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과학협주곡’ 연재를 통하여 미국의 의생명과학 분야의 과학 후속 세대 양성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다룬 적이 있다
1. 미국의 과학 인력 양성 정책이 과연 한국의 과학 현실에서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 의아해할 독자도 있겠지만, 미국이 세계의 의생명과학 연구와 과학 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과학계에서의 연구 인력의 이동의 장벽은 다른 직업군에 비해서 훨씬 낮아서
2 한 나라의 과학정책의 변화가 쉽게 타국의 과학자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미국의 과학정책의 변화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미국 과학, 공학, 의학학술원 연합체 (National Academies of Sciences, Engineering and Medicine)에서 최근 발간된 “The Next Generation of Biomedical and Behavioral Sciences Researchers : Breaking Through”
3 라는 보고서에서 제시된 미국 의생명과학의 차세대 연구인력의 문제와, 이의 극복 방안으로 권고된 내용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들이 브릭의 주 독자들인 한국의 (혹은 한국 출신의) 생명과학 연구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미칠 영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미 다수의 보고서와 논문을 통해서 미국의 의생명과학 분야의 인력 수급과 이들을 소화할 일자리의 불균형에 대한 문제가 지적되었다. 즉, 1973년에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의 55% 가 6년 안에 정년트랙 연구자가 되었지만, 2009년이 되자 이 비율은 18% 로 줄어들었다. 반면 의생명과학 분야의 박사학위자의 80% 는 졸업 후에 포스트닥(이하 포닥) 을 시작하게 되며, 적어도 과반수 이상의 박사학위 취득자는 수 년의 포닥을 수행하고도 학계에서 정년트랙 연구자가 되지 못하고 다른 분야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또한 미국국립보건원 (NIH) 에서 처음 연구비를 수혜 받는 연구자의 평균연령은 2016년 현재 43세에 달한다. 즉 재정적으로 독립된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학부 졸업 후 대학원과 포스트닥 과정을 포함하여 거의 20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며, 그나마 이것은 극히 선택된 극히 일부에게나 가능하다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어려움은 많은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연구자의 길을 회피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이것이 미국의 의생명과학 분야 발전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적인 전망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문제를 어떤 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 이러한 문제는 의생명과학 분야의 박사 인력이 과다 배출이 그 원인이며, 이의 궁극적인 해결은 박사 인력의 배출 조절 및 일자리의 증가 이외에는 다른 방안이 없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너무나도 많이 배출되어버린 박사 인력과 학위과정중에 있는 대학원생들이 필수적으로 거치게 되는 과정인 포닥 제도의 변화를 통하여 점진적인 변화를 유도하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다.
이번의 보고서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 여러가지의 권고안이 제시되었는데, 이 중 연구자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파급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것은 다음의 3가지 이다. 첫번째 권고는 연구 책임자가 수혜 받는 연구비로부터 포닥의 인건비를 주는 기간을 최대 3년으로 한정하는 제안이다. 연구 책임자가 수혜 받는 연구비를 재원으로 포닥을 고용하여 이의 인건비를 지급하게 되면 결국 포닥은 독립적인 연구자로의 성장보다는 연구 책임자의 관심사를 대신 수행해주는 고용 인력이 될 수 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자신이 독립적인 연구자로 성장할 만한 소양 및 연구 주제를 발굴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이 이러한 제안에 깔려 있는 문제 의식이다. 물론 현재 미국의 의생명과학 분야의 포닥을 3년 이내로 수행하고 테뉴어트랙 교수 등으로 임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이 실제로 수행된다면 포닥 3년차를 마치고 부득이하게 포닥 자리를 그만두어야 하는 사례가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것과 관련이 있는 두 번째 권고는 연구책임자가 아닌 포닥에게 직접 주어지는 인건비 성격의 펠로우십 (Fellowship), 캐리어 개발 그랜트 (Career Development Grant)와 같은 지원 과제의 건수를 현행의 5배로 늘리자는 제안이다. 즉 연구책임자로부터 지원을 받는 포닥의 기간은 줄이는 대신, 앞으로 연구 책임자로 성장할 수 있는 포텐셜을 보여주는 연구자들에 대해서 직접 지원함으로써 앞으로 독립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포닥에게 직접 수여되는 연구비는 연구책임자의 연구비에서 고용되는 포닥과는 달리 3년의 시간 제한을 두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다.
세번째의 권고는 현재 의상명과학계의 포닥 인건비의 기준처럼 사용되는 미 국립보건원 (NIH)의 펠로우십 (Ruth L kirkstein Individual National Research Service Award)에서 규정된 급료를 현재 수준보다 인상함으로써 전반적인 포닥의 급료 수준을 인상하겠다는 것이다.
아직은 권고안 수준의 제안이지만, 이러한 권고들이 실제로 제도화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제일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은 포닥의 급료 수준이 전반적으로 인상되면 전체적인 포닥의 숫자는 지금보다 줄어들게 될 것이고, 연구책임자의 연구과제로부터 인건비를 지원받는 것은 최대 3년으로 제한되므로, 포닥을 시작한지 3년 내에 펠로우십 혹은 그랜트를 수혜 받을만큼 확고한 연구실적이나 독립연구자로 성장할 자질을 보여주지 못하면 포닥을 더 이상 하지 못하고 다른 진로를 알아보아야 할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다. 물론 해당 보고서에서는 스탭 사이언티스트 (Staff Scientist)의 고용을 늘려서 독립연구자가 되지 못하는 연구자들을 수용하여 포닥보다 좀 더 안정적인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지만, 과잉 배출된 상태인 박사소지자를 다 수용하기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권고안이 제도화되어 정착되면 점차 포닥은 3년 안에 독립연구자로의 자질을 입증할 수 있을만한 자신만만한 사람만이 걷는 경로가 될 것이고,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달리 진로가 보이지 않아 포닥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선택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은 원래 의도한 학계의 연구 책임자로써의 성장을 위한 트레이닝 과정이라는 포닥의 본래의 취지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계 이외의 다른 직업적 옵션이 증가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규정이 강제된다면 그나마 저임금 임시직 일자리인 포닥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5년에서 3년으로 줄어드는 것에 그칠수도 있다. 어차피 현재의 권고안을 읽다 보면, 포닥 자체로의 진입을 억제하여 인력 과잉을 해소하자는 강력한 의도가 엿보인다.
미국의 포닥 지원 제도가 변화하는 것이 과연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인 한국의 (한국 출신의) 생명과학자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물론 이러한 권고안이 실제로 제도화되려면 적어도 몇 년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이므로 지금 현재 포닥을 하고 있는 과학자보다는 학위과정에 있는 대학원생에게 더 큰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러한 제도상의 변화는 1990년대 국내의 대학원 박사과정이 활성화된 이후 흔히 많은 국내 박사 학위취득자들이 걷던 길, 즉 ‘국내 대학에서의 박사학위 취득 – 해외 유명대학/연구소에서의 포닥 – 저명 논문 발표 – 국내 연구기관에서의 정규직 임용’ 과 같은 캐리어 패스를 크게 한정할지도 모른다. 즉 포닥의 인건비 수준이 올라가면 전체 포닥의 숫자는 감소하며, 또한 3년 후 펠로우십이나 그랜트를 확보하지 못하면 더 이상 연구책임자에게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은 상대적으로 외국에서 학위를 취득한 과학자들이 미국에서 포닥으로 연구할 기회를 감소시킬 가능성이 높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1990년대 이후 국내 대학원의 양적 팽창에는 국내 연구비 규모의 증가나 BK21 등의 대학원생 육성 사업의 덕도 있지만, 국내에서 배출된 박사학위자들을 해외에서 포닥으로 수용해 주던 상황도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즉, 1990년대 이전에 한국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필요한 박사급 인력의 양성은 해외의 대학에 ‘아웃소싱’ 했다고 한다면, 이들이 귀국하여 교수로 임용된 이후 국내 이공계 대학원이 활성화된 이후 배출된 많은 박사급 인력들의 포닥으로써의 트레이닝 (및 이들을 수용할 임시직 직장으로써의) 은 외국의 연구기관에 위탁한 셈이다. 그러나 최근의 변화들은 이러한 한국의 독특한 (?) 인력 양성 방식이 더이상 유효할지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 현재까지 주로 대학원생을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국내의 대학 및 연구기관이 앞으로도 포닥으로 연구할 만한 큰 매력을 주지 않는 기관으로 남아있는 상황에서 점차 해외 포닥의 기회가 줄어들게 된다면, 연구자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점점 국내 대학원의 진학에 대한 매력은 사라질수밖에 없다. 특히 아직도 국내 대학원과 해외 대학원에서의 지원수준의 격차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 곧 닥쳐올 대학원 진학 연령대의 젊은이의 급격한 감소, 소위 ‘인구 절벽’ 까지 생각하면, 현행의 대학원생 위주로 발전한 국내 대학의 연구 환경도 조만간 큰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다.
결국 자신이 연구책임자, 포닥, 대학원생 등 과학계의 어떤 위치에 있든 미래의 연구 환경은 크게 변화하고 있으며, 과거의 경험에만 의존하여 변화를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큰 불이익을 당할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 특히 학문 후속세대의 양성은 과학계의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서 정확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의 결과는 심각하다. 과학계의 최고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학술원들이 학문 후속세대의 장래와 같은 문제에 지속적으로 천착하는 것은 학문 후속세대의 종말은 자신들의 기득권의 종말과 동일한 일이라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절박함을 한국의 과학유관단체나 정부에서 찾아보기는 그리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면 한국의 과학계는 번식에 실패한 생물종이 서서히 멸종의 위기를 맞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을 것이다.
※주석
1. 과학협주곡 “미국의 의생명과학은 어떻게 망가졌는가” 를 참조하라
/myboard/read.php?id=281944&Board=news2. 과학협주곡 ‘유목민으로써의 과학자’ 를 참조
/myboard/read.php?id=286118&Board=news3. https://www.nap.edu/catalog/25008/the-next-generation-of-biomedical-and-behavioral-sciences-researchers-breaking남궁석 (MadScientist in Secret Lab of Mad Scien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