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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쓰이는 생물학 이야기] 신경 쓰이는 아무말: 바이오 PhD의 진로에 대하여
Bio통신원(칼 베르니케)
바이오 전공 박사로서 갈 수 있는 직종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 무엇도 쉬운 길은 없지만.
(출처: 위키백과 영문판)
오늘은 지금까지의 바이오 뉴스 소개하는 글과는 좀 다른 성격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바로 명절날 친척 모임에서 “너 박사 졸업하고 나면 or 포닥 하고 나면 이제 뭐할건데?”에서 뭐할건데(…)를 맡고 있는 바이오 PhD의 진로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을 되돌아보고 있노라면, 그리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오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크다. 처음 이 분야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결심부터 그저 고3때 뭔가 미래가 있어 보인다는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심각한 고민 없이 결정했던 것이 아닐까. 이왕 지금까지 저질러 왔던 것이 있으니 처음 전공을 정하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해서, 지금 시점에서 내가 나아갈 만한 진로에는 뭐가 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옵션들을 알아보고자 한다. 예상보다 많은 길이 있었으나, 뭐든 쉽지는 않고 충분한 준비가 필요한 것 같다. 일단 지금까지 내가 알아봤던 진로들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서 적어 보고자 한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진로가 있을 수 있으니 내가 놓친 부분이 있다면 독자 여러분께서 덧붙여 주시면 감사하겠다. 아무래도 직접보다는 간접 경험이 많아 틀린 부분에 대한 지적도 해주시면 감사하겠다.
1. 전형적인 길 (1): 아카데믹 테뉴어 트랙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이 이미 알고 있는 길이다. 학부-석사-박사-포닥-연구교수-조교수-부교수-정교수로 일직선의 엘리트 코스. 문제는 이런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1% 될까 말까 하다는 점이다. 굳이 이 길을 가고자 한다면, 현재의 내 연구능력이나 위치로 따져볼 때 나랑 같은 건물에서 맨날 마주치는 같은 과 대학원생들 선후배 포함해서 한 트럭 가득 데려다 놔도 내가 그들보다 낫다는 확신이 서야 한다.
장점: 가장 전형적인 진로이며, 옆길로 새지 않고 한길만 파는 진로의 정점이랄 수 있겠다.
단점: 절대 다수가 나이 많은 비정규직 연구교수 또는 포닥으로 늙어간다. 필자는 현재 여기 엮여 있는데, 탈출을 위해 버둥거리는 중이다.
2. 전형적인 길 (2): 바이오 기업 연구원
학교에 더 이상 있고 싶지는 않은데 연구 자체는 좋아할 경우, 원하는 분야의 R&D 사업을 하고 있는 기업에 연구원으로 입사하여 일할 수 있다. 일 자체는 학교에서와 크게 다를 바 없긴 하지만 학생일 때와 직장인일 때의 일에 대한 태도는 매우 다르다. 학교는 지식을 배우는 곳이니만큼 자유로운 사고가 중요하며 새로운 시도에 대한 본인의 적극성이 큰 플러스가 되지만, 회사의 연구개발은 수익 실현을 위한 전초단계로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보다는 확실하게 결과가 나올 방법을 사용한 목표 달성이 중요하다. 회사에는 명확한 업무 체계, 예를 들어 “상급자의 지시, 그 지시에 의한 실험 및 분석, 목표 달성 여부 및 평가”와 같은 시스템이 존재하며, 이를 제대로 달성하면 인센티브가 주어지며 반면 달성하지 못하면 인사고과에 불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말하자면 학교 연구실보다는 군대식에 가까운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면 알기 쉬울 것이다. 따라서 뭔가 불합리해 보이는 일이더라도 경영진이 원하면 어떻게든 해내 보여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물론 안 되는 걸 된다고 거짓말하면 안 되지만.)
장점: 아카데미보다는 높은 연봉.
단점: 마감과 격무. 아카데미보다 업무량이 많으며 직업적 안정성이 적다. 기업이 많이 필요로 하는 특정 지식이나 기술을 학교에서 취득해가기 어렵기 때문에 애시당초 경력이 없으면 생 초짜 대우.
3. 어중간한 길 (?): 바이오 기업의 학술담당
물론 이 진로 자체가 어중간하다는 얘기는 아니고, 전공 관련 업무라는 점에서는 전형적일 수 있으나 업무 자체가 어느 정도의 마케팅과 고객관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전형적인 바이오 박사의 진로가 아닐 수도 있기에 “어중간”하다고 붙여 보았다. 우리가 실험실에서 새로 기기 사서 셋업할 때 만나는 분들이 바로 이 분야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1억5천만원짜리 라X온X트 또는 3억원짜리 인X사X트라고 하는 오토매틱 이미징 시스템을 구매하여 새로 구축했다고 하자. 고가의 정밀 기기는 기능이 좋긴 하지만 사용법도 복잡하다. 따라서 이 기기를 판매한 기업의 해당 기기 담당자가 와서 워크샵처럼 2-3일 동안 기본 사용법 및 구매자의 니즈에 맞는 전문적인 분석법 등을 교육하게 된다. 결국 그 기기의 사용법 자체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며 동시에 어떠한 실험 결과에는 어떠한 분석방법이 최적일지에 대한 감각도 필요하다. 즉 실험깨나 해봤다는 바이오 박사들에게 (해당 기기를 사용해 봤다면 더더욱) 알맞은 직종인 셈이다. 특히 남들에게 기기 사용법 포함해서 뭔가 설명해 주기 좋아하는 사람이면 더더욱 적성에 맞을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꼰대한테 알맞은 직종은 아니다. 당연히 요즘 세상에 고객님은 왕이니깐 사용법을 가르쳐 주더라도 꼰대질은 절대 하지 말고 반드시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어 잘 가르쳐 드려야 할 것이다. (…라고 꼰대질을 시전해본다.)
장점: 매일매일의 셀 컬쳐 카운팅과 계대배양에서 해방된 삶. 또는 매일매일의 마우스 메이팅과 지노타이핑에서 해방된 삶. (…)
단점: 회사에 이미 나보다 그 기기를 더 잘 다루는 석사 출신들이 있으면 그 회사에서 내가 할 만한 일이 없다. 실험 셋업 다 해주고 기기 사용법 다 가르쳐 줬는데 나중에 안된다고 클레임 거는 고객과 씨름해야 하는 일상.
4. 비전형적인 길 (1): 금융계 및 금융인프라 업계 (기술신용평가, 기술가치평가, 애널리스트, 벤처캐피탈 등)
이 진로는 소위 wet lab이라고 부르는 생물학 실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고, 소위 dry bench라고 부르는 생물정보학도 물론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실험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결과를 놓고서 이 기술의 가치가 얼마짜리에 해당하는지 평가를 하고, 과연 이 기술을 보유한 기업에 펀드를 끌어모아 투자하기에 적합한지 또는 그 기업이 이 기술로 주식 상장을 할 만 한지 판단하게 된다. 즉 기술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할 만한 전문성을 필요로 하면서 동시에 현재 시장에서 그 기술이 얼마나 통할지를 예측할 수 있는 판단력 또한 중요하다.
장점: 실험/연구하는 직장보다 최소 1.5배 이상 높은 연봉과 훌륭한 복지. 산업계의 다양한 기업인들과 교류할 기회가 많다. 즉 사람 만나는 일을 좋아할 경우 적성에 맞을 확률이 높다. 많은 기업을 대하며 잘 될 기업에 대한 감각을 배우게 되기 때문에 유망 스타트업 기업에 좋은 조건으로 (중역급) 스카우트 될 가능성이 있다.
단점: 직업의 안정성이 특히나 없는 편이며, PhD까지 공부한 시간으로 인해 같은 나이의 경력직에게 밀려 최초 취업 자체가 어렵다. 사람 만나는 것을 힘들어하는 내성적인 성격일 경우 버티기 어려울 수 있다.
5. 비전형적인 길 (2): 기술문서 및 과학전문서적 번역가
이건 영어에 자신 있다 싶은 이공계인들, 특히 유학파 출신들이 할 만한 일인 것 같다. 제약회사 기술문서의 영한-한영 번역 일은 전문성과 영어실력을 동시에 요구하지만, 구어체나 생활영어 표현을 배제한 포멀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논문 영어를 생각하면 된다.) 소설이나 영화 게임 등의 분야처럼 문화적 요소나 유행어 등을 알아야 할 필요가 적다. 즉, 영어권 국가의 문화에 대한 깊은 소양이 부족할지라도 웬만큼 영어로 논문 좀 써봤다 (또는 피어 리뷰 해봤다) 싶은 박사급 전공자들의 경우, (적어도 자기 분야에 한해서는)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제대로 된 일을 구하는 것부터가 막막한 편이며, 일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으려면 사전에 업계 관련 정보를 많이 수집해 두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장점: 프리랜서의 장점을 다수 포함한다. 재택 근무가 가능하며 업무 시간 관리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시간 관리하기 따라서는 투잡도 가능하다.
단점: 극히 일부의 몸값 높은 분들을 제외하고는 전업 과학자의 반절도 못 미치는 연간 수입. 어쩌다 일이 몰리면 잠잘 시간도 없다.
6. 비전형적인 길 (3): 국가기관에 들어간다 (과학재단, KISTEP, 식약처, 국과수 등)
일부 연구과제 기획 및 평가 기관에 들어가서 관련 업무를 수행하거나 검증기관에 들어가서 관련 실험 업무를 수행하는 일이다. 새로운 지식 창출보다는 (1) 새로운 지식 창출을 할 곳에 연구비를 지원하는 역할, 또는 (2) 새로 만들어진 실물에 대해 검증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한다. 뭔가 새로운 것보다는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업무를 원한다면 이런 곳들 만한 직장도 없을 것이다.
장점: 공무원의 장점을 포함한다. 직업적 안정성이 높고, 해당 업무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기업이 많기에 퇴직 이후 재취업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
단점: 차라리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싶다. 심지어 어떤 곳은 하루 날 잡아서 팀 짜서 미션 수행하는 것으로 면접 보는 곳도 있다. 합격자 교육이 아니라 면접을 그렇게 본다. 다만 일이 완전히 규칙적인 것까지는 아니고 성수기가 있어서 바쁠 땐 엄청 바쁘다. 물론 비수기때는 여유로운 편이다. 그리고 뭔가 자유롭고 새로운 지식 창출에 의욕을 갖고 있는 분들은 되도록 이 곳은 피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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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어떤 길이 내게 현실적일까? 나이를 제법 먹은 지금도 확정 짓지는 못했다 (철이 덜 들었나 보다.). 40대 초반의 아이 둘 아빠라는 개인적인 상황이 쉽게 모험에 뛰어들지 못하게 가로막는 점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대로 박봉의 비정규직 포닥으로 아카데미아에서 늙어가기에는 학사부터 석사 박사를 거쳐 포닥까지 20년 가까이 공부해 온 세월이 아깝긴 하다. 그동안 새로운 지식 창출을 못했다면, (If you’ve not been productive,) 지식을 재창출하는 직종에서 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how ‘bout reproductive works?) 내게 맞는 길이 무엇일지 고민해 보는 시간은 나이나 시기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중요한 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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