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서 의료산업 현장까지] 의료기기 산업, 나는 어떤 부서에서 일하게 될까?
연구자를 위한 의료기기 시장 이야기
생명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산업으로 눈을 돌릴 때, 제약회사나 바이오벤처는 그래도 어렴풋이 그림이 그려진다. 그런데 의료기기 회사는 막상 들어가 보기 전까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잘 안 잡힌다. 나도 그랬다. 진단키트 만드는 회사인지, 영상장비 파는 회사인지, 소프트웨어 회사인지 뭉뚱그려 '의료기기'라고 부르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면 하는 일이 천차만별이다.
처음 이 업계에 들어와서 가장 크게 깨달은 건, 의료기기는 기술만 좋아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정교한 진단 플랫폼을 만들어도 식약처 허가를 못 받으면 시장에 내놓을 수조차 없고, 어렵게 허가를 받아도 '병원에서 이걸로 환자한테 돈을 청구할 수 있느냐', 급여·비급여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매출은 0이다.
그래서 이 산업에서는 연구·규제·시장이 서로 손을 잡지 않으면 제품이 한 발짝도 못 나간다. 회사에 들어간다는 건 연구직이냐 영업직이냐를 고르는 게 아니라, 이 길게 얽힌 사슬의 어느 지점에 설 것인가를 정하는 일에 가깝다.
이번 연재에서는 의료기기 회사에 보통 어떤 부서들이 있고, 그 안의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그 일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디로 뻗어 나가는지를 풀어보려 한다. 각자의 연구 경험이 어느 자리에 어울릴지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1. 연구개발(R&D)
대학원 석사 및 박사 과정을 거치는 동안 가장 익숙한 직군 일 것이다. 연구개발은 새로운 진단 플랫폼이나 시약, 알고리즘, 디바이스를 만들어내고 임상 검체로 그 성능을 검증해 데이터를 쌓는 일을 한다. 검체를 다루고 실험을 설계하고 통계를 돌려 결과를 해석하는, 연구자가 학교에서 하던 일과 가장 닮은 영역이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면 학교 연구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학교에서는 데이터를 모을 때 '논문에 실릴 데이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의료기기 시장에 있는 R&D 부서라면 '규제기관을 통과하고 현장에서 똑같이 재현되는 데이터'를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100번 연구 시도해서 한 번 멋지게 나온 결과보다, 누가 하든 어느 병원에서 하든 같은 값이 나오는 재현성과 강건함이 훨씬 중요하다. 그래서 R&D에서는 실험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 데이터를 나중에 식약처에 어떻게 제출할 것인가"를 먼저 고민한다.
어떤 환자군을 대상으로, 몇 건의 검체로, 무엇을 비교 기준(reference standard)으로 삼아 민감도와 특이도를 보일 지를 규제 요건에 맞춰 설계해 두지 않으면, 한참 뒤 인허가 단계에서 데이터를 통째로 다시 만들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연구센터에서 일을 오래 하면 보통 특정 기술의 전문가(시약, AI 알고리즘, 디바이스 하드웨어 등)로 깊어지면서 시니어 연구원, 연구소장, CTO 쪽으로 커리어를 만들어 가신다. 연구실에서도 데이터 설계를 많이 해본 사람일수록 자연스럽게 인허가(RA) 부서로 넘어가는 경우가 빈번한 것 같다. 제품 전체가 어떻게 시장에 나가는지를 데이터의 눈으로 이해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검증과 실험 설계가 즐겁고, "규제에 통과하는 데이터"라는 새로운 관점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연구자가 잘 적응 할 수 있는 포지션이다.
2. 인허가·규제(RA, Regulatory Affairs)

다른 산업에서는 인허가나 품질을 다소 행정적인 일로 여기지만, 의료기기에서는 회사의 운명이 걸린 부서다.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우리나라에서 의료기기가 병원의 검사실에서 사용되려면 분석 플랫폼의 임상적 근거 하나만으로는 부족하고, 성격이 다른 두 개의 관문을 차례로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관문은 식약처(MFDS)의 허가다. 제품이 안전하고 성능이 있다는 걸 증명해 시장에 내놓을 자격을 얻는 단계로, 의료기기 등급을 분류하고 기술문서와 임상자료를 갖춰 제출한다. 다른 나라에도 비슷하게 있는 과정이지만 한국이 유독 어려워지는 건 두 번째 관문으로 '허가를 받은 제품을 병원에서 돈 받고 쓸 수 있느냐'를 정하는 단계다.
NECA(한국보건의료연구원)가 신의료기술평가를 통해 이 기술을 새로운 의료기술로 인정할지, 안전하고 유효한지를 따지고, HIRA(건강보험심사평가원)가 그 기술에 수가를 어떻게 매기고 건강보험을 적용할지(급여), 아니면 환자가 전액 부담하게 둘지(비급여)를 심사한다.
허가를 받았다고 끝이 아니라 이 식약처 → NECA → HIRA의 길을 다 통과해야 비로소 제품이 '팔린다'는 게, 한국 시장의 가장 독특하고 어려운 지점이다.
그래서 RA 담당자는 제품마다 이 길을 어떻게 뚫을지 전략과 일정을 설계하고, R&D·임상팀과 함께 각 기관이 요구하는 데이터와 서류를 준비한다. 규제기관과 사전 상담을 하고 보완자료를 제출하며, 해외에 나갈 때는 미국 FDA나 유럽 CE/MDR 같은 각국 규제까지 챙긴다. 임상 데이터를 읽어내는 능력과 논리적으로 글을 쓰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사실 연구자 출신이 강점을 잘 발휘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게다가 인허가에 더해 급여·시장진입(Market Access)까지 아는 사람은 업계에서 드물어서, 국내 RA에서 글로벌 RA, RA 디렉터로 성장하거나 컨설팅·사업개발로 발을 넓히기에도 좋은 포지션으로 알고 있다.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RA 자격증 및 전문 경력을 요구하는 등 진입은 다소 까다로워졌지만 그만큼 커리어 경쟁력이 확실한 분야다.
3. 의학·학술(Medical / Scientific Affairs)

영업이 제품을 '파는(the act of selling products)' 일이라면, 학술은 그 뒤에서 과학적 신뢰를 만드는 일을 한다. 이미 장비나 검사를 도입한 병원을 대상으로, 이 제품을 원내에서 어떻게 활용하고 검증할지를 안내하는 역할이다.
구체적으로는 검체를 어떻게 받아 전처리하고 분석할지, 나온 결과를 임상의가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를 함께 설계하고, 도입 초기에 원내 검증(validation)이 매끄럽게 진행되도록 돕는다. 임상의나 검사실로부터 "이 결과가 이렇게 나오는데 맞느냐" 같은 과학적 질문이 들어오면 정확히 답하는 것도, 학회에서 발표할 자료나 논문 작성을 지원하며 제품의 임상적 근거를 차곡차곡 쌓는 것도 학술의 몫이다. 그 과정에서 주요 임상 전문가(KOL)들과 관계를 맺고, 현장에서 들은 이야기를 영업·마케팅·RA에 다시 전달하는 다리 역할도 한다.
신제품일수록 학술의 비중이 커진다. 아직 시장이 그 기술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왜 이 검사가 환자에게 유익한가"를 근거로 정립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품 설명을 넘어 임상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쪽으로 일이 깊어지고, MSL(Medical Science Liaison)에서 메디컬 매니저, Medical Affairs 총괄로 자란다. 임상 근거에 밝다는 점 덕분에 RA나 마케팅, 사업개발로 옮겨 가기도 유연한 것 같다. 과학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걸 임상의와 동등한 눈높이로 설명하는 일을 좋아하는 연구자라면, 보람을 느끼기 쉬운 자리다.
4. 영업(Sales)

영업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모습과, 의료기기 영업은 꽤 다르다. 고객이 의사나 검사실장, 병원 구매팀 같은 전문가 집단이라서, 제품에 대한 과학적·임상적 이해 없이는 애초에 대화 테이블에 앉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의료기기 영업은 타 부서와 함께 다니는 경우가 많다. 하는 일은 담당하는 권역과 병원·검사센터를 관리하면서 제품을 시연하고, "좋은 제품입니다"가 아니라 "이걸 도입하면 임상적으로 어떤 이점이 있고 수가·비용 측면에서 어떻게 유리한지"까지 설득하는 것이다.
입찰과 구매 절차에 대응하고 단가와 계약 조건을 협상하며, 도입 이후에도 사용 현황을 챙기고 학술팀과 함께 고객 만족과 재구매를 이끌어낸다. 현장에서 누구보다 먼저 시장 분위기와 경쟁사 동향을 접하기 때문에, 그 정보를 마케팅이나 사업개발과 소통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다.
요즘은 제품 하나를 파는 영업에서, 고객 검사실의 워크플로 전체를 함께 들여다보고 솔루션을 제안하는 컨설팅형 영업으로 무게가 옮겨가고 있다. 경력이 쌓이면 팀장과 지역총괄을 거쳐 영업본부장, 사업부장으로 가고, 시장을 보는 눈이 넓어 사업개발이나 마케팅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전문성을 갖추되 사람을 만나고 설득하는 일을 함께 즐기는 사람이라면, 과학을 아는 영업으로서 현장에서 신뢰를 빠르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5. 마케팅(Marketing)

마케팅은 제품의 메시지를 만들고, 회사 안팎의 흐름을 잇는 허브 역할을 한다. 학술팀이 만든 어려운 근거 자료를 고객이 한눈에 이해할 메시지로 바꾸고, 그걸 브로슈어와 발표자료, 디지털 콘텐츠로 풀어내며, 학회나 전시·세미나 같은 자리를 기획해 제품의 가치를 알린다.
신제품을 출시할 때는 마케팅이 사실상 지휘자가 된다. R&D가 언제 데이터를 내놓고, RA가 언제 허가를 받고, 영업이 언제부터 움직일지를 맞물려 돌아가게 조율하는 게 출시 계획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시장과 경쟁사, 고객의 니즈를 분석해 가격과 프로모션 전략을 세우고, 영업이 현장에서 쓸 자료를 만들어 지원한다. 의료라는 분야의 특성상, 메시지가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과학적으로 부정확하거나 규제를 어기면 안 되기 때문에, '정확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균형 감각이 관건이다.
흐름 자체는 인쇄물 중심에서 디지털과 데이터에 기반한 마케팅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제품 마케터로 시작해 마케팅 매니저, 마케팅 총괄로 성장하고, 제품 전반을 책임지는 프로덕트 매니저나 사업개발로 뻗어가기도 한다. 복잡한 기술을 명료한 언어로 옮기는 일에 강점이 있는 연구자에게 잘 맞는 자리다.
6. 사업개발(BD, Business Development)

사업개발은 회사의 '다음'을 찾는 부서다. 지금 파는 제품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시장으로 들어갈지, 어떤 회사·기관과 손잡을지, 회사의 다음 먹거리는 무엇일지를 고민한다.
신규 질환이나 검사 영역으로 확장할 기회를 찾고, 검진센터 시장이나 건강기능식품, 헬스케어처럼 인접한 시장으로의 진출을 검토한다. 그 과정에서 병원·CRO·제약사·유통사와의 제휴나 라이선싱, 때로는 인수합병까지 들여다보고 협상한다.
시장 규모와 경쟁 환경, 규제를 분석해 진입 전략을 짜고, 새 사업의 사업성을 따져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돕는 일이 일상이다. 의료기기로 환자 상태를 측정한 결과를 건강기능식품 복용과 연결하는 모델처럼, 산업의 경계를 넘는 흐름을 가장 먼저 읽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이 부서의 몫이다.
그래서 사업개발은 단발성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을 넘어, 장기적인 파트너 생태계를 설계하는 쪽으로 일이 깊어진다. 산업 전반을 위에서 조망하는 자리이다 보니 사업개발 총괄이나 전략기획, 신사업 대표로 자라고, 더 나아가 창업이나 벤처투자(VC)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술 트렌드를 읽는 안목과 큰 그림을 그리는 사고가 강점인 사람, 과학과 비즈니스를 둘 다 이해하는 사람에게 어울린다.
한국 시장의 특징, 다기관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여기까지가 한 회사 안의 부서 이야기라면, 한국 의료시장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제품 하나 뒤에 수많은 기관이 얽혀 있어서, '의료기기 회사'라고 다 같은 회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회사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같은 부서라도 하는 일이 꽤 달라진다.
먼저 제조와 수탁의 형태부터 다양하다. 바이오벤처가 제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만드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분석이나 제조를 외부 수탁기관에 맡기는 회사도 있다. 해외에서 이미 인증받은 제품을 들여와 국내에 파는 유통 대리점도 있고, 반대로 국내 제품을 해외에 팔려는 회사를 위해 각국 규제와 한국의 복잡한 시장을 안내해 주는 컨설팅·에이전시 회사도 따로 있다. 제품을 직접 만들지 않고 '시장 진입과 규제 대응' 자체를 서비스로 파는 회사가 존재한다는 게, 이 시장이 얼마나 분업화돼 있는지를 보여준다.
검체와 데이터를 둘러싼 협업도 마찬가지다. 모든 검체를 한 회사 안에서 수집하고 분석할 수 있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어서, 임상 검체가 필요하면 병원과 협업하고, 임상 데이터를 모아야 하면 CRO(임상시험수탁기관)를 통하며, 약물 효능과 얽힌 문제라면 제약사와 손을 잡는다.
최근에는 의료기기로 측정한 환자 상태를 건강기능식품 복용과 연결하는 흐름이 나오면서 건강기능식품 회사와의 협업도 검토되고, 의료기기가 병원 처방뿐 아니라 검진센터 시장에서도 크게 쓰이다 보니 아예 헬스케어 사업팀을 따로 두는 회사까지 생기고 있다.
"의료기기 회사에 다닌다"는 한마디 안에는 제조사도, 수탁사도, 유통사도, 컨설팅사도, 헬스케어 플랫폼도 다 들어 있다. 부서를 고르는 것만큼이나, 내가 들어가려는 회사가 이 거미줄의 어디쯤 자리 잡고 있는지를 먼저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 맞을까
길게 풀었지만 결국 본인이 무엇을 즐기느냐의 문제다.
검체를 만지고 실험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검증하는 일이 가장 즐겁다면 연구개발이 맞고, 데이터를 읽고 논리적으로 문서를 쌓아 올리는 일에 강하고 제도와 규제에 흥미가 있다면 인허가(RA)가 희소성과 커리어 경쟁력 면에서 좋은 선택 일 것이다.
과학을 정확히 설명하고 임상의와 대화하는 일이 좋다면 의학·학술이, 전문성을 갖추되 사람 만나는 일을 함께 즐긴다면 영업이, 복잡한 기술을 명료한 메시지로 옮기는 데 재능이 있다면 마케팅이, 트렌드를 읽고 회사의 다음 판을 짜는 일에 끌린다면 사업개발이 어울린다.
의료기기 산업으로 간다는 건 연구를 그만두는 게 아니라, 연구로 쌓은 역량을 규제와 시장에 연결해 더 넓게 쓰는 일에 가깝다. 어느 부서로 가든 과학을 이해한다는 건 손해 보지 않는 자산이고, 오히려 이 업계에서는 그런 사람이 드물어서 더 귀하게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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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연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로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실험을 하고 논문을 쓰면 결국 학계로 이어지고, 박사학위 이후에는 교수나 포닥이 되는 길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도 그 생각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연구실이 아니라 의료기기 산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연구실 밖의 세계”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연구만이 연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생명·의료 분야에서 연구와 산업은 서로 멀리 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복잡하게 연결된 하나의 구조라는 사실을 공유하려 합니다. 연구실 밖의 길을 고민하고 있는 분들에게, 그 길의 모습을 조금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