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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협주곡-19] 아버지의 직업
Bio통신원(김우재)
개발독재 시대엔 노벨상 유행이 과학기술인에 의해 주도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노벨상 시즌이면 등장하는 과학자의 글들도, 기조가 변한지 벌써 10여년이 넘었다. 이제 과학자 공동체도 노벨상에 한 맺히기보다, 호기심에 의해 주도되는 다양한 기초연구와, 국가의 장기적 지원이 노벨상에 더욱 중요한 요소임을 안다. 아니 그보다 더 급진적으로, 과학이 노벨상을 목표로 할 때 생겨나는 불행에 대해 이미 한국 과학계는 성찰하고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1. 변하지 않는 것은 예산을 집행하는 권력과, 과학에 대해 영혼은 커녕 생각조차 없는 관료집단, 그리고 그들의 프로파간다에 가끔 속는 대중이다. 결과적으론 부익부 빈익빈으로 귀결되어 버렸지만, IBS같은 기초과학 진흥 정책은 그런 변화를 상징한다.
과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연구하고, 정부에 건의하고, 대중을 설득하고, 심지어 이그노벨상을 받을 연구까지 하라는 건 과학자에게 지나치게 많은 의무를 부여하는 무책임한 주장이다. 인문학자들은 그런 일을 하고 있는가? 두 집단 모두 한국사회에선 권력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치고 받는 일은 그만할 때가 되었다. 기초학문이라는 범주에서 둘은 함께 한국사회를 설득하고 존재를 지켜나갈 동반자다. 이제 인문학자들이 과학계의 문제를 과학자 집단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일을 그만했으면 한다. 과학계가 겪고 있는 대부부의 문제는 개인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문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태호 박사의 유쾌한 글, <한 맺힌 노벨상 대신 유쾌한 이그노벨상을?>2은 일독의 가치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과학자가 권력을 휘두르는 공간은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실험실과 수십명이 조금 넘는 강의실이다. 특히 여전히 폐쇄적인 도제관계로 이루어진 실험실의 문화는 한국의 유교적 권위주의를 만나 기괴한 주종관계를 형성했다. 실험실에서 교수는 절대권력이 된다. 그 권력의 크기는 어쩌면 회사나 군대의 상사 이상일지도 모른다. 과학자로 평생 살아갈 학생이 거칠 인간관계의 폭은 생각 외로 좁다. 제대하고 나면 거의 볼 일 없는 군대의 고참이나,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영향력이 대폭 줄어드는 회사의 상사와는 다르게, 교수라는 절대권력은 대학원생의 경력 내내 그를 따라다니는 유령이다. 과학자에게 개인 차원의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려면, 바로 이 지점에서 그를 강하게 비판할 필요가 있다. 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야말로 개인적 윤리의 차원으로 환원이 가능하고, 과학자의 윤리가 요구되는 가장 긴급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주간, 아니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를 뒤흔든 정치사회면 뉴스의 근간엔 왜곡된 한국의 가족주의가 놓여 있다. 지난 주엔 서울대에서 잘 나가던 교수가 자신이 아들을 43편의 논문에 공저자로 올렸다가 사직서를 제출한 일이 있었다. 그의 아들은 고등학교 시절 논문 3편에 공저자가 된 걸 시작으로, 아버지와 같은 학과의 대학원으로 들어오면서 43편이라는 신기록을 남긴 우수한 학생이 됐다. 아마 세계기록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교수의 아들이 정말 뛰어난 연구자일지도 모른다. 그 교수가 국민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아들이 워낙 연구실에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거들었다. 형들이 격려하는 차원에서 이름을 넣어준 것도 있다”고 말했다고 해도 말이다3. 전언에 따르면 자식의 이름을 실험실 논문이나 동료 교수의 연구에 끼워 넣는 작태가 도를 넘어섰다고 한다. 더 심각한 사실은, 서울대나 카이스트 등의 최고 엘리트들이 포진한 곳에서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난다는데 있다. 한국의 왜곡된 가족주의는 이미 과학계에도 널리 퍼졌다.
사실 서울대 교수가 저지른 이 황당한 아들 사랑은, 명성교회 목사 김삼환이 아들 김하나에게 수천억원대에 이르는 교회를 세습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윤리적으로만 본인의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는 직업, 종교인의 왜곡된 가족주의가 비일비재한 한국에서, 과학자의 아들 논문 만들어주기는 어쩌면 귀여운 일탈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코너링을 잘해서 운전병이 된 아들을 둔, 국정농단 청와대의 실세였음에도 여전히 구속조차 되지 않는 우병우의 권력서열과 비교한다면, 서울대 교수 정도야 한국사회의 중산층에 불과할지 모른다. 여기에 강원랜드 직원 대부분이 왜곡된 가족주의가 빚은 온갖 청탁으로 들어온 낙하산이라는 뉴스를 더하면 서울대 교수의 사직서는 왠지 지나친 징계로 보일 수 있다. 게다가 지난 겨울 한국사회를 뒤흔든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에 최순실의 왜곡된 자식 사랑이 있었음을 상기해본다면 말이다. 그 서울대 교수는 참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다.
개인이 윤리적 차원에서 제어 가능한 권력은, 그 권력이 작용하는 범위 내에서는 상대적이다. 즉, 청와대 수석이었던 우병우가 아들을 위해 경찰청에 휘두를 수 있었던 권력의 세기와, 서울대 교수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아들의 이름을 넣으라고 압박할 수 있었던 권력의 세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물론 우병우나 최순실처럼 절대적 권력의 크기가 세질 수록,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도 증가하게 되고, 그로 인해 법의 적용이 더욱 엄격해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의 핵심을 조절 가능한 개인적 윤리 혹은 도덕의 차원으로 좁혀본다면, 우병우나 서울대 교수나 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한 사례라는 점은 동일하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한국사회의 겉모습은 분명 성장한 것처럼 보인다. 현 정부는 정치/경제/사회 분야의 적폐 청산, 그 중에서도 특히 정치적 적폐 청산에 집중하며 새로운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주려 한다. 정치적 적폐의 청산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보통사람들의 신념, 그리고 그 신념들이 모여 만드는 문화는 오랜 시간 누적되어 스스로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 그 생물의 정체성은 쉽게 변하지 않고 서서히 움직이며, 그 생물의 진화방향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법을 포함한 제도적 변화다. 사회의 적폐를 만드는 부패 정치인, 경제인 몇 명을 처벌하는 것으로 우리 사회의 왜곡된 가족주의가 변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뿌리깊은 가족주의는 조선시대 권력욕을 위해 취사 선택된 유교적 가족 이념의 전승에 기대고 있다. 특히 부계혈연을 중심으로 한 폐쇄적 가족주의, 가문 중심주의는 우리 사회가 근대화 되는 식민지 시대와 분단, 전쟁, 현재의 국가주의적 발전과정 속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4. 최근 출판된 책 <이상한 정상가족>에서 저자 김희경은 한국은 “부모의 친권이 지나치게 강한 나라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권리는 부모의 자유권이라기보다 자녀의 보호를 위해 부여되는 기본권으로 권리보다는 의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가족 내에서 부모의 양육방식은 치외법권적 ‘천륜’의 영역이 아니며 인권 보호를 위한 국가의 제재 대상이어야 한다. 비대한 국가를 선호해서가 아니다. 공공의 개입이 닫힌 방문 안에까지 이루어질 때에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고 자유로워지는 약자들이 가족 안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5. 어쩌면 한국사회에서 국가는 부모의 자식사랑에 어쩔 수 없이 개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특히 술자리에서 변호사를 폭행하고 “너희 아버지 뭐하시나”라고 물었다는 재벌 3세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생각이 더 확고해진다6.
가족주의, 어쩌면 생물학자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이 문제로 인해, 한국사회는 물론 과학의 신성한 실험실까지 부패하고 있다. 국가가 사생활에 침범하는 일은 최소화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가족주의로부터 벗어나 건강해지려면, 제도적 해법이 필요하다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선 아버지의 직업에 따라 귀족과 서민과 천민이 갈린다. 아버지가 교수면, 그 자식은 별 힘도 들이지 않고 43편의 논문을 들고 학계로 진입할 수 있다. 참 역겨운 일이다.
김우재, 급진적 생물학자
※ 주석
1. 예를 들어 ESC는 경제발전에 종속된 과학기술이라는 프레임을 제공하는 헌법을 개정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http://esckorea.org/board/notice/615
2. /myboard/read.php?Board=news&id=288698
2013년과 2015년에 이미 필자가 이그노벨상의 중요성을 주장했던 글도 함께 읽어보시기 바란다.
암실의 초파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1825.html
노벨상 패러독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11454.html
3.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852635&code=11131100&sid1=soc
4. http://www.bookpot.net/news/articleView.html?idxno=779
5.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linkClass=17&barcode=9788962622096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78125.html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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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협주곡은 두 명의 과학자와 한 명의 과학사학자가 함께 써가는 과학 주변의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어디로 흐르게 될지 우리도 알지 못합니다. 마치 재즈처럼, 세 명의 필자는 앞 사람이 쓴 글과 맥락이 닿는 이야기들로 과학의 현실과,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해 짧은 단상들을 늘어 놓게 될 겁니다. 과학계의 현실을 지적할 땐 치열하게, 과거를 가져 올 땐 차갑게, 그리고 대안과 함께 미래를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과학으로부터 훈련받은 그리고 과학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과학적인 태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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