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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협주곡-26] 배명진, 노벨상, 25년, 그리고 칼텍
Bio통신원(김우재)
배명진이라는 음성전문가의 사기가 또다시 피디수첩을 통해 밝혀졌다. 그는 과학이라는 이름을 권위로 포장해 여러번 사기를 쳤다. 황우석과 같은 패턴이다. 왜 과학을 권위로 포장해 사기를 치는 것이 문제이며, 이런 현상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얼 말해줄 수 있는가, 전문가로 포장되어 국민의 혈세와 사회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이들이 가득 찬 사회에서, 우리는 과학에 관심이 없어도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기 당하기 싫다면 말이다.
과학은 측정량으로 표현되는 데이터들을 이론으로 설명하는 복잡한 과정이다. 측정량만 따로, 이론만 따로 존재할 때는 과학이 아니다. 측정량만 있다면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숫자의 나열이 될 뿐이고, 이론만으로는 공허한 예언이 될 뿐이다. 둘은 반드시 연결되어야 과학을 이룬다. 과학에서 이론은 권위를 지닌다. 이론이 물리학에서 지닌 권위를 자세히 논증한 책이 <과학혁명의 구조>다. 과학자 사회도 종교적일 수 있다. 토마스 쿤은 그 사례로 물리학의 주류 이론이 과학자 사회에서 검증되고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다뤘다.
쿤이 말한 그 유명한 패러다임이라는 말 자체에 권위가 숨어 있다. 패러다임이 어떻게 지지되는지에 대한 의심은 종교적 이단처럼 취급 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과학이 종교와 동급으로 취급을 받을 만큼 허술한 분야는 아니다. 쿤의 문제는 이론적 변화만을 피상적으로 분석했다는 데 있다. 서로 다른 과학이론이 설명해내려는 측정량은 같다. 즉, 측정량의 불변성이 과학에 진정한 권위를 부여하는 셈이다.
숫자는 우리에게 신뢰를 준다1. 또한 숫자로 표시된 데이터는 일반적으로 권위를 지닌다. 그것이 과학적이라는 신화의 한 단면이다. 우리 사회에서 숫자로 표시된 문건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권위를 획득한다. 특히, 사회를 지배하는 법이 그 숫자를 신뢰할 경우, 잘못된 과학적 분석으로 획득한 숫자는 사회의 공익에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숫자로 표시된 비과학적 권위가, 우리가 과학을 제대로 알고, 사회에 과학을 실현시켜야만 하는 이유다.
배명진, 이 소위 음성전문가가 피디수첩 측에 반박하는 모든 내용이 권위에 기대고 있다. 특히 그는 과학자가 금기시해야 할 권위주의에 기대 증거를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모든 오류를 저지른다. 첫째, 자신의 분석 오류를 지적하는 피디수첩 측에 대고, 그는 자신이 노벨상을 수상할 만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황당한 소리를 한다. 그가 노벨상을 받을 가능성은 아예 없지만, 그는 종종 자신이 노벨상을 받고 싶으며, 그런 연구를 하고 있다고 말해 왔다. 문제는 노벨상이 그의 분석오류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들 중 여럿이 과학적 사기를 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고, 노벨상을 받은 과학이 사기로 드러난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필자는 노벨상이 과학의 건강성에 해만 끼치는 멍청한 상이라고 주장한다. 당장 지난해 누가 노벨생리의학상을 탔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노벨상은 언젠가부터 과학자들에게 해로운 상이 되고 있다. 과학계 전체가 노벨상이라는 불가능한 피라미드의 꼭지점을 향해 돌진하는,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자신의 소리공학연구소가 25년된 전통의 연구소라는 권위로 분석오류를 가리려 한다. 25년은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다. 한국의 어떤 극우정당은 반세기가 넘게 존재해왔지만 통일을 앞둔 이 시점에도 국민이 아니라 국회의원 자신들의 안위만 챙긴다. 25년이라는 숫자는 아무런 권위도 담보할 수 없다. 셋째, 그는 이상한 학회와 학회지를 만들어 외국 학자들의 논문을 구걸했고, 칼텍의 한 교수가 사이젠SciGen으로 만든 가짜 논문을 게재 승인했다. 그가 이 논문을 게재한 이유는 ‘칼텍 교수’라는 권위였다. 한국 학자들 중 일부가 영어로 된 허술한 가짜 학회지를 만들어 돈벌이를 한다더니, 티비에 자주 나오는 전문가까지 그러는 줄은 몰랐다. 최근 과학계는 저런 가짜 학술지가 보내는 스팸성 이메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과학은 권위에서 자유로운 학문이다. 과학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정리한 과학자 사회의 규범들 중 마지막이 ‘조직적 회의주의’다. 즉 과학자는 다른 과학자의 연구결과를 끊임 없이 의심하고 회의한다. 과학자들은 그걸 조직적으로 한다. 즉 조직적 회의주의는 과학자 사회가 지닌 독특한 문화다. 또한 과학자 사회는 과학지식을 계급, 경제, 보상 등에 연연하지 않고 지식 그 자체로만 평가하는 특징을 지녔다. 즉, 애초에 과학자로 제대로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과학적 권위가 어떻게 평가되고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만약 배명진이 과학자라면, 그는 제기된 의혹에 대답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 대답은 노벨상이나 25년 같은 권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근거에 기반한 반박이어야 한다. 과학적 결론이 권위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권위가 과학적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자, 이제 황우석 사태의 변주인 배명진 사태를 통해 도대체 우리는 뭘 배워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먼저 한국 과학계의 무능함이다. 피디수첩이 의혹을 제기하기 전까지, 티비를 통해 유명해진 이 사기꾼의 행태를, 사회의 공적 이익을 위해 폭로한 음성학자가 없었다는 건 수치스런 일이다. 어쩌면 그건 과학계 자체가 이미 권위에 길들여져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국의 과학자 모두가 작은 배명진일지 모른다. 임팩트 팩터 같은 저널의 권위가 연구자의 연구역량을 측정하는 현실에서, 그 몇 점 안되는 숫자에 연연하며 자신의 직위 하나를 지키겠다며 살아가는 과학자들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배명진 같은 사기꾼의 출현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배명진 사태는, 그런 사기꾼 하나를 웃음거리로 만드는데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아마 또 다른 배명진이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자 사회가 지녀야만 할 조직적 회의주의의 전통이 한국 과학자 사회에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는 체계의 건강성은 신경 쓰지도 않고, 자신의 이익에만 골몰하는 한국의 이기적 과학자들, 그것이 배명진 사태를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다.
배명진 같은 사기꾼을 감별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과학적 사기 감별 매뉴얼이다. 첫째, 복잡한 세상 일을 아주 명쾌하고 단순하게 설명하는 이들을 신뢰하지 말라. 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한계는 분명하다. 과학의 설명력은 아주 좁다. 사이비 종교의 교주처럼 보이는 소위 전문가 대부분을 의심하면 된다. 의심은 과학의 출발이다. 둘째,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과학자의 발언을 신뢰하지 말라. 진지한 과학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연구실과 학회 그리고 학술지를 통해 연구를 발표하고 소통한다. 과학자가 대중과 소통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필요한 만큼이면 된다.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보다 만물박사의 이미지로 티비에 나오는 건 반길 일이 아니다. 세상엔 그런 과학자가 없다. 과학자가 셀럽이 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연구가 세상에 기여해서가 아니라, 그가 과학을 그저 쉽게 대중에게 선전한다는 이유로 셀럽이 되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과학을 대중에게 쉽게 설명하는 일은 전문적인 분야다. 과학소통가의 역할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들 모두가 과학자인 것도 아니고, 그들의 말이 과학적 권위를 지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리하자. 자신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모르는, 티비에 나오는 모든 전문가를 의심하라. 그러면 배명진 같은 사기꾼은 이 사회에 뿌리내릴 수 없다. 얼마나 간단한가.
김우재, 급진적 생물학자
※주석
1. 우리가 도대체 왜 숫자에 권위를 부여하는 본성을 지녔는지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진화심리학적 분석을 시도하려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저 이 혼란한 세상에서 그나마 숫자가 믿을만하지 않느냐고 말하고 이 문제는 덮어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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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협주곡은 두 명의 과학자와 한 명의 과학사학자가 함께 써가는 과학 주변의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어디로 흐르게 될지 우리도 알지 못합니다. 마치 재즈처럼, 세 명의 필자는 앞 사람이 쓴 글과 맥락이 닿는 이야기들로 과학의 현실과,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해 짧은 단상들을 늘어 놓게 될 겁니다. 과학계의 현실을 지적할 땐 치열하게, 과거를 가져 올 땐 차갑게, 그리고 대안과 함께 미래를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과학으로부터 훈련받은 그리고 과학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과학적인 태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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