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마당 오피니언
‘기초연구비 증액’과 ‘연구자주도형 과제’ 주장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
열정페이 (비회원)
과학과 연구개발은 왜 필요한가? 크게 보면 3개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이다. 1) 과학적 지식 축적, 2) 사회문제 해결, 3) 산업 발전. 어느 나라이던 이 3개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지만, 나라마다 당면한 우선 목표는 다르다.
미국이나 유럽 일부국가처럼 과학의 역사가 깊은 나라들은, 이미 과학/기술개발을 통하여 일구어낸 산업이 튼튼하며, 산업 발전을 위한 연구개발의 많은 부분은 민간(기업)의 역할이다. 따라서 국가는 기초과학 발전과 공익적 사회문제에 집중할 수 있다. 기초과학 연구 수행을 통하여 잘 훈련된 인력을 기업과 공공부문에 공급하고, 생산된 지식은 논문의 형태로 공공화하여 무상 공급하면 된다. 이것만으로도 기업과 공공연구소는 충분히 발전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기초과학이 발전한 나라가 산업이 강한 것이 아니라, 산업이 강한 나라가 기초과학을 잘 할 수 있다. 미국에서 훈련받고 귀국한 뒤, 미국의 연구개발 시스템을 동경하면서 우리나라 정부를 비판하는 분들이 많은데, 우리나라가 근본적으로 미국과는 다른 환경에 있음을 고려하지 않은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시스템을 이용하려면 미국에서 자리 잡고 연구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나라의 환경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맞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사정은 어떠한가. 바이오산업은 정부가 주도하는 지난 30여 년 투자에 의하여 이제 겨우 자리를 잡고 있다. 그간의 기초과학 투자로 발생된 가장 중요한 간접적 성과인 우수 인력은 해외시장에 빼앗겨 왔고, 창출된 지식은 공개되어 외국 산업계의 기반 지식으로 활용되어 왔을 터이다. 기초연구 자체에 대한 투입 대비 효율 역시 낮을 수밖에 없다. 훈련 중인 학생들이 연구를 수행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성과를 내기 어렵고, 학생들은 학생대로 교육보단 성과를 중시하는 체계에서 고통받고 있다. 이제 바이오는 우수한 학생이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아니며, 수입의존적인 장비와 고가의 외제 시약에 재료비도 상승하여 더욱 더 연구자를 조르고 있다.
기초과학자들의 고통과 불안감은 계속 높아져 왔고, [기초연구비 증액] [연구자주도형 과제]와 같은 연구자집단 내의 자발적인 제안이 있었으며, 현 정부는 이를 과학기술 정책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과학자들이 각성하고, 과학정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안들이 정말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해결에 기여할 것인지에 대한 종합적 고찰은 부족하다고 느껴왔다. 그래서인지, 이 제안을 주도하셨던 호원경 교수의 글에 초창기와는 달리 많은 비공감 의견이 적혀있는 것을 보고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생각을 좀 정리하여 글을 올린다.
[기초연구비 증액] 주장은 일견 좋은 대안으로 보인다. 그러나 맨 처음 언급한 과학의 3대 목표 중 기초연구를 통한 과학적 지식 축적에 어느 정도의 연구비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근거를 들어본 적은 없다. 인력은 해외로 유출되고, 성과는 범세계적인 공유 자산인 논문으로 생산되는 기초 과학 분야의 진흥이, 사회문제 해결이나 국가경제 발전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명확한 청사진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정부부처(혁신본부)가 아무리 노력해도 범정부 차원의 예산 조정 및 국회 심의 과정을 거치는 복잡한 과정 동안 어디선가 막혀, 실제 예산 증액으로 실현되기는 어렵다. 올해 정부예산안의 기초예산 증액분 상당량이 국회에서 감액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며, 앞으로도 같은 과정이 반복될 것이다. 예산공학적으로만 볼 때, 국책과제연구비를 떼어 기초연구비로 옮겨 기초연구비를 증액한 정부예산안이 만들어진 뒤, 기초과제 예산이 국회에서 감액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결국 전체 가용 연구비는 줄어들게 된다. 기초연구비와 국책연구비가 적대적이지 않고, 다수의 연구자들이 기초과제와 국책과제를 함께 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는 아주 불리한 상황이다. 정부와 국회로서는 복지 및 보건예산을 증액해야 하는 우선적인 목표가 있어서, R&D 예산은 언제든지 더 줄어들 수 있다. 기초과학이 중요함을 부인하지 않겠지만 다른 현안 대비 더 중요하다고 볼 근거가 있어야 한다. 기초연구비 증액 필요성 논리의 핵심은, 기초연구는 절대적 선이며 지고지순한 가치인데, 이를 하고자 하는 연구자가 많지만 연구비가 부족하여 말라죽게 생겼다는 것이다. 이 논리가 설득력이 있겠는가 묻고 싶다.
[연구자주도형 과제]는 더욱 더 당혹스러운 주장이다. 이 주장의 핵심은 국책 과제(주로 사회문제 해결과 산업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의 성과가 높지 않고 여러가지 비리가 있는 것 같으니 연구자가 주도하여 문제를 설정하고 해결 방안을 창의적으로 찾자는 주장이다. 일견 일리있어 보이나, 이러한 방식은 기초과제 연구비와 차별화되기 어렵다. 따라서 실질적으론 국책과제를 기초과제처럼 활용하자는 주장이 된다(즉, 기초연구비 증액 주장과 그 뿌리가 같다.). 국책 과제의 목적지향성과 성과 창출 효율성이 낮다면, 이를 어떻게 높일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초연구에 비하여,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시스템이나 실용화를 위한 인프라 등은 아직도 매우 취약한 상태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국책과제에 성공하는 것은 좋은 논문을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를 시도하는 경우에는 실패를 용인할 수밖에 없고, 도덕적 해이와 사리사욕이 끼어들 여지도 많다. 따라서 반칙이 횡행하지 않도록 체계를 돌보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기초과학 연구와 우수논문 창출은 고결하고 우월한 것이며, 실용화 연구와 공공기술 개발은 저급한 연구로 보는 풍토는 지양되어야 한다. 지난 정부의 조급한 실용화 정책은 수많은 문제가 있었으나, 바이오산업이 태동하고 있으며 기업 및 실용화 관련 연구의 지평이 확장되고 있는 지금이 생명과학 전체로 볼 때 반전을 위한 큰 기회의 시기이다.
지금은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학의 연구자가 행복하지 않아야 연구소와 기업으로 눈을 돌린다. 대학에 대부분의 인력이 밀집되어 있는 것이 기초연구비 부족의 원인이다. IMF의 쇼크로 대학에 교수자리가 생기지 않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역량있는 연구자들이 1차 벤처 붐을 일으켰고, 지금의 바이오산업 리더들이 되었다.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바이오관련 대학 교수들이 많다면, 이 숫자를 제한하거나 적어도 후학들의 TO조절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측면으로 볼 때, 지금은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점인데, [기초연구비 증액][연구자주도형 과제]와 같은 연구비 분배 문제를 핵심 아젠다로 설정해버린 것이야말로 큰 위기이다. 구조조정은 내부 역량으로 할 수 없으며, 외부의 심판자가 하는 것이다. 연구비 분배 권한은 정부가 국내 과학기술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구조조정을 진행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정책적 수단이다. 연구자들에게 칼자루를 준다면, 정부는 정책적 수단을 잃고, 연구자들은 분배 이슈에 매몰되어 서로 다투게 될 것이다. 연구자들의 자발적 운동으로 이룬 또다른 성과 중 하나는 기초연구자가 혁신본부장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정부의 유약함을 탓하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혁신본부가 힘있게 구조조정을 집행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다. 혁신본부조차도 연구현장을 혁신하지 못하고 예산분배 논리에 매몰되어 버리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맨 처음 언급한 과학의 3대 목표는 상호 보완적이다. 정부는 균형감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 하고, 과학자들은 개인적 성취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공공의 이익과 사회의 책무에 대하여 더 많이 고민하여야 한다. 좋은 논문을 내는 것 자체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므로, 당연히 세금을 받아 연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는 발상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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