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연구의 이상과 현실 ③ — 데이터는 누구의 것인가
공동연구에서 가장 예민한 순간은 언제일까요.
제 경험을 떠올려 보면 가장 예민한 순간은 실험이 실패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데이터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실험이 실패했을 때는 모두가 어느 정도 문제를 공유합니다. 조건이 맞지 않았거나, 샘플 상태가 좋지 않았거나, 프로토콜을 다시 조정해야 한다는 식으로 원인을 찾아가면 됩니다. 물론 그 과정도 쉽지는 않지만, 적어도 실패한 데이터는 모두에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하지만 데이터가 어느 정도 나오고, 그것이 논문이나 보고서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면 상황은 조금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데이터는 단순한 결괏값이 아니라, 연구의 방향을 결정하는 근거가 되고, 논문의 스토리를 지탱하는 재료가 되며, 각 연구실의 기여도를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이 데이터는 누가 만든 것인가."
"누가 해석할 수 있는가."
"누가 이 데이터를 대표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가."
데이터는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단독 연구에서는 데이터의 흐름이 비교적 명확합니다. 물론 한 연구실 안에서도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지만, 대체로 실험 기획, 샘플 준비, 실험 수행, 분석, 해석이 같은 연구실 안에서 이어집니다. 누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맥락에서 데이터가 나왔는지 서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공동연구에서는 이 흐름이 여러 연구실 사이로 나뉩니다.
A 연구실에서 소재를 만들고, B 연구실에서 세포 실험을 하고, C 연구실에서 동물 실험을 진행하고, D 연구실에서 이미징이나 분석을 맡는 식입니다. 각자의 전문성이 잘 결합된 이상적인 구조이기도 하지요.
문제는 데이터가 이렇게 여러 사람과 여러 기관을 거쳐 만들어질 때, 그 데이터의 의미도 함께 흩어진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A 연구실이 만든 샘플을 B 연구실이 세포에 처리했다고 해보겠습니다. 실험 결과가 좋게 나오면 A 연구실은 자신들이 만든 샘플의 성능이 입증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 B 연구실은 자신들이 세팅한 실험 조건과 분석 방식이 결과를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샘플이 없었다면 데이터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실험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면 그 샘플의 효과도 확인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데 논문을 쓸 때는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이 결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각 연구실의 관점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어떤 연구실은 소재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싶어 하고, 어떤 연구실은 생물학적 기전을 강조하고 싶어 합니다. 어떤 연구실은 응용 가능성을 크게 쓰고 싶어 하고, 어떤 연구실은 데이터가 아직 조심스럽다고 말합니다. 같은 데이터를 보고도 각자가 보고 싶은 이야기가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 공동연구에서 데이터는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실험 조건, 연구실의 이해관계, 논문의 방향, 그리고 각자의 기여도에 대한 민감한 문제들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데이터를 만든 사람과 데이터를 해석하는 사람
공동연구에서 자주 생기는 갈등 중 하나는 데이터를 생산한 사람과 데이터를 해석하는 사람이 다를 때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실험을 직접 한 사람은 데이터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조건에서 세포 상태가 좋았는지, 어떤 샘플은 다루기 어려웠는지, 어느 날의 실험은 배지가 조금 달랐는지, 현미경 이미지를 찍을 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같은 세부적인 맥락을 기억합니다. 이러한 정보는 논문 그림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데이터를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는 부분입니다.
반면 데이터를 받아서 보는 사람은 결과의 형태를 먼저 봅니다. 그래프가 유의미한지, 이미지가 예쁜지, 논문 스토리에 잘 들어맞는지, 기존 가설을 지지하는지에 집중하게 됩니다. 연구는 결국 개별 실험을 넘어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역시 필요한 관점입니다.
문제는 이 두 관점 사이의 간격이 충분히 조율되지 않을 때 생깁니다.
실험자는 “이 데이터는 조건이 조금 불안정해서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결과가 잘 나왔으니 핵심 데이터로 쓰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실험자는 데이터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하는데, 논문을 정리하는 쪽에서는 “스토리 흐름상 부가 데이터로 넣자”라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갈등의 핵심은 단순히 의견 차이가 아닙니다.
데이터에 대한 거리감의 차이입니다.
직접 손으로 실험한 사람에게 데이터는 실패한 조건, 반복한 실험, 기다린 시간, 걱정했던 순간들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데이터가 너무 쉽게 해석되거나, 너무 쉽게 제외되거나, 너무 단순한 문장으로 소비될 때 묘한 허탈감이 듭니다.
“이게 그렇게 간단한 결과가 아닌데.”
“이 데이터를 만들기까지 과정이 있었는데.”
“왜 이 해석이 내 손을 떠난 것 같지?”
공동연구에서 데이터 갈등은 바로 이런 감정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Raw data를 어디까지 공유해야 하는가
또 하나의 민감한 문제는 raw data입니다.
공동연구를 하다 보면 상대 연구실에서 “raw data도 공유해 줄 수 있나요?”라는 요청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물론 과학적으로 투명한 검증과 재분석을 위해 raw data 공유는 필요합니다. 특히 공동 논문을 준비하는 경우라면, 결과의 신뢰성을 함께 확인하는 과정은 당연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연구자 입장에서 괜히 꺼려지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raw data는 단순한 파일 묶음이 아니라, 실험자의 노동이 가장 직접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정리된 figure는 논문을 위한 결과물이지만, raw data에는 실패한 well, 제외한 이미지, 조건을 바꿔가며 얻은 수많은 중간 결과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어떤 파일을 어떻게 정리했는지, 무엇을 제외했고 왜 제외했는지에 대한 판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raw data를 공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파일을 보내는 일이 아닙니다.
내 실험의 전체 과정을 다른 사람에게 열어 보이는 일에 가깝습니다.
물론 이것이 불편하다고 해서 공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동 연구일수록 데이터 공유 기준은 더 명확해야 합니다. 문제는 공유 자체가 아니라, 공유 방식이 사전에 정해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 데이터를 공유할 것인지.
분석 전 원자료와 정리된 자료를 어디까지 공유할 것인지.
공유된 데이터를 누가 다시 분석할 수 있는지.
재분석 결과를 논문에 반영할 때 원 실험자와 어떻게 논의할 것인지.
이런 기준 없이 “일단 보내주세요”라는 방식으로 데이터가 오가면, 나중에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기 쉽습니다. 데이터를 제공한 사람은 자신의 맥락이 지워졌다고 느끼고, 데이터를 받은 사람은 분석 권한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양쪽 모두 악의가 없더라도 갈등이 생길 요지가 있습니다.
데이터 공유에도 약속이 필요하다
공동연구에서 데이터 공유는 신뢰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데이터를 공유하지 않으면 협업이 어렵고, 데이터를 아무 기준 없이 공유하면 또 다른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유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 공유할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 데이터 공유 방식에 대해 미리 합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raw data는 어떤 폴더 구조로 정리할 것인지, 분석된 데이터와 원자료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 figure로 가공된 자료를 사용할 때는 원 실험자에게 확인을 받을 것인지, 다른 연구실에서 재분석을 진행할 경우 그 결과를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 등을 정해두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 공동연구에서 이런 기준을 처음부터 완벽하게 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연구가 진행되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데이터가 나오기도 하고, 처음 계획과 다르게 실험 방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원칙은 필요합니다. 데이터는 연구실 간에 오가는 자료이기 이전에, 누군가가 직접 시간을 들여 만든 연구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데이터를 만든 사람의 맥락이 함께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프 하나, 이미지 하나만 공유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조건에서 얻어진 결과인지, 반복 실험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해석할 때 조심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함께 전달되어야 합니다.
공동연구에서 데이터가 제대로 공유된다는 것은 단순히 파일이 전달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데이터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맥락까지 함께 전달되었다는 뜻입니다.
데이터는 숫자이지만, 동시에 관계이기도 하다
공동연구에서 데이터는 숫자와 이미지로 남습니다. 그래프의 막대, 현미경 사진의 형광 신호, 통계값과 p-value, 엑셀 파일 안의 수많은 숫자들. 겉으로 보면 데이터는 매우 객관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데이터가 만들어지고, 공유되고, 해석되는 과정은 완전히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데이터는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고, 사람의 판단을 거쳐 정리되며, 사람의 언어를 통해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공동연구에서 데이터는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관계의 일부가 됩니다.
어떤 데이터가 먼저 공유되는지, 누가 그 데이터를 해석하는지, 누가 그 데이터를 논문 안에서 설명하는지에 따라 연구실 간 관계와 기여도의 감각도 달라집니다.
데이터를 만든 사람은 자신의 노동이 충분히 이해되기를 바랍니다. 데이터를 받은 사람은 연구 전체의 흐름 안에서 그 결과를 잘 활용하고 싶어 합니다. 논문을 쓰는 사람은 데이터가 하나의 스토리로 정리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입장은 나름대로 타당합니다. 문제는 이 타당한 입장들이 서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을 때 발생합니다.
결국 공동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데이터를 소유물처럼 붙잡는 것도, 아무 맥락 없이 모두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데이터를 만든 사람의 노동과 데이터를 함께 사용하는 사람들의 책임을 동시에 인정하는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연구에서 데이터가 누구의 것인지에 대한 답을 하나로 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연구의 데이터는 한 사람만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 사람의 실험과 판단이 겹쳐진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데이터는 숫자이지만, 동시에 관계이기도 하기에, 그 관계를 함부로 지우지 않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다루어야 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데이터 해석의 문제가 어떻게 저자 순서와 연결되는지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누가 데이터를 만들었는가, 누가 분석했는가, 누가 논문의 스토리를 완성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누가 이 연구를 대표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공동연구에서 가장 민감하지만 피할 수 없는 저자 순서의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