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은 있고 책임은 없다
잘못의 주체가 항상 책임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상적인 시스템하에서 잘못의 주체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대가는 치르지만, 그 잘못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불행한 일을 책임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법은 그 책임을 묻지 않는다. 가령, 폭행의 가해자는 폭행에 대해 처벌을 받고 피해자가 겪은 고통에 대해 법이 정한 범위 내에서 보상하지만, 피해자가 폭행 이후로 평생 짊어질 불안과 공포, 사회 부적응이나 일상 회복의 어려움, 원치 않던 삶의 궤적 변화까지 보상하지는 않는다. 피해자의 가족이 겪을 어려움이나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느낄 간접적이지만 확실한 위기감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중범죄에 비할 바는 못 될지라도, 연구 윤리 위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고 책임을 지는 과정 역시 비슷하다. 연구 윤리 위반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처벌을 받고 보상하지만, 그 행위가 낳은 파급 효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동료들의 부담이 늘거나 학계의 가치를 훼손시키더라도, 연구 기관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교직원이 희생되더라도 말이다. 상실은 있고 책임은 없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상실이 하나 더 있다. 미래다. 연구 윤리 위반 행위가 일어나면 문제의 연구 분과가 구조조정이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구조조정은 현직에 있는 사람들을 실업자로 만드는 동시에 미래에 그 분야의 구성원이 될 가능성이 있던 사람들의 유입을 차단한다. 내가 지켜본 연구 기관에서도 연구 윤리 위반 행위가 드러났던 연구 분과가 사라졌다. 그 분과에서는 새로운 교직원도 새로운 학생도 받지 않게 되었다. 그 분과 외에도 축소되거나 다른 곳에 흡수되어 사라진 분과가 있었다. 이는 상실을 동반한다. 젊은 연구자들이 연구할 터의 상실, 학문의 계보를 이어갈 기회의 상실. 이 상실의 결과를 견디는 것은 그 사건과는 무관한 학문 후속세대다. 줄어든 기회를 두고 경쟁해야 하고 꿈꾸던 진로를 내려놓아야 한다.
선택들
대학원생들은 자신이 속한 연구 분과가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봤다. 앞으로 새로운 후배가 들어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졸업 후에 모교의 강단에 서는 일은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이것은 고작 일자리 하나 사라지는 데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연구의 터가 되어 주던 집단이 사라진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해오던 일을 지탱해 주던 토대가 사라지는 것이다. 소속 집단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일을 계속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니까. 같은 집단에 속한 동료들은 같은 가치를 공유해 불안하지 않게 해 주니까.
소속 집단의 소멸이 확실시되자, 학생들은 자신이 몸담은 분야의 꼬리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듯한 불안을 느꼈다. 이제 와서 손을 놓을 수는 없고 버티고 있자니 결국 손을 놓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결과가, 아니면 오히려 더 나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내 연구를 이해하고 연구자로서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더 이상 찾기 어려울 것 같다. 지금보다 더 나서서 증명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하고 있는 것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 불안 끝에 누군가는 연구 이외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시간을 쪼개어 일했고, 누군가는 분야를 갈아탔고, 누군가는 연구자가 되기를 포기했다. 환경 탓만 해서는 나아갈 수 없으니 각자 자기 몫의 선택을 했다.
그 사이 연구비 부정 지출을 일삼았던 교수도 선택을 했다. 자신의 윤리적 해이 때문에 나타난 피해들을 외면하는 선택. 그는 그 일이 매스컴을 타고 세간의 비난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누구에게도 사죄하지 않았다. 자신을 해고하고 배상을 요구한 대학에 대해서는 고소로 맞섰다. 대학이 자신에 대해 내린 처분이 부당하며, 이 일의 책임자인 대학이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몇 년 후 결국 양쪽이 합의에 이르렀지만, 해당 교수의 변호인은 잘못을 인정해서 합의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직접 저지른 일에 대해서도 외면하는 마당에, 자신 때문에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 보일 리 만무하다.
책임이 사라진 곳에 남은 것은
절대선이 나타나 상실의 주범을 때려눕혀 개과천선하게 하는 만화 같은 일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이 다시 돌아오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상실을 겪은 혹은 상실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연다. 대학이 연구 윤리 위반 행위가 일어난 연구 기관을 구조조정 할 당시에 그 처분에 반대했던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던) 교수들이 수년이 지나 새 연구 분과를 만들겠다며 대학에 제안했다. 이 기획에 힘을 보탠 교수 중에는 연구 기관의 구조조정으로 다른 분과에 흡수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도 있었고, 이제는 사라져 버린 연구 기관에서 대학원생으로, 연구원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던 사람도 있었다. 소속 분과가 사라지고 지도교수마저 연구 기관을 떠나 오갈 곳 없어진 대학원생들을 받아줬던 사람도 있었다.
대학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라진 연구 분과들을 전부 대체할 만큼의 규모는 아니더라도 교원들이 취업할 일자리가 생겼고, 대학원생들이 연구할 환경이 조성되었다. 연구의 방향은 이전의 분과들을 일부 계승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것을 한 번에 돌이킬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돌이키기 위한 새싹은 움트고 있었다.
연구 기관이 이름을 잃고 나는 다른 소속 기관으로 흡수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학회에 참석했다. 발표 자료에 적힌 내 소속 대학을 확인한 어느 연구자가 우리 대학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다며 혹시 사라진 그 연구 기관 출신이 아닌지 물었다. 나는 맞다고 답했다. 그 일로 지금은 소속이 바뀌었다고도 덧붙였다. 그는 나를 위로해 주려 애쓰면서 그 일에 대해 함께 분노해 줬다. 그리고 문제를 일으킨 교수가 책임을 지고 사과를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그는 또 이전의 연구 기관이 재기할 가능성이 없는지 물었다. 나는 아직 그런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고, 무수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진행된 처분이니 그럴 가능성은 적을 것 같다고 답했다. 그 대화 이후, 그와 나는 다른 화제를 골랐다. 다음번 학회에서 그와 만난다면 다른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회복의 기회가 생겼다고. 연구 기관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주범에게 기대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우리는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