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들이 조작된 데이터를 내도 사실 저널은 알 방법이 없으며 논문 통과 여부는 주관적인 리뷰어 두 명 정도의 의견에 의해 결정됩니다. 수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라는 사회가 적어도 그보다 나은 대안이 없을 정도로는 그럭저럭 작동하는 이유는 상호신뢰가 저변에 있기 때문입니다.
- 적어도 데이터 조작은 안했겠지.
- 이 사람이 1저자나 교신저자면 이 연구를 주도한 사람이겠지.
- 공저자는 어느 정도의 지적 기여는 했겠지.
이러한 신뢰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굉장히 복잡해지고 비효율적이 됩니다. 다행히도 전세계적으로 볼 때 현재는 적어도 학계가 무너질 정도로 신뢰가 무너져 있지 않습니다. 여하튼 학계에서 가장 존중받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경하고 존중할 정도의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죠.
그런데 유독 한국 학계는 문화가 후진적이어서 저런 신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데이터 조작? 빈번한데다 처벌도 잘 안 받습니다. 선물 저자, 유령 저자... 문제가 아주 심각하지만 처벌은 뜨뜻미지근합니다.
한국에서 노벨상을 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학계의 문화의 후진성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한 자리에서 꾸준히 연구하는 사람보다는 정치질을 하면서 여기저기 정량 실적 만들어내는 사람이 생존 확률이 높고 그런 사람들이 결국 목소리를 내고 결정하는 자리에 가서 영향력을 미치죠. 이런 나라에서 노벨상을 어떻게 받습니까?
데이터 조작이나 저자 문제 등이 외국에서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사실 비리와 불공정을 사회에서 뿌리뽑는다는건 불가능합니다. 그런 위업을 달성한 사회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선진 사회가 후진 사회와 다른 것은 적어도 비리와 불공정이 적발될 경우 최대한 철저히 파헤쳐서 불이익을 준다는 것입니다. 비리와 불공정은 살인 등 강력 범죄와는 다르게 감정이 아니라 계산 하에 이성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비리와 불공정으로 얻는 이득은 큰데 걸릴 확률도 낮고 걸려도 처벌이 미미하다? 자기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라면 그래도 자기 존엄을 지키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이 승리하고 생존할 수밖에 없게 되므로 사회는 "진화론적"으로 비리와 불공정이 팽배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보다 월등한 학계 문화를 지닌 미국에서 공부하신 분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면 왜 문화는 수입해오지 않고 한국처럼 후진적으로 일할까요. 간단합니다. "그래도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러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자기 존엄을 지키려는 연구자들은 학계에서 일어나는 비리와 불공정에 대해서 철저히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비리와 불공정이 철저한 불이익으로 이어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좌와 우가 없습니다.
학계의 근본적인 기반을 뒤흔드는 행위에 학자들이 목소리를 내지 않거나, 혹은 심지어 목소리를 내지 말게끔 한다면 학계는 누가 지키겠습니까? 내 분야 논문이 아니더라도 그렇습니다. 학계는 결국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고 특히 연구윤리는 큰 틀에서는 대동소이하기에 특정 분야에서의 윤리의식 저하는 머지 않아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미치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