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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일 많은 대학원생의 피땀눈물] 연구노트를 잘 씁시다
Bio통신원(변서현)
(1876년에 쓰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연구노트. 전화기를 발명한 그 사람이 맞다.
출처: Alexander Graham Bell - page 40-41 of Alexander Graham Bell Family Papers in the Library of Congress' Manuscript Division)
이번 주에는 연구노트를 정리했다. 평소 실험할 때는 이면지를 클립 파일에 끼워 실험할 때 들고 다니면서 편하게 기록을 하는 편인데, 낱장의 종이 뭉텅이를 그냥 둘 수는 없어 주기적으로 연구노트에 꼼꼼하게 정리해 둔다.
사실 연구노트는 실험할 때 항상 옆에 두고 작성하는 것이 맞다. 이면지가 아니라 절대 낱장으로 분리되지 않는 튼튼한 연구용 노트를 사용해 기록해야 한다. 하지만 들고 다니기 번거로울 정도로 무겁고, 편평하게 펴지지 않아서 들고 쓰기도 어렵다 보니 이면지나 다른 스프링노트에 적고 나중에 옮겨 적어 놓는 경우가 많다. 변명이지만 결국 게으르고 귀찮아서 그렇다. 그렇게 이면지들이 한 장 두 장 쌓여 종이 뭉치가 되어 있고, 자주 정리해야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한참 동안 정리하지 않았다가 이번에 끝장을 봤다. 그래도 그 종이들에 모두 날짜를 적어 두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학부 때 실험 수업에서는 연구노트를 작성하는 걸 아주 엄격하게 배웠다. 실험 시작부터 끝까지 분 단위로 어떤 행위를 적었는지 기록했고, 아주 사소한 실수나 특이사항까지도 적었던 기억이 있다. 다른 사람이 연구노트만 보고도 실험을 똑같이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배워서, 정말 꼼꼼하게 디테일을 가득 넣어서 노트를 썼다. 어느 날에는 실험이 망해서 ‘ㅠㅠ’라고 우는 이모티콘을 그려 놓았다가 조교님께 혼나기도 했다. 결과들도 모두 인쇄해서 오려 붙였는데, 심지어는 NCBI BLAST를 돌려본 기록까지 모두 캡처해서 DNA 염기서열로 가득한 그림들을 연구노트에 붙여 놓았다.
대학원에 와서는 이렇게까지 열심히 연구노트를 적고 있지는 않다. 처음 실험을 배울 때에는 아주 자세히 적고 주의사항이나 코멘트들을 모두 적었는데, 실험이 익숙해지고 나서는 주로 매 실험마다 바뀌는 조건들 위주로 적는 편이다. 마우스의 대장에서 T세포를 분리해 분석해야 하면 마우스가 자란 조건과 DOB(Date of Birth), 유전자 변이, 분석 타깃이 되는 단백질들과 형광 항체 종류 정도만 적어 놓는 식이다. 대장에서 세포를 분리해 형광 항체로 염색하고 분석하는 과정은 항상 같으니 말이다. 그래도 당일에 특별히 있었던 일이나 특이점, 샘플에서 보이는 variation 등은 꼼꼼하게 적으려고 노력한다. 같은 그룹에 있는 마우스 다섯 마리 중 한 마리의 상태가 유독 안 좋을 경우나, 세포를 조직에서 분리하는 과정에서 실수한 내용 같이 실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관찰들이다. 심지어는 2017년에 있었던 포항 지진도 연구노트에 적혀 있다. (지역 전체가 정전이 되어 샘플들이 인큐베이터와 원심분리기에 들어가 있는 상태로 1시간 이상 방치되었으니까.)
(내 연구노트엔 이런 내용도 있다! 지금은 무용담마냥 자주 내놓은 사건이 되었지만 그때는 정말 힘들어했던 기억. 어떤 샘플이 어디에서 어떻게 방치되었는지 적어놓았다.)
이번에 연구노트를 정리하면서는 잠시 중단했던 프로젝트의 실험들을 많이 리마인드 했다. 프로젝트를 멈추면서 몇 가지 실험들을 쉬었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어서 어떻게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실험들이어서 내가 어떻게 실험했고 조건과 일정을 어떻게 짰는지 복기하는 데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당시에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도 다시 확인하면서, 실험 조건들을 다시 잡고 있는 중이다.
사실 실제 연구실에서 실험하면서 느낀 것은, 많은 실험 결과들이 디지털화된 파일로 존재하게 되어 종이 연구노트에 기록하는 데에 한계가 생겼다는 것이다. 전기영동을 내린 젤 사진은 인화지에 인쇄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 파일로 만들고, qPCR이나 ELISA처럼 수치화한 값만 나오는 실험도 있다. FCS라는 확장자로 저장되는 유세포 분석(Flow cytometry) 실험처럼 아예 전용 프로그램을 써야 열리는 결과도 있다. 시퀀싱 데이터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Prism처럼 데이터를 그래프로 만들어주는 프로그램도 흔하게 쓰인다. 데이터뿐만 아니라, 실험 조건들도 엑셀이나 파워포인트에 작성해서 기록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계산을 하거나 표를 만들기 쉽고, 손글씨보다 인쇄한 글씨가 더 읽기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부 때 배웠던 연구노트 작성과 다르게, 실험하기 전에 만든 기록과 결과의 기록이 함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조건들을 적어 놓은 엑셀 파일, 실제 실험하면서 적은 종이, 그리고 최종적으로 나온 결과 파일까지 다 분리되어 있어서, 마치 패키지처럼 묶어 보관해야 한다. 물리적으로 묶는 것이 아니라 키워드나 날짜를 잘 기록하고 실험 계획과 결과를 동기화해서 필요할 때 꺼낼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아주 중요해졌다. 특히 최근에는 학술지들이 표절과 실험 결과 조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실험 결과의 Raw data를 요구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이 그래프에 있는 점들이 몇 월 며칠 어느 실험에서 나온 결과인지 파악하는 것이 필수가 되었다.
최근에는 전자연구노트도 많이 쓰이는 것 같다. 방송에 나온 어느 대기업 연구소에서는 화합물의 구조식을 컴퓨터로 그려 넣고 실험기록들을 타이핑하고 있었다. 전자펜을 이용해 종이에 글씨를 쓰면 그대로 서버에 동기화하는 시스템을 사용하는 연구실도 있었다. 포항공대는 얼마 전 전자연구노트 시스템을 대학 차원에서 구축했는데, 아직 사용해보지는 않았다. 전자책으로 독서하고 아이패드에 필기하는 것이 일상이 된 시대이니 연구노트도 완전히 디지털화되는 것이 멀지 않은 듯하다.
논문을 쓸 때나 연구과제의 계획서와 보고서를 쓸 때, 랩미팅에서 발표를 할 때도 모든 자료는 연구노트를 기반으로 하게 된다. 그 형태가 종이든 클라우드 서버에 올라간 그래픽 파일이든 말이다. 실험의 재현뿐만 아니라 연구 프로젝트의 실재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료가 연구노트일 것이다. 누군가 나의 연구 결과를 의심해도, 제대로 작성된 연구노트가 있다면 무서울 것이 없다. 반대로 내 연구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다면 누가 내 연구를 의심할 때 반박할 수 있을까. 모든 기록은 나의 행위를 변호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수원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흔치 않은 ‘복원된’ 문화유산이다. 유네스코는 현대에 와서 복원한 건축물은 대부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지 않은데, 수원 화성은 그 벽을 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기록’에 있다. 수원 화성을 처음 건축하던 조선 정조 때 화성의 설계도면은 물론이고 사용한 거중기의 형태 등 건축에 필요한 모든 내용을 ‘화성성역의궤’라는 기록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만들어내는 데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상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연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논문이 잘 정리된 보고서라면, 연구노트는 보고서와 함께 보관해야 할 ‘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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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으로 이미 출판된 지식이 아닌, 지식이 만들어지는 연구의 과정을 현장의 연구자이자 대학원생인 필자가 경험을 토대로 소개합니다. 연구실에서 있었던 일, 연구자들 간의 대화 등을 소재로 한국의 연구실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작은 의견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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