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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 - 연구신청서
괴수
이 글은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인 글을 좋아하시지 않는 브릭님들은 이 글을 읽지 마시고 그냥 건너가시면 좋겠습니다. 과학재단 혹은 학술진흥재단은 일 년 간의 연구공모계획을 발표하므로, 저의 경우 공동연구를 위한 연구신청서를 쓸 때 한 달 이상 혹은 두 달전부터 준비를 합니다. 연구팀을 모으고, 서로간의 세부과제를 확인하고, 토론을 거쳐, 각자 부분을 쓰면, 취합해서 전체부분을 쓰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일주일 만에 연구신청서를 내게 되었습니다. D-8 (목요일) 미국에 연구차 방문 중인 동료 교수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에 나노분야의 연구주제로 연구계획을 내보자는 제안입니다. 허! 너도 나도 나노에 뛰어드는 것이 유행일 때도 곁눈질하지 않고 DNA만 들여다보고 있던 저에게 나노라... 정중히 거절하고, 나노전공인 교수님 한 분을 소개해드렸습니다. D-7 (금요일) 제가 소개해준 교수님들을 포함한 몇몇 젊은 교수님들께서 저를 좀 보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갑니다. 교수님들// 괴수께서 PI를 맡아주십시오. 일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괴수// 평생 DNA하던 사람이 갑자기 나노들고 나가면 다른 분들이 웃습니다. 못하겠습니다. 교수님들//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괴수님께서 연구로 명망(쥐뿔이나! 분야가 다른 데...)이 있으시니 팀 전체에 유리합니다. 2. 연구업적없이 끼려는 다른 교수님들을 괴수만 막아주실 수 있습니다. ==> 이건 사실입니다. 젊은 교수님들이 이런 연구팀을 구성하면 꼭 염치없이 끼려는 원로국물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을 지금껏 있는 힘을 다해 막아주었습니다. 뭐, 막기는 쉽습니다. 각오하고 “연구업적과 분야만 고려하겠다.”고 선언하면 됩니다. 그런데 다른 교수님들은 이게 힘든 모양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단호히 거절하지 못하는 저에게 틈이 생깁니다. 그 틈을 젊은 교수님들이 파고듭니다. 끝까지 거절... 할 수가 없습니다. 괴수// (어쩔 수 없이) 그러면 교수님들 세부분야를 주말에 완성해서 월요일까지 저에게 주십시오. 그걸 가지고 월,화요일 동안 총괄계획은 제가 작성하겠습니다. 수요일에 신청서 전체를 같이 보고 수정하겠습니다. D-6, 5 (토, 일요일) 이런 중요한 일을 하면 괴수는 (1)집에서, (2)우선 주위를 깨끗이 정돈하고야 시작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지저분한 컴의 파일들을 정리하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선 C:를 포맷시키고... 으악, 큰일 났습니다. @@ 모든 자료가 있는 D:를 포맷 해버렸습니다. 당황한 마음에 이번에는 C:의 파티션을 건드렸습니다. 컴의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급히 컴을 다시 셋업하고, 학교와 집을 오가며, 백업 해둔 자료를 다시 심고,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황당합니다. 귀중한 주말이 다 가버렸습니다. D-4 (월요일) 교수님들의 자료가 속속 도착합니다. 급히 주말동안 한 것이라 허점이 많습니다. 다시 돌려보내고 화요일까지 완성하라고 합니다. 그걸 핑계로 저의 세부과제를 쓰기 위한 귀중한 하루를 벌었습니다. D-3 (화요일) 일요일 밤부터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머리가 띵합니다. 할 수 없이 교수님들에게 최종 독회를 목요일로 연기하자고 연락합니다. 와중에 신경질이 극도에 달합니다. 늘 점심을 함께하던 선배교수님께서 전화가 옵니다. “어이, 괴수선생 밥먹으러 가지.” “아쒸, 지금 밥먹을 시간이 어디 있어요?” 쏘아붙입니다. 허허, 웃고 전화를 끊어주십니다. 대학원생들이나 연구교수님들이 저의 눈치를 보고 조심합니다. 집에서는 마눌님이 말도 못 붙입니다. 모두에게 미안합니다. 밤에 2~3시간 눈을 붙이기로 합니다. D-2 (수요일) 큰일입니다. 총괄신청서가 아직 완성되지 못했는데, 예정된 학과회의에 참석하랍니다. “ㅆㅂ, 안되는 집구석이 회의가 길고, 칠칠치 못한 ㄴ이 회의참석 많다던데...” 왜냐하면, 체력과 지력은 다하고, 일은 안되니, 외부에서 불평요인을 찾는 중입니다. 이럴수록 침착해야하는데... 신경이 있는 대로 곤두서고 예민해집니다. 소인배의 짓입니다. 오후 늦게 학교본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괴수선생님, xxx사업 연구과제 내신다면서요? 그러시면 내일 열시까지 완성본을 제출하셔야, 결재받아 오후 한 시 반에 발송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마감일(금요일)까지 도착합니다.” 드디어 폭발하고 맙니다. “아쒸, 그게 말이 돼? %$#%$ (자체검열)... 안해. 신청서 안내면 될 거 아니오. 이 짓한다고 월급 더 줘?” 하지 말아야할 막말까지 튀어나옵니다. 오늘은 연구실에서 또 밤을 새야할 것 같습니다. ㅠㅠ 새벽. 신청서를 쓰면서 끝없는 회의가 밀려옵니다. 내 분야도 아닌데... 내가 왜 이 짓을 하지? 이러지 않아도 먹고 살지 않나? 이제 좀 쉬고 싶어. 내가 논문 수백 편을 낸들 누가 알아줘? 오늘 낮에도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골프 쳤다는 그 교수, 지금 쯤 따뜻한 방에서 푹자고 있겠지? 난 뭐야? 같은 교순데... D-1 (목요일) 최종 독회는 할 시간이 없습니다. 10시까지 본부에 헉헉거리며, 신청서를 가지고 올라갑니다. 몇 장 예산부분을 들춰보던 직원의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아니, 괴수님. 숫자가 하나도 안 맞아요.” 계수맞추기... 괴수의 최대약점입니다. 무슨 예산만 세웠다하면 틀림없이 숫자에 오류가 발견됩니다. 다시 들고 오가기를 여러 번, 직원이 마침내 “괴수님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내일까지 하시고, 직접 들고 가서 접수시키시지요.” 다시 하루를 벌었습니다. 오늘도 두어 시간은 잘 수 있겠지요. D-day (금요일) 12시, 저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 연구교수 한명, 대학원생 두 명이 완성된 400쪽 분량의 신청서와 사본들을 들고 서울로 냅다 튑니다. 요즈음 같은 인터넷 시절에 학진이나 과학재단같이 인터넷으로 접수하면 될텐데... 오후에는 대학원 수업이 있습니다. “도저히 안되겠다. 오늘은 좀 쉬자.” 대학원생들에게 또 미안한 일을 저지릅니다. D+1, 2 (토, 일요일) 아무것도 하기 싫습니다. 그 좋아라하던 산이고 뭐고 그저 손가락하나 움직이기 싫습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뿌듯합니다. 다음 연구과제 신청이 언제더라? 하다가 밀어둔 논문 수정은 어떻게 되었지?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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