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모님과 부모님이 공무원 교육자였던 나는 자연스럽게 안정적인 공무원에 대해 한번쯤은 권유받았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안정적인 직업보다 실컷 모험을 하며 인생을 즐기고 싶었다. 그에 걸맞게 나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직접 해 보아야 했고, 보수적인 부모님의 눈을 피해, 하고 싶은 것들을 즐기며 살았다고 자부했다. 그렇게 자유롭고 싶었던 나는 후회 없이 놀만큼 놀아 봤고, 공부할 만큼 해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무엇이 되었는가? 한 치 앞의 미래를 걱정하는 과학자가 되었다.
과학자란 본디 실험을 하고 발견을 하는 사람이다. 그 자체를 즐기며 꾸준히 하다 보면 돈과 명예를 결정할 나의 직업은 안정적일 줄 알았다. 현실 물정 모르던 젊은 과학자의 최후인 것이다. 즐기면 무엇하는가, 논문이 없으면 연구비가 따르지 않는 것을. 꾸준히 하면 무엇하는가 멈출 능력이 없는 경주마취급 당하는 것을. 그 와중에 보스의 동의 없이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과학자에게도 쉼표가 필요하다] 시즌1에서 나는 실험을 하는 bench work에 고단함을 토로했고 그리하여 비슷한 연봉을 받고 과학자로서의 경험까지 필요로 하는 각종 재택근무 직종의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해 보았다. 물론 자리에 앉아 회의하고 모니터나 종이를 들여다보는 것은 내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7일 중 7일을 나가야 하는 일보다는 나을 것이라 생각했고, 심지어 안정적이면서도 그런 자리가 있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어떤 준비를 하면 될지 수료증을 받는 수업도 들어 보았고, 많이는 아니지만 이력서도 넣어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모든 재택 근무자들은 사무실로 복귀하라는… 앗... 사무실에 어차피 모두 매일 나가야 한다면 나는 그냥 하던 몸빵으로 실험을 계속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나와 잘 맞을지도 모를 새로운 일을 배우며 부딪히고 깨지는 것보다 원래 좋아하고 잘하던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당연히 편했기에. 그렇게 고민거리 하나가 줄었지만 그를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시간 쏟았던 것들이 모두 허무했다.
또 주변에서 새롭게 신규 채용된 직원들을 정리 해고해 무더기로 잘려 나가는 일들을 보며, 그동안 직업 찾기를 게을리하던 나 자신을 탓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 사이 직장을 옮겼더라면 오히려 신규여서 갑자기 잘렸을 아찔한 상황을 상상하며 위로했다. 요즘 미국 정부는 심지어 과학/보건 분야를 포함한 연방 공무원의 해고를 무차별적으로 하고 있고, 남의 나라 일 뿐만은 아닐 수도 있으니 이런 일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이 달라졌다. 과학 발전의 본질인, 연구를 직접 해야 하는 bench work이 차라리 안정적인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몇 년의 고심 끝에 원점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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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10년, 유럽권에서 10년 살아보고 싶다는 젊은 나의 모험심은 각종 현실적인 문제에 나이가 들어갈수록 확연히 줄어들었고, 부양 자녀가 생기고는 자식에게 짐이 될 수 없다며 은퇴 자금 때문이라도 어느 한 나라에 정착해야 했고, 그렇게 연봉이 작더라도 안정된 직업을 찾던 나는, 어렸을 적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나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는 안정적인 것이 최고라던 부모님 말씀이 맞았다는 사실을, 실컷 20년을 파이펫질 하다 남들보다도 더 뒤늦게 깨달아 버렸던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했던가. 동의하지도 않은 다른 사람의 지시를 따르기보다 나의 뜻대로 연구하고 싶어 박사를 했으나, 이젠 누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더 편했다. 어차피 매번 바꿔야 하는 가설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부지런한 근성은 있지만 사업을 할 만한 뛰어난 재능이나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일확천금도 싫어하던 나는, 언젠가부터 로또를 사고 싶어 했고 그 어떤 것도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두려움에 막막한 하루하루가 사실은 노력을 해도 안 되는 일이 될 까봐 더더욱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즐길 수 없게 되고 불안정하다 느껴지고 나니, 더욱더 안정적인 것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공무원도 무더기로 잘리는 마당에 안정적인 직업은 있긴 한 것인가? 몇 년 전 안정적이라 생각했던 직업은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불안정해졌고, 어제는 안정적이었던 직업이 대통령이 바뀌고 불안정해졌고, 똑같이 오늘 안정한 것처럼 보이는 직업은 AI 시대를 맞이하며 또다시 변화를 겪겠지.
생각해 보니 내가 번아웃이 온 이후로 나는 일을 즐길 수가 없었고, 스스로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지금의 자리가 더욱 불안정하게 느껴졌다. 물론 실제로 계약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도 한몫 했겠지만, 이전의 나라면 새 직업을 구하는 일도 지금의 일도 열심히 하고 어떤 일이 주어지든 또 즐기면서 했을 터, 지금은 아무런 의지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20년 가까이해 온 현재의 일이 불안하니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도 더 커져만 갔고,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약 만료 날까지 하루씩 카운트하며 더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힘든 일은 언제쯤이 되면 끝나냐는 나의 물음에 부모님이 말해준 적이 있었다. 우리의 내일은 항상 오늘보다 더 힘든 일만 남았다고. 사실이 그러했다. 학생 때는 안 해도 되던 걱정거리들이 일을 하며 시작되었고, 결혼하고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가정사가 생겼고, 아이가 생기고는 상상 못 했던 만큼의 정신적/육체적 노동을 맞닥뜨려야 했고, 이제는 주변 지인 부모님들의 부고 소식을 들으며 앞으로 더 힘든 일도 있겠구나 마음먹게 되었다. 그래서 공부가 제일 쉬운 것이라는 어른들의 이야기도, 나이 마흔이 다 되어서야 깨달았다. 사실 그때그때의 나이와 상황에 맞게 힘든 일은 항상 있었다. 늘 그 시기에 겪는 어려움들이 있지만 그 수위는 점차 고차원이 되었고, 나의 의지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까지 한꺼번에 닥쳐왔다. 사람은 누구나 이겨낼 수 있는 만큼의 어려움만 주어진다고 했지만, 번아웃과 우울증이 온 나는 매번 아무도 없는 곳에 숨고만 싶었다.
사실 이토록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영원히 안정된 직업이란 없고, 어떤 직업도 하다 보면 어려움과 불안함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나를 필요로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직업만 있을 뿐인데 말이다.
직업이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라고 위키피디아에서는 정의한다. 그런데 나는 나의 직업을 내가 꿈꾸던 이상이나 자아상과 동일시하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것만이 최선인 줄 알았고, 그렇지 않으면 월급 루팡이라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일에서 성과가 뒤 따르지 않으면 그저 실패한 삶 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나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만큼이면 되는 것이었다. 나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에만 종사하여도 되는 것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지 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는 고용주가 알아서 결정한다. 그러니 시도도 해보지 않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 혹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단정 짓지 말자. 또 뼈를 묻을 각오나 하루 12시간이라도 일하고자 하는 각오 따위 필요 없다. 그런 어리석은 생각이 나를 번아웃 시켜,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오히려 나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우리는 모두 안정과 불안정 그 사이 어딘가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나 또한 이겨내야 하는 문제이지만 당신에게도 묻고 싶었다. 무엇이 안정된 직업이고 무엇이 불안정한 직업인가? 과학자인 당신은 안정적이다 생각하는가? 사실 이 또한 나의 마음 가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늘 불안하다. 계약 기간은 끝나가고 이런 마음으로 어디 새로 취업이 되겠냐마는, 나는 다시 한번 나를 믿어본다. 이 참에 이직이 안되면 그토록 소망하던 쉬는 기간을 갖는 것도 좋겠지만, 이제껏 일복 터진 나의 인생에 쉼 이란 허락되지 않았던 것을 말이다.
그러니 나와 함께 노력해 보자.
끊임없이 안정을 찾는 자의 마음은 불안정할 것이고, 불안정을 개의치 않는 자의 마음은 안정적일 것이다.
*본 원고는 지극히 개인적인 불만과 위로이므로, 공감이나 또 다른 경험과 의견을 함께 댓글로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