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마당 오피니언
문재인 정부 2년, 과학기술 공약의 실질적 이행을 위한 제언
호원경 (비회원)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지나며 공약 이행 여부가 관심사다. 과학기술 분야 공약인 “기초연구 지원 확대”와 “자율과 책임의 과학기술 혁신 생태계 조성”은 단순히 연구비 지원을 늘리는 것을 넘어 과학기술계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어서 큰 기대를 모았었다. 하지만 이런 정책들이 실제 연구 현장에서 체감되는 변화로 나타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큰 변화를 기대했는데 달라진 게 뭐냐는 실망의 소리도 들린다. 다양한 문제들이 논의되었지만 문제의 핵심을 비껴간 경우가 많았고, 의미 있는 제도 개선책이 발표되기도 했지만 실질적 이행을 위한 구체적 전략은 미흡했던 것이 아닌지 더 늦기 전에 짚어봐야 한다.
우리나라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정부 R&D 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왔고, 특히 이명박 정부에서 R&D 투자를 대폭 늘려 정부 총예산에서 R&D 투자 비율이 5%를 넘어 세계 1위가 되었다 (그림 1). 문제는 그 방식과 내용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수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바탕으로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투자를 확대한 것이 아니라, 투자 확대를 정부 방침으로 정해놓고 부처별로 경쟁적으로 새로운 기획 사업을 만들어 예산을 증액한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적으로 필요한 연구사업을 기획할 만한 전문성을 가진 공무원을 확보한 건 아니었으니, 부처 공무원이 연구자들과 협업해서 새 사업을 만드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연구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공무원과 협력하여 대규모 사업을 기획함으로써 연구비를 확보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연구자들이 생겨나면서 연구를 열심히 잘 하면 연구비를 받을 수 있다는 상식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림 1] [그림 2]
정부 주도의 기획 사업 위주의 투자 확대는 연구 내용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예산을 확보하려면 기재부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구조에서 새로운 사업을 만들려면 경제적 가치를 내세워야만 했고, 실제 경제적 가치가 있을 건지, 어떤 기준으로 사업의 타당성을 판단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무조건 경제적 가치를 내세울 수만 있으면 연구사업을 만들 수 있다는 식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한편, 당장의 경제적 가치를 내세울 수 없는 기초연구를 지원하는 연구자주도 기초연구사업에 대한 투자는 제자리걸음이었으니, R&D 투자비율이 세계 1위로 도약한 시기에 기초연구사업에 의지하던 대학은 연구비가 끊긴 실험실이 속출하는 빙하기를 맞았다 (그림 2).
이렇듯 전체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한 기존의 기초연구사업이 동결된 한 편에서는, 노벨상 수상을 목표로 한 새로운 사업으로 기초과학연구원 (IBS)이 출범하였다 (그림 2). 일반 연구자들은 연구 기반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극소수의 우수 연구자에게 연간 100억까지 지원하는 사업은 기초과학의 수준을 끌어 올리는 순기능 보다는 과학계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역작용으로 주목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R&D 투자 확대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끌기보다는 건전한 과학기술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연구자 주도의 기초연구 지원 확대” 청원 운동으로, 기초연구사업이 정체된 지 5년째인 2016년이었다.
전례가 없는 과학기술인의 대대적 서명 운동은 새 정부의 국정과제에 2022년까지 연구자주도 기초연구사업을 2조5천억원까지 확대하는 구체적 내용으로 반영되었다. 이후, 정부는 예산 확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어 2016년에 1조2천억원이던 예산이 2019년에 1조7천억원이 되었으니, 앞으로 큰 문제가 없다면 목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초연구사업 증액 목표를 달성하기만 하면 저절로 연구 생태계가 복원되고 과학기술의 기초가 튼튼해지는 건 아니다. 예산이 증액되더라도 중구난방으로 투입된다면 투자 확대에 상응하는 성과로 이어지지 못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과기부와 교육부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2017년부터 시작된 기초연구사업비 증가가 어떻게 투입되었는지를 보면 과제수를 늘리는 데에 급급하여 과제당 평균 연구비는 도리어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림 3).
[그림 3]
청원 당시 기초연구비 총액의 부족 뿐 아니라 과제의 80%가 적정연구비에 한참 못 미치는 5000만원 짜리라는 점을 큰 문제로 지적하였었다 (그림 4, 좌측). 증액 목표로 개인연구비 2조를 제안했었던 근거는 연구자들이 이런저런 다른 연구비를 쫒아다니지 않고 연구에 몰입할 수 있고 기초연구사업 내에서도 수월성 추구가 가능한 연구비 구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림 4, 중앙). 이후, 연구제도혁신기획단에서는 이런 요구들을 종합하여 2022년까지 개인 연구비 1조 9천억으로 17000 과제를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연구비 규모별 포트폴리오를 발표한 바도 있다. 하지만 기초연구사업의 2019년 현황을 보면 현장에서의 요구나 발표된 계획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형상이다. 기초연구사업 증액 목표액의 40%에 달한 현 시점에서 개인기초 과제수는 2만 개를 넘었고, 늘어난 과제가 적정연구비에 못 미치는 소액과제와 1억원 내외 규모의 과제에 치중되면서 2억원 이상 규모의 과제는 그 비율이 도리어 감소하였다 (그림 4, 우측). 이 현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기초연구사업의 목표를 수혜율 증가에 두고 수월성 추구는 포기하는 사업으로 가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유공모 사업은 연구자들 간의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고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연구비 규모의 단계별 구조와 과제수를 치밀하게 계산해 투입해야 하는데 사업 시행 부처인 과기부와 교육부가 과연 예산 규모에 맞는 최선의 포트폴리오를 함께 고민하며 긴밀한 협조를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공동 목표를 설정하고 부처별 사업계획을 조율하려면 혁신본부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그림 4]
정체되었던 기초연구사업 증액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났고, IBS가 출범한 지는 8년이 되어간다. 사업으로서의 성격은 극과 극으로 달라 보이지만, 현재 우리나라 기초연구를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으로서 궁극적인 목표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사업을 잘 운영하여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수준을 끌어 올려야 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어떤 사업이든 목표한 바와 달리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 바,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모니터링하고 문제가 있으면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개별 연구자나 개별 사업단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기초연구사업 증액과 IBS 출범이 우리나라 기초연구의 수준을 끌어 올리는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다각적 검토가 필요할 것이나 유용한 자료를 찾지 못해 우선 단순한 분석으로 브릭 한빛사에 등재된 논문의 연도별 추이를 살펴본다 (그림 5). 한빛사 논문 발표 편수는 2014년까지 꾸준히 가파르게 증가하다가 2014년에서 2017년 사이에 정체를 보인 후 2018년에 다시 증가한다 (그림 5, 좌측). 기초연구사업 정체에 이어서 우수논문 발표 편수 증가에 정체기가 오는 점이 주목되며, 2018년에 시작된 증가 추세가 앞으로 이어질지 주시할 필요가 있겠다. 한빛사 논문을 저널 별로 분석해 보면, 소위 최상급 저널로 불리는 Cell, Nature, Science에 발표된 논문 편수는 현재와 한빛사 전체 편수가 1/5에 불과하던 때와 거의 차이가 없음이 주목된다 (그림 5, 우측). Nature 자매지까지를 포함해도 비슷하다. 한빛사 통계가 저널의 impact factor만을 기준으로 한 점과 의생명.바이오 분야에 국한된 정보라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최상급 저널의 논문 편수가 도무지 늘지 않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 연구 환경이 최상급의 연구자를 키우는 데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그림 5]
최근의 추세에서 인정되는 최상급의 연구는 연구책임자 혼자의 아이디어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고도화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팀이 있어야 하고, 고가의 장비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연구비 소요가 크다. 현재 기초연구사업의 최대 규모 연구비가 7억인데, 그 이상 규모의 연구비도 필요하다는 데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큰 연구비를 주는 사업을 만든다고 해서 발전적인 것은 아니다. 그 이전 단계 규모의 과제가 충분히 받쳐주어서 최대 규모 연구비를 목표로 노력하는 연구자 수가 충분히 있어야 큰 연구비를 주는 사업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발전하는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최고 수준의 연구를 목표로 하는 IBS에 적절한 연구비가 얼마일지를 기초연구사업에 최적인 연구비 구조와 연결해 생각해야 한다. 지금처럼 기초연구사업은 적정연구비에 미달하는 소액으로 과제수를 늘리는 데에 급급하고, IBS는 기존의 형태를 고수하는 데에 급급 한다면 과학계의 양극화는 점점 심화되고 둘 다 희망이 없는 사업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IBS는 지난 8년 간의 성과를 냉정하게 돌아보고 우리나라 연구 생태계에서 노벨상을 지향하는 수준의 연구가 자라나게 하려면 어떠한 개혁이 필요한지 새로 시작하는 자세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기초연구사업 또한 단기적 증액 목표 달성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보다 장기적 비전을 세우고 그에 맞추어 계획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 이런 차원의 계획은 국가 R&D 전체를 대상으로 한 치밀한 검토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 바 콘트롤타워의 적극적 역할이 요구된다.
당초에 연구자들이 청원을 통해 요구한 것은 단순히 연구비를 더 달라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과학이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게 하는 제도적 개혁이었다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연구자들의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연구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짐은 상식이나, 20조에 달하는 정부 R&D 중 자율적 연구를 지원하는 사업이 아직도 10%에 미치지 못하는 게 우리나라 현실이다. 이는 R&D 규모는 세계 1위를 자랑하지만 이를 기획하고 집행하고 관리하는 정부 시스템은 개발도상국 시절에 머물러 있음을 나타낸다. 선진국형 R&D로의 도약을 위해서는 자율적 연구를 지원하는 사업으로 예산 확보가 가능하도록 제도를 개혁하는 일이 시급하다. 지난 해 혁신본부에서 예비타당성조사 개선안을 내놓은 것은 그 첫 걸음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장에서는 개선의 징후를 찾아볼 수 없다. 정부가 바뀌었지만 달라진 게 뭐냐는 실망의 소리가 나오는 이유이다. 사업 실행 부처와 평가 기관에서 실행 의지를 확실히 보여야 현장이 변화한다.
자율적 연구 확대 필요성 주장이 때로는 사회적 수요에 부응하는 목표지향적 연구를 폄하하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고 기초연구와 응용개발 연구 사이의 밥그릇 싸움으로 오해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미래지향적 연구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려면 자율적 연구는 기초연구에만 해당하고, 부처별 사업은 전부 정부가 주도하는 목표지향적 사업이어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처별 사업을 지금처럼 교수들에게 용역을 주어 기획하는 방식으로는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기술의 변화와 혁신, 그리고 새로운 연구영역과 방법론의 융합 및 등장, 소멸에 대응할 수 없다. 전략적으로 육성할 분야 설정이나 해결해야 할 문제 도출은 정부가 하되, 그 해결책은 연구자들이 자율적으로 창의성을 발휘해 찾도록 하는 사업 형태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 자율적 연구 확대는 다수 연구자의 공정한 경쟁을 유도할 수 있어 과제 선정의 투명성을 높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반면, 목표지향적 사업은 제한된 연구자들만 수행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공정성 확보가 문제될 수 있다. 수요에 기반한 뚜렷한 목표 설정으로 사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책임성 강화를 통해 효율화를 도모하는 차별적 전략이 필요하다. 1) 사업의 목표 설정 책임을 정부가 질 수 있도록 R&D 담당 부서의 전문성을 강화하여 기획의 실무를 연구자들에게 떠맡기는 관행에서 탈피해야 한다. 2) 과제 선정 및 관리 책임이 있는 연구재단의 기획 단계에서의 역할과 책임이 모호한 점도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기획에 공식적으로 지는 책임은 없이 실제로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재의 구조에서는 여러 가지 의혹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3) 사업을 수행하는 연구자의 책임성 강화를 위해 사업 진행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사업 성과를 이후 투자에 반영하는 등의 제도 개선도 필요하다. 4) 미래지향적 연구를 기획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고정 관념과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려면 새로운 개념 제시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과학기술정책을 기획하고 평가하는 기관들이 연구 현장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정책 연구와 평가를 할 수 있도록 발전해야 한다.
한편, 자율적 연구라는 게 연구자들이 편하게 연구비를 받아 제 맘대로 하는 연구가 아닌가 하는 부정적 인식도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연구 부정이나 연구비 유용 사건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서 연구자의 자율성을 높이는 사업을 확대하는 정책을 펴 나가기는 어렵다. 연구자의 자율성을 높이면서도 책임성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 방안과 함께 부정적 인식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자들의 자정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R&D에 참여하는 정부 부처, 연구 관리기관, 평가 기관, 그리고 연구자 각각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은 자율과 책임의 과학기술 혁신 생태계 조성의 핵심이다. 이런 환경이 조성되어야 연구자들은 정부가 바뀐다 해도 과학은 지속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연구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구호에 맞춘 정책 방향 제시가 아니라, 세계적 추세와 우리나라 연구력에 대한 구체적인 데이터에 근거해 과학기술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단호하게 실천해 나감으로써 문재인 정부가 R&D 20조 시대에 걸맞는 시스템을 확립한 정부로 기록되기를 기원한다.
호원경 (서울대 의대 교수)
* 위 글의 요약문은 한겨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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