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만사 인터뷰 구. 브만사
한타바이러스 발견과 백신 개발
대한학술원 이호왕 회장
- 대한민국학술원 소개
- 일본뇌염 백신개발 연구
- 유행성출혈열 연구로 전환
- 한타바이러스 발견
- 한타바이러스 백신 개발
- 연구자로서 타고난 사람?
- 한타바이러스 연구에서 어려웠던 점
- 나의 연구성공 비결
- 한타바이러스 국제적인 동향
일시: 2003년 9월 19일, 오후 2:00
장소: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실
대한민국학술원의 소개(역할)
대한민국학술원은 우리나라 학술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원로학자를 모시고 학술연구와 학술진흥에 관한 정책 자문역할과 국내 외 학술 교류를 위한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학술발전에 이바지 하기 위하여 현재 정부 지원으로 운영되는 학술원이다. 학술원 회원은 인문사회과학분야에 75명, 자연과학분야에 75명으로 총 150명으로 구성되며, 각 분야에서 한 두 사람 밖에 뽑지를 않기 때문에 학술원 회원이 되는 것은 훈장이나 상 받는 것 보다 훨씬 더 힘든다.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학자로서 영광스럽고 부러운 자리다.
전염병연구를 시작한 계기
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연구할 때 목적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 자기의 상상력에 기초하여 출발하는 것도 있지만 사회가 필요로하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서 연구과제를 선정하는 경우가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에 많은 "전염병 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일본뇌염 백신개발 연구를 시작
1954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55년 미국에서 연구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는 일본 뇌염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무서운 병이었다. 일년에 6000-8000명 발생하고 3000-4000 여명이 죽었다. 뇌염은 대부분 어린아이들이 희생되는데 병이 걸렸다가 낫는다고 해도 뇌에 후유증이 남아 기억력이 나빠지고 공부도 못하고 잘 걷지도 못하는 무서운 병이다.
미국에서 그 연구를 시작해서 1959년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일본뇌염 연구를 계속하게되었다. 그러다 일본에서 60년도 중반에 일본뇌염 백신이 개발되고 60년도 말에 백신 접종이 되면서 환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일본 뇌염은 이제 극복이 된 것이다. 나는 65년부터 미국 NIH에서 연구비를 받아 69년까지 5년 동안 일본뇌염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일본뇌염 백신 개발되면서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아야만 했다.
유행성출혈열연구를 시작한 계기
연구주제를 바꾸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연구제목을 그때그때에 잘 잡아서 시대 요구에 맞게 바꿔야 한다. 일생을 한 연구 주제로 연구하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그러나 전염병 같은 경우는 AIDS, SARS 등 옛날에 없던 병이 발생하게되고 연구도 이런 흐름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연구비도 얻을 수 있다. 세상이 바뀌고 환경과 생태계가 바뀌면 병도 바뀐다. 그래서 일본 뇌염연구를 69년에 그만두고 유행성출혈열로 바꾸었다. 두 병은 전혀 다르다. 유행성 출혈열은 아직 원인도 모르고 있던 시기였다. 연구비도 당연히 미국에서 얻어야만 했다.
당시 군인에게서 발생하던 유행성 출혈열이 민간인에게도 발생하기 시작했고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에서도 유행성 출혈열 환자가 많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국익에도 맞고 우리나라 국익에도 맞는 연구주제였다.
유행성출혈열(신증후군 출혈열)의 원인인 한타바이러스 발견과정
1969년 내가 유행성 출혈열 연구를 시작하기 이전에 이 연구를 하던 과학자가 많았다. 30년대 말과 40년대 초반에 이병은 만주와 러시아에 있었다. 러시아군과 일본군에 만여명의 환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일본의 731분대에서 이 병을 인체실험을 한 역사가 있고, 러시아에서는 형무소 제수들을 상대로 인체 실험을 하였다. 병을 일으키는데는 성공했지만 병원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다 한국 전쟁에서 철원, 포천, 김학 이 지역의 미군 3000명이 유행성 출혈열에 걸려 폭발적으로 발생 환자가 늘어났다. 당시 일부에서는 괴질이거나 러시아군의 세균전이라는 의심도 하였다. 당시 병명을 외국에선 "한국형출혈열"이라고 불렀다. 미국에서 노벨상을 받은 2명의 박사를 포함한 230여명의 연구자를 한국으로 데려와서 연구를 시작하였고 재료를 미국으로 가지고 가서도 연구를 했는데 15년 동안 병원체를 찾지 못했다(1952~1967). 결국 미지의 연구로 남겨놓고 포기를 했다.
그때 내가 그 연구에 뛰어든 것이다. 남들이 하던 연구를 조사를 해보니 원숭이와 침팬지까지 미국에서 공수해와서 실험에 써도 사람밖에 이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험동물이 없다는 의미였다.
처음에는 연구비를 타기 위해서 병원체를 발견한다는 계획서를 전부 써서냈다. 우리말이라면 쉬운데 영어로 쓴다는 것이 참 어려웠다. 이 계획서가 워싱턴에 가서 외국 사람들과 경쟁을 해서 아주 어려운 심사를 거쳤다. 그렇게해서 결국 연구비를 받아 연구를 시작하였다.
연구시작하고 처음 5년 동안 실패만 계속했다. 유행성출혈열이 아닌 다른 바이러스는 몇 개 찾았지만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바이러스였다.그래서 마지막이란 기대로 당시 새로나온 기술인 "형광항체법"을 이용해 보기로 하였다. 60년대 말에 새로 나온 기술이었다. 5년 동안 연구한 결과 회복기 환자에게는 급성환자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gamma globulin , IgG, IgM 이라는 항체가 대량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항체에 대한 특이한 항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회복기 환자의 혈액 속의 gamma globulin 을 토끼나 면양에 주사해서 anti-gamma globulin -antibody을 만들고 이것에 형광색소를 붙였다. 이것으로 병원체를 찾기 시작하였다. 한 2년에 걸쳐 찾다가 우연히 쥐의 폐(lung)에서 특수한 Antigen을 발견한 것이다. 이때가 1975년 겨울이었고 1976년에 발표하였다.
유행성출혈열은 야외에서 활동하는 군인과 농민이 많이 걸리는 병이었고, 쥐와 접촉한 사람이 이병에 걸리는 것으로부터 쥐가 병원균을 옮기는 역할을 할 것이란 것은 이미 1930년대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우리 채집원 중 한 사람이 동두천 송내리에서 쥐를 잡으러 갔다가 이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는데, 이때 잡은 쥐가 등줄쥐였다. 우리나라 쥐의 90% 정도가 이 종류인데, 이 등줄쥐를 2000-3000 마리를 잡았을 거다. 이것을 하나하나 조사해서 폐에서 특이한 항원을 찾아낸 것이다. 이 항원이 0.2㎕ filter를 통과하는 것으로부터 세균이 아니라 바이러스일 가능성을 주었다.
그때까지 알려진 500여종의 바이러스와 비교를 해보고 외국에 보내서도 검사를 하였다. 우리가 찾은 이 바이러스가 전혀 새로운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한 4년이 걸렸다. 그래서 이름을 붙이게 되었는데 한탄강의 이름을 따서 "한타바이러스(Hantavirus)"라고 명명했다.
바이러스 백신 발견 과정
바이러스 병원체를 가지고 있으면 그 바이러스를 가지고 진단방법을 만들 수가 있다. 1976년에서 84년까지는 세계에서 우리만이 한타바이러스를 진단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병원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논문이 나가도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응용하려면 3-4년은 걸리게 된다. 서울은 그 당시 한타바이러스의 메카(mecca)가 되었다.
이때 문제가 된 것이 함께 연구하던 연구원 8명이 유행성 출혈열에 걸렸다. 야외에서 채집하던 사람이 2명, 실험실에서 바이러스 분리하고 조직배양하던 과정에 연구원 6명이 걸렸다.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치료약이 없으니 백식을 개발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하는 사람을 면역 시켜서 안전하게 연구할 수 있게 연구 환경을 만들어줄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 뇌염 백신을 만들던 나의 경험이 있었기에 한타바이러스 예방백신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게 되었다. 1981년에 백신 개발연구를 시작해서 89년에 특허를 내고 90년에 임상실험을 끝내고 91년에 백신이 시판되었다.
세계에서 병원체를 발견하고 그 병원체 진단법을 개발하고 또 그 바이러스를 가지고 예방 백신을 만든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나의 유전자는 연구에 타고난 유전자?
나는 DNA를 굉장히 강조 한다. 사람이 타고난 유전자가 인격 형성이나 공부하고 연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타고난 소질이 없으면 그 분야에서 대성을 못하듯이 성격도 이렇게 타고나는 것이 있다. 나는 연구에 맞게 성격을 잘 타고 난 것이라고 본다. 무엇 하나 하고자하는 것이 있으면 그 일에 몰두를 해서 계속 집중하는 성격이다. 내가 다른 연구원도 데리고 있으면서 보니까 조금하다 싫으면 안하는 것 연구원도 있는 것 같았다. 실패해도 또 하고 또 하고 그래야 하는데 이걸 타고 나야한다. 싫증이 안나야 한다. 내 유전자는 실패를 해도 싫다는 생각이 안나고 피곤하지도 않는 유전자인 것 같다. 내가 연구자로서 성공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유전자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구를 했던 것이다.
한타바이러스 연구의 국제적인 동향
이전에 중국, 러시아, 유럽 등에서 발병한 유행성출혈열에 관한 원인은 이미 알려졌고 치료와 대책은 수립이 되었다. 하지만 1994년에 미국에서 발생한 괴질의 원인이 새로운 한타바이러스로 판명이 되면서 다시 한타바이러스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AIDS와 SARS도 그렇듯이 이전에는 없는 새로운 바이러스로 인한 NEW Emersing Disease 가 나타난 것이다. 이전의 우리나라의 유행성 출혈열 사망률은 고작 5-7% 밖에 안되는 반면 새로 미국에서 발생한 병은 사망률이 60% 이다. 이것을 'Hantavirus Pulmonary Syndrom' 이라고 한다. 이것은 폐렴을 일으키고 일주일이내에 죽는 등 임상증상도 우리나라의 유행성출혈열과 좀 다르다.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캐나다, 남미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 인터뷰 내용 >
- 연구자로서 성공 비결
- 유능한 연구자는?
- 연구할때 어려웠던 점
- 바이러스학자가 된 사연
- 원로 학자에 대한 대우
- 아쉬운 점
- 젊은 과학자에게
- 우리나라 과학정책에 바란다
일시: 2003년 9월 19일, 오후 2:00
장소: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실
나의 성공 비결
첫째는 사회가 필요로하고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시대적인 요구에 맞춰서 연구 주제를 잡았다. 둘째는 영어로 연구 계획서를 조직적으로 잘 쓰는 능력이 있었다고 본다. 이것이 미국의 NIH에서 심사하는 사람들이 보고 심한 경쟁 속에서도 연구비를 탈수 있었던 비결이다. 그리고 사람을 쓰는데 있어 조직을 구성하는 머리가 좀 있다고 본다. 연구원 능력에 맞춰 연구주제를 주고 문제가 있을 경우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유능한 연구자란
꿈만 꾸는 과학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아이디어뿐 아니라 연구비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연구비가 없으면 연구를 못한다. 또 연구비를 받았다고 혼자 독불장군 같이 해서는 안되고 함께 연구를 해야 한다. 같이 일할 사람을 잘 다스리고 화목하게 공동연구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연구할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연구 계획서를 쓰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몇 달 동안 앉아서 머리를 쥐어짜야하고 또 영어로 써야 하니 관련 외국 문헌을 전부 다 조사 해야한다. 일단 연구비를 받으면 일년에 한 두 번은 꼭 보고서를 내는데 이게 보통 머리 아픈 일이 아니다. 연구 결과가 재대로 나오지 않아도 보고서는 써야한다. 그래서 10월쯤이면 연말 보고서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아내가 "당신 보고서 쓰는 때가 되었지요?"라고 알아 챌 정도였다. 그 일을 30년 동안 했다. 20년 정도 연구비를 받았을 즈음, 스트레스로 인한 '갑상선기능항진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힘든일은 연구원들 중에서 환자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제일 힘들었다.
의과대학 공부를 하고 바이러스학자가 된 사연?
1954년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했는데, 나는 처음부터 대학교수보다는 내과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6.25 직후라서 전염병(뇌염, 천연두 등) 환자가 너무 많았기때문에 내과의사가 환자를 보기위해서는 전염병을 모르면 안되었다. 그래서 미생물 공부를 하고 내과의사가 되면 좋겠다 싶어서 미생물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미생물학 교실의 조교로 1년 반 있으니 의과대학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줬다.서울대학과 미네소타 대학의 교환 교수 프로그램으로 가게 된 것이다. 미국에 가서 만난 지도교수가 바이러스 학자였다.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일본뇌염에 관한 석사졸업논문을 쓰게 되면서 바이러스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거기서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왔으니 무조건 바이러스학 교수가 되었고 다시 내과의사가 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대학에서 보내준 유학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원로학자 예우에 대한 의견
옛날에는 우리나라가 잘살지 못해서 여유가 없어 원로과학자에 대한 예우를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정부의 지원과 함께 우리 자체 노력으로 연구재단을 만들어 모금을 해서 회원들의 연구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아쉬운 점?
처음 연구를 시작할 땐 대개 기초연구를 먼저 시작한다. 그리고 연구가 진행되면서 Applied Science 가 되는데 사회에 직접 기여를 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예방주사를 만들거나 약을 만들어 국민의 건강 복지 향상에 기여를 경우가 그러하다. 나도 이런 길을 걸은 거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우리나라에 생긴 문제중 하나가 서로에게 "너무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서로 사기를 북돋아 주고 밀어주기보다는 헐뜯는 것이 많다.
우리나라에 백신 만드는 회사가 몇 개 있었는데 최근에 와서는 백신을 거의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외국회사로 모두 넘어가버렸다. 일부 학자들이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백신을 너무 헐뜯으니 국내 회사에서는 피곤해서 손을 들어버렸다. 결국 외국회사로 기술이 넘어가버렸다. 백신 연구개발에는 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물건 팔아 돈을 벌려는 외국기업은 R&D에는 투자를 하지 않게 된다. 한국 사람 손으로 R&D 가 만들어져야 하고 새로운 기술이 나와야 우리나라가 발전하게 된다. 지금은 우리나라에는 백신 개발하는 사람도 없고 관련 종사자도 없게 되었다.
재작년에 인도, 중국에서 수입한 백신에서 부작용이 발생한 일이 있었다. 그런 국가에서 만든 백신은 사용을 하면서 우리손으로 만든것에는 너무 비판을 했었다. 우리가 만들면 더 잘 만들 수 있는데 참 안타깝다.
1994년에 아시아와 유럽에서 발생하는 2 종류의 유행성출혈열을 동시에 예방할 수 있는 혼합백신을 개발해서 특허까지 획득했었다. 이 백신을 녹십자에서 생산하기 위해 3년 동안 추진하다 회사가 외국 회사로 넘어가면서 중단되어버렸다. 한국 회사가 없어져버리니까 한국 사람이 개발한 것은 외국 사람들이 써 주지를 않게 되었다.
과학자를 희망하는 학생들이나 젊은 과학자에게
자신의 장점을 잘 파악해서 자신의 길을 잘 설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설정을 하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가도록 해야 한다. 자신의 취미와 맞는 일이라면 이런 경우는 가능하리라 본다. 연구자로서 대성을 하려면, 아이디어와 실천력도 중요하지만 연구비를 얻을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엔 연구를 하는 사람을 잘 다뤄서 훌륭한 업적을 이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과학발전을 위해서 정부의 역할
무슨 연구이든 기초과학이 중요하다. 정부가 과학자를 우대하고 기초 분야 연구에 지속적인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의학에서 중요한 X-ray나 MRA 도 모두 기초연구에서 나온 것이다.
기자 장영옥
촬영 김수정
동영상 편집 유숙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