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이 한창인 가운데, 수 많은 학생들의 성추행 폭로와 사과 요구에도 불구하고 기자회견까지 자처하며 “사과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본인이 “비이성적 고발을 당해 강단을 떠날 것”이라고 밝힌 교수가 있다1. 하일지는 한국의 소설가이며, 본명은 임종주로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학위를 마쳤다. 그의 경력에서 내게 유일하게 익숙한 건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읽지도 않은 소설이다. 1990년 민음사에서 발간된 이 책은 하일지의 등단작으로 이후 강수연, 문성근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위키백과에 써 있는 이 책의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R은 그곳에서 동거했던 J라는 여자와 만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J와 R과의 섹스를 거부하고, 화가 난 R은 대구로 내려온다. 늙은 부모와 가족, 성격이 맞지 않는 아내 등, R은 열악한 현실에서 직면하게 되고, 시간강사직을 맡게 되면서 서울-대구를 내왕한다. 서울에 올 때마다 J를 만나지만, J는 프랑스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섹스를 거부하고 R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점점 지쳐간다.”2
영화가 개봉된 1991년에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이 영화의 제목이 기억나는 이유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이었기 때문이다. 줄거리에 나타나듯이 이 영화는 마치 하일지 자신의 경험담인 듯, 프랑스 유학생과 그가 동거했던 여자의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당대의 스타 강수연의 베드신이 남자 고등학생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을 것도 당연한 일이고, 그러니 이 영화를 보지도 않은 내가 이 영화의 제목이라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 하일지가 소설의 주제로 섹스를 다루었다거나, 이후로도 섹스에 대한 소설을 계속해서 써왔다는 건 내 관심사가 아니다3.
얼마 전 손석희 앵커가 이명박의 거짓말을 꼬집어 ‘회상성 기억조작’에 빗댔다4. 회상성 기억조작에 걸린 인간은 자신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하고, 타인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유리한 기억만 받아들이고 불리한 기억은 조작한다5. 박근혜 정부의 성추행 대변인 윤창중이 기자회견에서 보여주었던 진술들, 박근혜와 이명박이 검찰에서 진술한 태도, 모두 회상성 기억조작의 징후를 보여주는 행동이다. 그리고 아마도 미투 고발에 당당한 작가 하일지도 예외가 아닐지 모른다.
근거가 있다. 하일지가 쓴 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소설이 아닌, 심지어 <철학과 현실>이라는 철학 학술지에 실린 글, “피사의 사탑은 왜 기울어져 있는가?”를 읽어보면 하일지라는 작가가 얼마나 철저하게 현실을 왜곡해서 인식하고, 그 왜곡된 현실을 진실이라고 믿고, 강변하는지를 알 수 있다6. 우선 이 글이 철학자 흉내를 낸 소설가의 글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철학은 논증의 학문인데, 이 글은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무시하고 궤변을 펼치기 때문이다. 마치 라깡 이후의 망가진 프랑스 철학처럼, 그는 이 논문의 형식을 빌린 소설을 통해 철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학자의 글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일지는 피사에 갔다. 그리고 사탑이 기운 것을 보고 놀란다. 그리고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알려진 기본적인 사실과 논증조차 조사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관광객 수준의 의문을 던진다. “우선 그것이 처음부터 기울어지게 지어졌느냐, 아니면 처음에는 똑바로 지어놓았는데 세월이 가면서 점차 기울어졌느냐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질문이 인류에게 수수께끼로 남았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피사의 사탑이 지반 문제 때문에 점점 기울어 할 수 없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렇게 지어졌다는 건 아무 백과사전이나 펼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일지가 이렇게 질문거리도 안 되는 의문을 가진 이유는 자명하다. 그는 피사의 사탑이 일부러 기울게 지어졌다는, 상식에서 벗어난 대답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후의 글은 바로 이 대답을 끌어내기 위한 증거 꿰어 맞추기다. 그가 처음 던지는 의문은 피사의 사탑에 베란다가 없다는 것이다. 피사의 사탑에 베란다가 없어서 베란다 밖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그는 이 사탑이 정치나 종교의 이단들을 데려다 공포를 주는 의도로 지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그리고 그 결정적 증거로 사탑 곁에 있는 대성당의 벽화를 지목한다. 그 벽화엔 저승사자가 끌고 온 영혼들이 저승 심판관 앞에 줄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벽화로부터 그는 사탑과 대성당 모두 누군가에게 공포를 심어줄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자의적인 해석을 한다. 무슨 이상의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도 아니고, 그는 바로 이 두 가지 사실로부터 피사의 사탑은 일부러 기울게 지어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글이 1992년 <철학과 현실>에 출판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이미 그가 유명해진 이후에 어쩌다 보니 제대로 된 심사도 없이 철학 학술지에 글이 게재되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철학과 현실>은 결코 녹록한 학술지가 아니다. 이런 허술한 논증을 기반으로 오로지 화려한 서술에 기댄 글이 철학적 에세이라는 미명하에 실릴 수준의 학술지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아마도 심사 후 게재된 글은 아닐 것이다. 유명한 작가의 에세이라니 그저 한 번 실어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하다.
이 글에서 유추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일지의 현실 인식이 지닌 패턴이다. 미투 운동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를 설명할 수 있는 기원도 이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오류는 주로 강단에서만 머물며 사회의 제도와 현실에 무지한 교수와 작가들에게서 고루 발견된다. 그것은, “현실을 이론에 끼워 맞추려는 태도”다. 예를 들어 유럽의 특유한 역사와 문화 속에서 발전된 사회학 이론을 한국에 가지고 들어와 한국사회를 분석하려는 사회학자들이 있다. 만약 그 이론이 한국사회를 설명하지 못하면, 그들은 이론 탓을 하지 않고 한국의 현실을 탓하는 식으로 자기정당화를 한다7. 혹은 서양 예술과 종교를 설명하는 문예이론과 종교이론을 굳이 끌고 들어와 동양의 예술과 종교를 분석하는 것이다. 실은 자연과학이나 공학처럼 시공을 초월한 일반 법칙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면, 그런 초월적 이론이란 존재할 수 없음에도. 하지만 한국에선 그런 무지막지한 현실 꿰어 맞추기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홍준표를 필두로 보수를 자처하는 극우 세력은 한국이 ‘종북세력’에 의해 조종되는 위험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여론조사 지지도에서 자유한국당이 10%를 갓 넘기는 수준이라는 생생한 현실은 그들에겐 왜곡된 것이다. 자신들이 집권했던 지난 10년의 추억 속에 사는 그들은 집단적 회상성 기억조작에 시달리고 있다. 현실이 말해주는 상식보다, 자신이 맹종하는 이념과 교리가 더 중요하다는 사람들, 그런 이들에게 미투운동은 명예훼손이며 자신에게 성추행을 당한 여성은 추행을 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긴 것이 된다.
피사의 사탑은 왜 기울어져 있는가? 그 사탑을 건축한 건축가가 지반의 단단함을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일지의 현실은 도대체 왜 왜곡되어 있는가? 그의 현실인식이 발전하는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진보된 사회의 모습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을 성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비판한 이봉지의 논문 ”『경마장 가는 길』의 초점 체계와 성 이데올로기”는 그 소설을 이렇게 평가한다. 나는 이 말이 현재 하일지라는 한국의 소설가가 보여주는 비극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8.
“그러나 이 소설에는 외부초점 체계에 대한 위반, 즉 변조의 예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이러한 위반의 경우, 화자의 시점은 외부에 대한 객관적 묘사에서 벗어나 R의 시점을 반영한다. 『경마장 가는 길』에 나타난 외부초점 체계의 변조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이 소설이 표방하는 화자의 객관성이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소설의 화자는 남자 주인공인 R과 부분적으로 겹쳐지거나, 적어도 공범 관계에 있는 인물이다. 즉, 이 소설이 고집하고 있는 외부초점 서술은 결국 표면적으로 객관적 서술이라는 느낌을 줌으로써 주인공인 R의 정당성을 극대화하는 기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을 통해 진행되는 남녀간의 재판은 전혀 공정하지 않다. 객관적인 심판자로 간주되는 화자가 편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철저히 은폐하고 있다면 공정한 재판이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일지는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박근혜와 이명박이 사과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 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도덕과 윤리가 통하지 않는 상대를 굳이 인간처럼 대접할 이유는 없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도대체 미투운동과 과학이 무슨 상관이냐”고. 이렇게 되물어보면 된다. 철저한 증거에 기반해 현실을 가장 상식적으로 판단하고, 이론이 사실을 왜곡하지 못하도록 끊임 없이 이론을 시험하는 집단이 누구냐고. 그게 바로 이 글을 읽는 과학자 바로 당신이 매일 하는 일이다. 그런 과학자조차 교수라는 이름으로 대학원생을 성추행하는 국가에서, 이 주제가 과학과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는 더 이상하다.
 김우재, 급진적 생물학자
※ 주석
1. 동덕여대 ‘하일지 망언 대자보’…“그런 작가라면 되지 않겠다”. 한겨레. 2018.03.19 irnatural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836687.html#csidx8184fc420f523aca68d58520de8bc9c
2. https://ko.wikipedia.org/wiki/경마장_가는_길
3.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이 담고 있는 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논문은 아래를 참고할 것. irnatural이봉지. (2004). [경마장 가는 길] 의 초점 체계와 성 이데올로기. 여성문학연구, 12, 271-302.
4. 손석희. (2018.03.19) [앵커브리핑] '그건 모두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5. 김찬곤. (2013.05.30). 회상성 기억조작. 경북일보 칼럼
6. 하일지. (1992). 피사의 사탑은 왜 기울어져 있는가?. 철학과 현실, 320-326.
7. 한국 사회과학의 초창기는 이런 수준의 논문의 향연이다.
8. 이봉지. (2004). [경마장 가는 길] 의 초점 체계와 성 이데올로기. 여성문학연구, 12, 27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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