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학원은 어떨까?
연재
[일본 대학원은 어떨까?] ep.03 일본의 연구 문화와 시스템-아날로그 문화 편
이번 편도 일본의 연구실 문화와 시스템을 소개하려 한다. 나는 석사 과정을 한국의 대학원에서 마쳤기 때문에 두 나라 간의 연구 문화와 시스템 차이에 대해서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각 연구실마다 다른 문화와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를 대변할 순 없겠다.
[아날로그의 나라, 변화는 언제 시작되는가?]
우리가 흔히 가지는 이미지로 일본은 프로토콜의 나라, 아날로그의 나라일 것이다. 나도 미디어에서 접하며 느낀 이런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일본으로 왔다. 한국에서 사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말이 실감 나지 않던 처음과 다르게, 지금은 정말로 한국의 시스템이 얼마나 선진화되어있고 편리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일본에 처음 정착 후 학과 행정실과 관공서를 방문하여 온갖 서류를 작성하게 된다. 특히, 신학기 때 관공서라면 서류 처리를 위한 예약을 위해서 방문해야 한다. 아침 일찍 갔더니 예약해야 받아준다고 해서 다른 날로 예약만 하고 돌아왔다.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또 시간은 내서 가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한다. 서류 처리를 위해 다시 가더라도 오전에 신청한 서류가 오후나 되어야 나오는 행정적 느림은 한국인에게 큰 고통이다. 심지어 사인은 안되고 도장이 없으면 만들어서 오라고 한다. 그리고 행정 서류 발급도 인터넷으로는 불가능하다(대신 일부 서류는 편의점에서 유료 발급 가능). 성적 증명서나 졸업 증명서라도 떼려면 직접 방문하거나 우편 발급 신청으로만 가능하니 매번 번거롭게 행정실로 찾아가거나 우편으로 신청한다.
행정 서류 제출도 쉽지 않다. 내가 살았던 세상에서는 행정 서류는 직접 행정실에 제출하면 되는 건데, 일본은 우편 발송만 받는 경우가 꽤 있다. 분명 학과 행정실은 옆 건물에 있어 걸어가도 2분이면 충분하다. 근데 우체국으로 가서 우편 발송을 해야 하니, 우체국까지 걸어가면 왕복 40분이다. 더군다나 학내 우편 서비스는 무료가 아닌 유료이다. 공정성을 위한다지만, 행정실을 코 앞에 두고 먼 거리를 가야 하는 그 시스템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서류 작성의 기본은 자필 작성! 짧은 양식의 서류라면 괜찮지만, 장학금 면제 신청 등 많은 서류가 필요하거나 긴 글을 적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자필로 작성해야 한다. 물론 일본어로 작성해야 하기에 시간 소모가 엄청나다. 혹시나 작성 도중에 한자를 잘못 적는다면, 지저분하게 취소선을 긋거나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하는 불편함도 크다. 그래서 나는 복사본을 몇 장이나 출력해서 최종본을 완성한다. 혹여 컴퓨터로 작성하여도, 출력해서 스캔하고 제출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불편함이 모이면 일본 행정 시스템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한국의 시스템이 얼마나 편리한지 비로소 감탄하게 된다. 마치 한국의 90년대나 2000년대 같은 종이 기반 행정 시스템이라 온라인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지 않아서 불편한 것이다. AI 시대를 달리고 있는 사회에서 일본은 디지털로의 전환을 원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러나, 빨리빨리를 외치지 않고 천천히 돌아가는 일본의 시계가 잘못되었다기보단 적응의 문제인 것 같다.

[프로토콜의 나라, 책임지기 싫은 사회]
일본은 무엇이든 프로토콜이 없으면 안 되는 나라이고 프로토콜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사회이다. 사전 교육과 프로토콜 체득을 6~12개월 정도로 오래 투자하는 일본 사회에서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며 배우게 된다. 그래서, 한국처럼 일단 투입하고 실전에서 배우라는 방식은 일본에겐 매우 가혹한 조건이다. 그렇지만 장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처음 연구실에 들어왔을 때 실험은 시작할 수 없었다. 우선 연구실의 규칙을 설명하고 연구 장비에 대한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유세포 분석기, 형광현미경은 고가의 장비라 그런지 기초 원리부터 사용법, 실습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며칠에 걸쳐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교육받을 정도로 신입에 대한 교육에 철저한 문화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연구실에서 진행했던 모든 실험에 대한 프로토콜을 서버에 두고 미리 읽게 하였으며, 선배 대학원생의 실험 일정에 맞춰 다양한 실험에 참관하고 익히게 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질문을 해도 싫은 내색 없이 더 최대한 알려주려고 하는 대학원 문화도 참 좋았다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알 수 없다).
어디서 쉽게 얻을 수 없는 교육을 이렇게도 쉽게 받을 수 있다니. 교수님께선 많은 실패로부터 내 손으로 힘들게 완성한 실험 조건이지만, 다른 연구자의 연구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지 공유하고 알려주는 것이 당연하다며 교육의 중요성과 연구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상기시켜 주셨다.
이런 연구 문화가 조금은 부러웠다. 힘들게 몸으로 부딪치며 얻는 것이 연구 경험이라지만, 실패를 줄일 수 있도록 사전 교육과 프로토콜 정립에 힘을 쏟는 것이 이곳에선 당연시된다는 것이다. 종합하자면, 신입 때부터 키워서 전문가까지 만드는 도제식 제도가 아직도 크게 남아있는 연구 문화이다.
한국에서의 부정적 경험이지만, 선배에게 물어보면 ‘내가 힘들게 만든 프로토콜이니 주기 어렵다, 네가 직접 찾아보고 조건 잡아봐라’, ‘나는 내 실험이 우선이니 바쁘다, 알려줄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등의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연구 문화가 더 큰 강점으로 다가온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확립되어 있는 프로토콜을 알려주고 나면 추후 문제가 생겼을 때 온전히 나의 책임이 된다. 일본은 책임지는 것을 싫어한다. 한 번 조직(사회)의 눈 밖에 나게 되면 회복이 어려운 차가운 사회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지게 될 텐데 그 위험성을 감수하기 싫어서 프로토콜에 집착하는 수준인 것 같다.
때로는 프로토콜을 조금 벗어나 유연하게 대처하는 경우도 필요한데 일본은 이런 유연함이 부족하다. 한마디로 ‘고지식하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 보니 새로운 도전이나 제안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또한, 변화도 좋아하지 않는다.
연구실의 시스템이 변하는 것과 새로운 소프트웨어의 도입 등의 변화에도 “사용 방법을 또 익혀야 하나, 기존에 있던 거 쓰자’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AI의 활용에 있어서도 아직 한국만큼 보편화되어 있진 않다. ChatGPT, Gemini 등 많은 AI 도구가 나왔지만, 대학원에서 적극 사용하지 않는 것 같고, AI의 사용에 대한 호감도 높지 않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대학원생의 논문 투고는 한국보다 늦어진다. 동일 시간이라면 한국에서는 더 많은 생산성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생산 품질에 대한 부분은 제외). 하루라도 빨리 졸업하고 싶은 박사과정생의 마음과는 반대되는 길이지만, 옳은 길이기도 하니 불평만 할 순 없다.
일본을 여행으로만 왔던 분들이라면 일본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으나, 빨리빨리의 민족인 한국인이 생활하기엔 답답함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일 처리를 빨리해서 실수가 일어나는 것보다 천천히 하되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본 사회인만큼 이 사회의 문화에 스며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맺음]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기사 오류 신고하기]
일본에서 면역학을 전공 중인 박사과정 2년 차 학생입니다. 지난 "일본 대학원 도전기"에 이어, 어느새 2년 차 박사과정생이 된 저의 '일본 대학원' 경험을 전달드립니다. 한국과는 사뭇 다른 일본 대학원 문화와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