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연구의 이상과 현실 ② — 역할은 어떻게 불균형해지는가
킥오프 미팅이 끝나고 각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저마다 같은 회의를 다르게 기억합니다.
PI는 연구의 큰 그림을 기억합니다. 어떤 세포 모델을 쓸 것인지, 최종적으로 몇 편의 논문과 몇 권의 특허를 목표로 할 것인지, 이 연구가 자신의 연구실이 그동안 해온 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등과 같은 것이겠죠. 반면 대학원생은 조금은 다른 것들을 기억합니다. 협업하는 연구실에서 샘플을 언제 보내주기로 했는지, 프로토콜 공유는 누가 먼저 하기로 했는지, 다음 미팅 전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등과 같이 실무적인 부분일 것입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발표를 듣고, 같은 의견을 들었지만, 기억 속에 남은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의 시작점이 됩니다.
역할 분담이라는 말의 허상
공동연구에서 역할 분담은 대개 이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킥오프 미팅에서 각 연구실의 강점이 소개되고, 큰 틀에서 "A 연구실은 소재 합성, B 연구실은 세포 실험, C 연구실은 동물모델"이라는 구조가 그려집니다. 이것은 협업의 청사진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시점의 역할 분담은 절반도 채 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을 할 것인지는 정해졌지만,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는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연구실 간 인터페이스, 즉 샘플 전달 방식, 데이터 공유 형식, 의사소통 방법, 문제 발생 시 책임 소재와 같은 것들은 킥오프 미팅에서 실상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아직 관계가 형성되기 전이라 어색하고, 너무 세세한 이야기를 꺼내면 신뢰를 못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그런 건 해나가면서 조율하면 되지"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수님들이 계시는 자리에서 실무적인 이야기를 자유롭게 주고받기는 눈치가 보이기도 합니다. 협력의 정신이라는 이름 아래, 구체적인 약속들은 뒤로 밀려납니다.
그리고 그 공백은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역할들
공동연구에서 공식적으로 정의된 역할 외에, 누구도 맡겠다고 자발적으로 손을 들지 않았지만 반드시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연구실 간 일정을 조율하는 일. 한쪽에서 샘플이 지연될 때 다른 쪽 실험 일정을 조정하는 일. 프로토콜이 모호하게 공유되었을 때 직접 확인 연락을 취하는 일. 회의록을 작성하고, 다음 미팅 전에 진행 상황을 정리하고, 연구비 집행 서류를 챙기는 일...... 이러한 일들은 논문에서 명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기여도 평가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동연구가 실제로 굴러가게 만드는 힘은 상당 부분 이 보이지 않는 역할들에서 나옵니다.
문제는 이 일들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가 매우 예측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은 대부분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연구자, 가장 많이 연락이 닿는 사람, 혹은 가장 먼저 손을 들어버린 사람입니다. 역할이 능력이나 관심이나 의지에 따라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가장 거절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흘러들어 가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흐름 속에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냥 한 번 이메일을 보낸 것이었는데, 그것이 어느새 제 역할이 되어 있었습니다. 석사 1학기, 처음에는 과제의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음에 뿌듯했으나, 분기 별 보고서를 작성하고, 세포 샘플을 직접 전달하는 퀵 서비스 신세가 되는 등 잡무를 도맡아 처리하게 되자 억울함이 밀려들어왔습니다.
연구실 간 기여도 불균형
여러 연구실이 참여하는 공동연구에서 기여도의 불균형은 흔히 발생하지만, 그것이 표면에 드러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각 연구실의 기여는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단순 비교가 어렵기도 하고, 협력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려는 암묵적 합의도 작동합니다. 그래서 불균형은 오랫동안 말해지지 않은 채로 쌓입니다.
제가 경험한 공동연구 중 하나에서, A 연구실(저희 연구실)은 소재 합성부터 세포 실험까지 전반적인 실험을 담당했고, B 연구실은 동물모델 실험 파트를 담당했습니다. 과제 설계상으로는 두 연구실의 역할이 균등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진행되는 과정은 달랐습니다.
일정이 지연될 때마다 조율 연락을 취하는 것은 A 연구실의 몫이었습니다. 중간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도, 외부 기관과의 서류 작업도 대부분 우리 쪽에서 처리했습니다. B 연구실의 동물 실험은 일정이 따로 움직였고, 우리가 그쪽 일정에 맞추어 샘플 납기를 조정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 이외의 실무에는 거의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논문을 작성할 때 대다수의 저희 연구실에서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실무에서 생긴 격차는 논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으며 저희 연구실과 B연구실의 학생은 최종 논문에 공동 1 저자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왜 이 불균형은 고쳐지지 않는가
이러한 불균형이 발생하면, 왜 그 자리에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불균형이 서서히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쪽 연구실이 다른 쪽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부탁들이 쌓이고, 예외적인 조율이 반복되고, 어느 순간 그것이 당연한 구조처럼 굳어집니다. 개입할 명확한 시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관계를 해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협력 정신"이라는 규범 아래에서 불균형을 말하는 것은 이기적이거나 까다로운 태도로 읽힐 위험이 있습니다. 특히 PI 간의 관계가 있는 경우, 대학원생이 먼저 그 문제를 표면화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PI의 의견에 따라 논문 저자의 순서에 불만을 가져도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셋째, 불균형의 피해자가 그것을 견디는 법을 너무 빨리 배우기 때문입니다.
지쳐가면서도 그 상황을 자신의 성장 과정이라고 의미 부여하거나, 지금 참으면 나중에 더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는 기대로 버티게 됩니다. 문제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은, 그 상황을 수용하는 법을 익힌 결과이기도 합니다.
구조에 대한 이야기
역할이 명문화되지 않은 채로 협업이 시작되고, 보이지 않는 일들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으며, 기여도는 결국 가시적인 산출물 중심으로만 평가됩니다. 악의 없이도 불균형이 발생하고, 불균형이 발생해도 그것이 고쳐지기 어려운 조건이 구조적으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처음 협업을 설계하는 단계에서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를 함께 설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연구실 간 인터페이스를 명확히 하는 것, 보이지 않는 역할들을 가시화하는 것, 그리고 중간에 구조를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 이것들은 협력의 정신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협력이 더 오래 건강하게 작동하도록 만드는 기반입니다.
또한 본격적인 실험이 들어가기 전, 논문 작성이 시작될 때 저자 순을 확실히 해 놓고 시작하면 좋을 것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공동연구에서 데이터를 둘러싼 소유권과 해석 갈등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다루어 보고 제가 미국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있었을 때 이런 논문 순을 해결했던 실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데이터를 누가 생산했는가, 누가 분석했는가, 그리고 누가 그 이야기를 대표하는가 같은 질문들이 공동연구에서 얼마나 예민한 지점이 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