.0’이라는 시제품을 완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상용화 제품인 ‘에디슨’을 만들려고 시도합니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여기에서부터였어요. 홈스는 ‘손가락을 찔러 소량의 혈액을 얻는다’라는 접근 방법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여러 가지 검사를 시행하기 위해선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혈액 시료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혈액 소량으로 결과를 얻고자 무리하게 시도했지만, 그들은 안정적으로 결과값을 얻는 데 실패합니다. 여러 검사를 수행하고자 혈액을 희석하고 여러 염료를 섞는 과정에서 전체 검사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 늘어났던 것이죠.
여기에 『배드 블러드』가 테라노스의 최대 실패 요인으로 꼽고 있는 소통 부재가 더해집니다. 다른 기업에서 자기 착상을 훔쳐 갈 것으로 의심했던 홈스는 과도하게 보안에 집착했습니다. 업무부서 간 소통은 허용되지 않았고, 모든 결과는 홈스에게만 보고되었지요. 협업을 통해 빠르게 혁신을 이뤄나가는 모습을 테라노스에서 관찰하긴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홈스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직원들은 바로 퇴사 처리되기 일쑤였죠.
상황은 여러 가지로 점차 악화합니다. 테라노스 초기에 운영이나 개발에 뛰어들었던 유명 인재들은 쫓겨나거나 이직했고, 이후 운영책임자(COO)로 들어온 라메쉬 발와니(Ramesh Balwani)는 2000년대 초 닷컴 버블에서 우연히 큰돈을 번 사람으로 홈스의 연인이었지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다고 하지요. 홈스와 발와니는 기업 운영을 파탄 지경으로 몰아넣습니다. 한편, 잡스가 사망하고 자서전이 인기를 끌었을 때, 홈스는 잡스를 흉내 내기 시작합니다.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홈스는 테라노스의 기계, 에디슨이 아이폰처럼 매력적인 디자인과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를 탑재하길 기대하면서 애플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영입하지요. 심지어 애플 광고를 찍었던 광고기획사에 테라노스의 광고와 홈페이지 디자인을 맡기기도 해요.
이런 전략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요. 내부에도 사업 전모를 완전히 파악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외부에 그 내용이 잘 드러나지 않은 채로, 홈스의 매력에 끌린 기업과 사람들이 테라노스에 투자를 결심하게 되니까요. 그 과정에서 테라노스가 지닌 기술력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홈스가 운이 좋기도 했고 인맥을 동원해 문제 제기를 회피하기도 하여 어물쩍 넘어가 버립니다.
결국, 제품이 약속한 검사를 시행하기는커녕 최소한의 안정성도 확보하지 않은 상황에서 테라노스는 제품을 슈퍼마켓 체인 세이프웨이(Safeway)와 약국 체인 월그린(Walgreen)에 배치하여 혈액 검사를 시작합니다. 심지어 손가락 끝에서 혈액을 채취하는 것으론 검사를 다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맥에서 추가로 혈액을 채취해야 했어요. 더 가관인 것은, 테라노스가 자체 개발한 제품으론 검사할 수 있는 항목이 무척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대기업인 지멘스(Siemens)의 혈액 검사기를 사용하여 나머지 검사를 진행했지요. 게다가, 혈액이 모자라는 것은 여전했기 때문에 혈액을 희석하여 자체 개발한 ‘에디슨’과 지멘스 검사기에 넣었는데, 검사에 필요한 양 만큼의 혈액 성분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검사 결과는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었어요.
돌아보면, 이런 문제가 밝혀지지 않고 회사가 10년 넘게 유지되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지요. 퇴직자의 자료를 하나도 남김없이 압수하고 초대형 법률 사무소를 끌어들여 고소를 무기로 사용했기에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이런 사기가 영원할 수는 없었지요. 캐리루의 보도를 시발점으로 하여, 테라노스가 끌고 가던 거짓은 모조리 밝혀지고 그들이 헛되게 선전한 기술은 신기루로 사라집니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무엇보다 테라노스를 지배했던 소통 부재와 불능의 문화였지요. 투자자 중 사업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없었고, 심지어 제품을 받기로 한 회사들 또한 자신들이 응당 해야 할 조사를 빠뜨리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내부 목소리를 무시했어요. 테라노스는 제대로 된 기업 구조를 갖추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홈스의 사기업으로 남아 있었지요. 더구나, 홈스 본인이 의료 기술 및 규제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한 채로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의료 기술과 장비에 대한 규제가 이토록 복잡한 것은, 그동안 여러 사람이 역사를 통해 저지른 악행을 어떻게든 막아보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지요. 이를 그냥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테라노스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어요.
홈스가 “차세대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이런 엉망진창의 상황에서도 홈스가 엄청난 투자를 받고 온갖 언론이 주목한 데에는 홈스가 좋은 이야깃거리였기 때문이겠지요. 그는 명문인 스탠퍼드대학교 중퇴를 주저 없이 선택했는데, 이것은 하버드대학교를 중퇴한 빌 게이츠(Bill Gates), 마찬가지로 대학을 중퇴한 스티브 잡스와 홈스 사이 연결고리를 만드는 주요한 역할을 했어요. 홈스가 왜 소량의 혈액 채취에 집착했는지에도 설득력 있는 서사가 붙었지요. 홈스 자신이 바늘 공포증이 있었기에 이런 기술을 생각해내게 되었다는 것. 이 집착은 결국 테라노스가 제대로 작동하는 장비를 개발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지만, 홈스의 성공을 이끄는 견인차 구실을 하기도 했지요.
더구나 높은 의료비용이 항상 사회 문제로 제기되는 미국에서, 저렴하게 언제나 혈액 검사를, 그것도 여러 검사를 한 번에 할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칭찬할만한 목표였어요. 안타까운 점은 여러 검사를 한 번에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홈스가 내세운 목표 자체는 선했고, 언론 매체는 그런 목표를 꿈꾸는 여성 혁신가 홈스를 글, 사진, 영상으로 담아내는 것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것만으론 왜 홈스였는지, 왜 테라노스였는지를 설명하기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아이폰의 성공과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수많은 스타트업이 탄생, 투자를 받았고 그 중엔 우리에게도 친숙한 차량 공유 서비스 우버(Uber),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Spotify) 등이 있지요. 그런데 왜 테라노스는 이런 스타트업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냈고, 홈스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자수성가 여성’으로 꼽혔을까요? 다른 스타트업보다 테라노스의 기술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홈스의 주장과 테라노스의 기술이 투자자와 사람들 마음 한 구석을 건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마음일까요? 서두에서 간략하게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건강에 대해 지닌 믿음입니다. 건강은 어떤 것일까요. 아픈 곳이 없으면 건강할까요? 그렇다면, 혹시 몸속 어디에 병이 생겼는데도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픈 곳이 없는 사람도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는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건강할까요? 글쎄, ‘정상적’인 활동이란 무엇인지 고민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런 정의가 우리에겐 익숙하지요.
이런 건강 정의를 정리한 것이 철학자 크리스토퍼 부어스(Christopher Boorse)입니다. 그는 1975년 논문 「질병과 질환의 구분에 대하여(On the distinction between disease and illness)」를 통해 건강이란 ‘종적 기능의 평균’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3] 쉽게 말하면, 인간 종이 수행할 수 있는 여러 기능, 특히 각 기관이 수행하는 기능에서 각 기능의 평균치에 해당하는 범주에 들어간다면 그는 건강하다는 것이죠. 이 ‘평균’ 개념 자체가 지닌 문제는 토드 로즈(Todd Rose)의 『평균의 종말』이 설득력 있게 다룬 적이 있지요.[4] 모든 부분에서 평균에 해당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없다’라는 겁니다. 하지만 신체 각부가 평균으로 정의된 정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건강을 정의하는 일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녀 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정상 혈압을 정의하는 방식이죠. 혈압이 수축기 100~140mmHg, 이완기 60~90mmHg 범위에 들면 정상이고, 이보다 높으면 고혈압, 낮으면 저혈압이라고 분류하는 방식 말이죠.
의학의 생의학적 모형이 불러온 파탄
이런 건강 개념이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의학의 생의학적 모형입니다. 사회역학자 낸시 크뤼거(Nancy Krieger)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생의학 모형이란 세 가지 구성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5] 첫째, 질병과 그 원인은 오로지 생물학적, 화학적, 물리적 현상에만 국한됩니다. 둘째, 실험실 연구와 기술을 강조하여 특정 실험 패러다임을 통해 검증되지 못하는 질문은 무시합니다. 셋째, 철학적, 방법론적 입장으로 현상은 그 부분이 나타내는 특징의 합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는 견해인 환원주의를 견지합니다.
건강을, 의학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은 20세기 의학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성과를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수많은 약물과 장비를 개발하여 인류는 점차 건강한 삶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확증해 주지요. 아시겠지만, 현대 의학이 제시하는 수많은 ‘치료법’은 인체 특정 부분을 목표로 합니다. 자동차가 고장 났다면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는 부분을 수리하면 됩니다. 인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거죠. 몸이 고장 납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부분을 수리하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갑니다.
이게 건강이라면, 홈스가 들고 나온 검사기는 그야말로 놀랍습니다. 이제 병원에 힘들여 찾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심지어, 검사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주사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손끝만 살짝 찔러도 우리는 수많은 검사를 할 수 있습니다. 검사를 쉽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질병을 빠르게 발견할 것이고, 빠른 치료와 심지어 예방도 가능할 겁니다. 따라서, 테라노스의 기계가 도입된다면, 우리는 모두 쉽고 저렴하고 빠르게 건강해질 겁니다. 그것이 세이프웨이 최고경영자였던 스티브 버드(Steve Burd)로 하여금 경고신호를 무시하고 테라노스에 거금을 투자하게 만든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건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지요. 예컨대, 1948년 세계보건기구(WHO)가 공포한 헌장은 건강을 질병, 상해가 없는 것을 넘어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안녕(well-being)한 상태”로 정의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 사회 모두 ‘안녕’해야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혼란기에 담대하게 발표한 이 정의는 어떤 근거를 통해 도달한 결론이라기보다는 당시 세계보건기구가 형이상학적으로 추구하던 목표였지요.
그러나 20세기 말에 나온 여러 연구는 정신적, 사회적 측면이 심지어 신체적 건강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질병은 단지 유전적, 신체적 조건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도 결정됩니다. 개인이 지닌 생활습관, 교육, 직업, 거주지역, 문화 모두가 건강을 결정하는 요소이며, 이들은 상호 작용한다는 것이 최근 건강을 연구하는 여러 연구가 내린 결론이지요.
이렇게 건강을 바라보는 것은 복잡합니다. 의료보장만 확대한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또, 의학적 지식에 기초한 예방 전략을 보급하는 것만으로 모든 사람의 질병을 예방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테라노스처럼 쉽게, 피 한 방울로 수많은 질병을 검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환상적인 선언이지요. 우리는 모두 건강해지고 싶어 하니까요. 그런 주장이 그저 환상일 뿐이라는 게 문제일 뿐.
우리가 건강을 단순하게 생각하려 할 때마다, 테라노스와 같은 일은 다시 벌어질 겁니다. 2005년 황우석 사건도 비슷한 궤 위에 있지요. 황우석 박사와 그 팀이 세계를 선도하는 연구를 한다는 것이 팀이 가진 ‘원천 기술’에 대한 믿음을 부여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황우석 박사가 줄기세포를 통해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 그를 소위 ‘영웅’으로 만들지 않았었던가요. 논문 조작 보도가 가져온 후폭풍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믿음 때문일 거로 생각해요.
우린 건강해지기 위해 할 일이 무척 많습니다. 굳이 테라노스의 허황한 신기술이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생활습관을 분석하고 환경이 미치는 영향을 추적하며, 교육과 직업 등이 건강과 그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는 일들, 그리고 개인과 지역사회를 향한 건강 개입과 사업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 참여하고 함께 하는 일들. 이런 일도 신기술이 필요하긴 합니다만, 적어도 거짓된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일과는 무관하지요. 건강은 그저 손쉬운 검사 한 번으로 우리 손에 쥐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수많은 분야와 학문에서 고민해 온 것들을 건강을 위해 함께 펼쳐나갈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지요. 그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모두 어떻게 하면 힘을 합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고민일 겁니다.
참고문헌
1. Carreyrou J. Bad Blood. 박아린, 옮김. 배드 블러드. 서울: 와이즈베리; 2019.
2. Parloff R. This CEO is Out of Blood. Fortune [Internet]. Jue 12, 2014 [cited Jun 26, 2019]. Retrieved from: http://fortune.com/2014/06/12/theranos-blood-holmes/.
3. Boorse C. On the Distinction Between Disease and Illness. Philos Public Aff. 1975;5:49-68.
4. Rose T. The End of Average. 정미나, 옮김. 평균의 종말: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 서울: 21세기북스; 2018.
5. Krieger N. Epidemiology and the People’s Health: Theory and Context. New York (NY):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p. 130.
6. Ahn AC, Tewari M, Poon C, Phillips RS. The Clinical Applications of a Systems Approach. PLoS Med. 2006;3(7):e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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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소아치과 전문의가 된 다음, 새로 공부를 시작해서 국내에서 의료인문학 박사를, 미국에서 의료윤리 석사를 취득했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의학에 관한 서사적 접근과 의료 정의론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한겨례>에 칼럼을 연재 중이며, 의료윤리 이슈를 소설, 영화 등으로 풀어낸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썼다. 현재 의학의 모습에 영향을 미친 문제적 개인들의 이야기를 살펴, 의료 현실을 바꿀 가능성을 찾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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