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하면서 언제쯤 졸업 이야기를 꺼낼까 생각했는데, 드디어 그때가 왔다. 사실 작년 10월부터 올해 초까지 연재가 뜸했던 이유 중 하나는 학위 과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졸업 청구 신청'을 준비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드디어 가짜 포닥 딱지를 뗄 날이 머지않았다.
내가 있는 기관의 경우, 박사 학위 취득 과정은 한국과 많이 다르다. 한국은 매 학기마다 졸업 발표일이 정해져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다니는 학교는 시스템이 완전히 다르다. 일단 졸업 청구를 신청할 수 있는 날이 한 달에 한 번으로 정해져 있는데, 이 날 졸업 청구 신청을 하지 못하면 그다음 달의 신청일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게 가장 큰 포인트다. 그뿐 아니라 졸업 청구 신청은 오프라인으로 진행이 된다. 졸업 논문의 최종본을 컬러 버전으로 프린트해서 제본을 해야 하는데, 반드시 책 형태로 제본을 해야만 인정이 된다. 그뿐 아니라 인준서를 교수님과 졸업 사정 위원회의 위원장 교수님께 받아야 하는데, 각각 자필 서명을 받아와야 한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이 모든 걸 다 챙겨서 학적팀의 담당 창구로 가면 되는데, 제출을 했다고 해서 확인증을 준다거나 메일을 보내주는 게 아니라는 것도 참 웃긴 포인트다.
이쯤 되면 내 졸업 과정이 아날로그인지 디지털인지 헷갈릴 지경이지만, 하여튼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행정이 아날로그라는 건 아니다. 아마 제목에서도 눈치를 챘겠지만, 오늘은 졸업 논문을 수정하고 다듬는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물론 석 달에 걸친 탈고 과정은 여러 의미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기억조차 이미 꽤 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수님은 졸업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 늘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있다. 본인은 부분 수정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 Summary부터 Perspective까지 전부 써서 가져오라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각 장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지, 전체 구조는 어떻게 잡으면 좋을지에 대해서는 조언을 해 주신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다. 이렇게 짧은 디스커션이 끝나고 나면, 그때부터 졸업 논문의 모든 것은 온전히 내 손에 달리게 된다. 내가 빠르게 쓰기 시작하면 탈고도 빨라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졸업은 무한정 미뤄질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 워드 파일의 빈 화면에서 깜빡이는 커서만큼 막막한 것도 없었다. 물론 결과들이 이미 논문으로 전부 나와 있어서, 결과론 파트에는 기존 논문을 PDF 파일 형태로 그대로 붙여 넣으면 된다만서도,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부분이 술술 써지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렇게 한 달 반쯤에 걸쳐 논문을 전부 작성해 메일로 워드 파일을 보내드렸다. 그런데 메일을 보낸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교수님께서 내 오피스로 직접 찾아오셨다. 그리고선 하시는 말씀이 “이거 연구실에 제본기가 있거든? 프린트해서 그걸로 묶어가지고 갖고 와야 할 것 같은데.”라는 거다. 순간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제대로 이해를 못 했다는 표정으로 교수님을 쳐다봤다. 그러자 교수님께서는 졸업 논문은 절대 온라인으로 수정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손으로 직접 따라 읽어가면서, 볼펜으로 수정을 해 주신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웬 개가 풀 뜯는 소리인지 싶었지만, 그 자리에서 왜 그래야 하는지를 묻거나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게 프린트를 하고 제본기를 돌려, 졸업 논문의 첫 번째 드래프트를 교수님께 드렸다.
한 2주가 지났나. 교수님께서는 아침에 출근하시자마자 나를 보시고 잠깐 볼 수 있냐고 물으셨다. 졸업 논문 교정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아침 댓바람부터 나를 찾으시는 건가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일단 노트와 펜을 챙겨 들고 교수님 오피스로 향했다. 교수님 책상 위에는 내가 드린 졸업 논문 초본이 올라가 있었고, 그때부터 슬슬 설마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교수님께서는 초안임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잘 써 와서 다행이긴 하지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고쳐야 할 부분이 꽤 있다고 하셨다. 그걸 설명하려고 부른 거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아무래도 종이는 여백이 한정적이다 보니, 교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자세히 적어두기가 어렵다고 하시면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어느 부분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 주셨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졸업 논문 전반을 쭉 훑었는데, 돌이켜보면 대부분 꽤 납득할 만한 지적들이었다.
내용받고 문법도 문제였던.그렇게 다시 돌려받은 수정본은, 죄다 이런 식으로 빨간 볼펜으로 가득 수정되어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빨간펜 선생님’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페이지마다 손으로 빼곡하게 수정을 해 두셨고, 새로 추가해야 할 레퍼런스조차도 어느 저자가 언제 발표한 논문인지까지 전부 손으로 적어 두셨다. 교정을 어디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혼자 다시 훑어보면서, ‘이게 잘 쓴 편이라면 도대체 못 쓴 건 얼마나 난리가 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하나 문제라면, 이제 이 손으로 교정된 논문을 보며 필요한 부분을 더하고 빼거나, 아예 새로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우리 교수님은 의사 출신임을 감안해도 꽤나 악필이라는 것이다. 8년을 같이 일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 손글씨는, 사실상 어떻게 보면 암호 해독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험난한 손글씨의 늪을 지나며 두어 번 정도 더 교정과 재작성을 거쳤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12월 초에는 최종본이 나왔어야 했지만, 현실은 크리스마스 연휴 직전까지도 졸업 논문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어차피 졸업 청구가 가능한 가장 빠른 날짜가 2026년 1월 12일이긴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서론에서 다루고 있던 주제와 관련된 새로운 논문들이 2025년 10월과 11월 사이에 몇 편이나 쏟아졌기 때문이다. 교수님께서는 이 논문들을 반영해 졸업 논문을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고, 그 말은 곧 의도하지 않게 써야 할 분량이 더 늘어났다는 뜻이었다. 결국 이 일정 지연 때문에, 크리스마스 다음 날 교수님과 따로 만나 졸업 논문의 최종본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탈고와 하드 카피, 각종 서류까지 싹 준비해 졸업 청구 신청을 마쳤다. 적어도 이 과정만큼은, 더 미룰 수 없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