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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자기성장 Self-Discovery Lab] 나는 오리보다 못한 카이스트 대학원생, 싱가포르 날다 (4부)
Bio통신원(닥터헬렌킴SG)
<제1 장>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 문이 열린다, 싱가포르 영주권 취득과 극적인 내 집 마련
한국의 차가웠던 날씨에 얼은 몸을 녹여주는 싱가포르의 뜨거운 공기가 유난히 반가웠던 날, 밤을 달려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간다.
실망감을 가득 안고 한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우편함에 이민국에서 보내온 두툼한 봉투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신청한지 6개월 만에 온 가족의 싱가포르 영주권을 취득한 것이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 문이 열린다’라는 헬렌 켈러의 말처럼...
작년에 겪었던 남편의 계약 연장 불가 소동으로 서둘러 신청한 영주권이 이번에는 나를, 아니 온 가족을 살리게 되었다.
영주권이 있으면 싱가포르의 국민연금에 해당하는 CPF를 지원받게 되어 월 급여가 17% 상승하는 효과가 있고, 무엇보다 취업비자가 없는 상태에서도 싱가포르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마음에 안정감을 준다.
또한 아이들 공립학교 진학에도 외국인 신분보다는 입학 우선권과 학비 혜택이 있어서, 갓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큰 아이와 앞으로 특수교육을 받아야 하는 둘째를 생각하면 절실한 선택이었다.
그 해 4월 연구소에서는 작년 나의 퍼포먼스 평가에 두 달 반 급여를 보너스로 지급하였고, 하우징 베네핏 금액도 올려서 계약이 종료되는 10월까지 달콤하고 쌉싸름한 구직기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간다는 마음을 정리하고 나자 오히려 나는 없던 용기들이 샘솟는 거 같았다.
가족들이 안락하게 머무를 수 있는 집을 어서 마련하고 싶어서, 영주권 취득 후 한 달 만에 렌트하던 동네와 가까운 곳에 집을 샀다.
한국에서는 싱가포르의 집값이 매우 비싼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곳의 국민과 영주권자들을 위한 HDB라는 한국의 주택공사에 해당하는 공공 아파트가 있다.
지역에 따라서 가격 차이는 나지만 평범한 동네의 평범한 집은 30평 기준으로 4억 미만에 아파트를 매입할 수 있다.
대전 유성터미널 근처의 작은 원룸에서 보증금 300만 원에 시작한 신혼 생활이었기에, 싱가포르에 와서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거주하는 수영장과 바비큐핏이 딸린 콘도 (프라이빗 아파트) 를 나는 고집하지 않았다.
HDB 아파트의 매매는 부동산이 아닌 관공서에서 진행하며, 최종 잔금을 건네고 입주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나는 에이전트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헬렌, 유노 유아 쏘 럭키 레이디? “
그의 설명인즉 싱가포르 부동산 값의 급등으로 정부가 신규 영주권자의 정부 아파트 구매 자격을 3년간 지연했다는 소식이었다.
발표 당일로 적용되기에 1차 계약자는 소급 적용을 받고, 이미 소유권 이전 프로세스가 끝난 우리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았다.
내가 조금만 늦었다면 또다시 급여의 절반을 렌트비로 내면서 3년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마녀 대신 천사가 우리 가족을 위해서 미소를 지어준 것만 같아서 나는 힘든 구직의 시간들을 기쁜 마음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게다가 집값의 80%에 해당하는 은행 빚을 내었으니 도망칠 수 없는 강한 취업의 동기가 눈앞에 있지 않은가?
이제는 정신 바짝 차리고 직업을 구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는데…
사진출처| Photo by Gleren Meneghin on Unsplash
<제2 장> 두 개의 포스트닥 오퍼, 익숙하지 않은 것을 선택하다.
인더스트리의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각 포지션이 원하는 직무와 나의 경험을 제대로 연결하지 못하고 지난 10여 년 동안 Bio NMR 연구자로서의 경력만 내세우고 있었다.
또한 그들이 필요하지 않은 싱가포르와 한국의 바이오를 연결을 시키겠다는 나의 바람을 담아서 향후 계획에 대해서 제시했다.
싱가포리언 동료들은 NEB나 프로메가(Promega), Vexter 등 글로벌 라이프사이언스 회사의 테크니컬 세일즈 포지션으로 하나 둘 취업을 했고, 또한 싱가포르 중소기업청의 기술지원 팀의 공무원으로도 이직해 갔다.
8월이 되어 나는 내키지는 않지만 남편이 있는 대학의 Bio NMR 포스트닥 포지션에 원서를 내었다.
면접을 보았고 이미 나의 이력에서 교수님이 원하는 핵심 경력이 있었기에 두 번의 인터뷰를 거처서 오퍼가 진행되었다. 그 핵심 경력이라 함은 내가 박사 졸업 연구 주제였던 BLM 단백질이 인터뷰한 랩의 새로운 펀딩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편과 같은 난양공대(NTU) 캠퍼스로 출근할 수 있는 나쁘지 않은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왕 연구직이라면 새로운 기술을 익힐 수 있고 신약개발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포지션을 원했다.
오퍼 레터가 오는 동안 나는 또 한 번의 인터뷰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바이오폴리스에 있는 NTU 랩이었는데, CETSA라는 Thermal shift assay 법과 X-Ray 구조 결정학을 통해서 fragment based drug design을 하는 연구실이었다.
PI는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P 교수님으로 Science에 여러 번 논문을 내시고 제약사와의 협업과 스타트업 연속 창업을 하신 분이었다.
아카데믹 랩이지만 마치 작은 연구소처럼 organic chemist, X-ray 팀, cellular assay, 질량분석 팀으로 이루어졌고, PPP라는 싱가포르 전 RI를 대상으로 연구용 단백질 컨스트럭트(construct) 제작 및 생산 서비스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었다.
스웨덴, 폴란드, 아르헨티나, 호주, 싱가포르, 중국, 인도 등 다양한 국적의 동료들과 biophysical method를 결합하여서 약물내성 타깃에 대한 새로운 저분자 화합물을 디자인해 나간다는 것은 낯설지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연구직에 도전할 만한 매력을 풍겼다.
결국 두 개의 오퍼 중 나는 이미 익숙한 단백질과 바이오 NMR 대신에 스웨덴 문화와 Fragment Drug Design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선택했다.
덕분에 출근 전 두 달의 여유를 갖고서 새로 이사한 집을 정리하고, 앞으로도 익숙한 바이오폴리스에 머물 수 있는 최선의 방향으로 한발 내디딜 수 있었다.
사진출처|Photo by Jon Tyson on Unsplash
<제3 장> 과학에 대한 냉철함과 사람에 대한 따스함이 공존하는 스웨덴 그룹 생활 속의 허전함
지금 생각해 봐도 참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삶과 사람에 대한 여유가 있었고, 매주 랩 미팅 및 신약개발 그룹 간의 공동 세미나 시간은 과학에 대한 진지함과 냉철함이 존재했다.
싱가포르와 스웨덴의 실험실을 오가며 바쁘게 지내는 교수님 대신, 부부 그룹 리더인 Dr. A 와 Dr. N 은 실험 결과에 대한 디스커션 외에도 가끔 랩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생일파티나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였다.
그들이 지내고 있는 싱가포르 홀랜드 빌리지의 주택은 IKEA를 재현한 듯한 북유럽의 인테리어 소품으로 멋지게 꾸며져 있고, 마음 착한 동료들이 가져온 각국의 음식들을 한데 모아서 나누는 시간은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나는 매일 마음을 다잡으면서 열심히 해야 해서 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 포스트닥들은 어느 날 갑자기 새로 생기는 연구소의 행정직이나 메디컬 라이터 (Medical Writer)로 가게 되었다며 이별을 통고했다.
그리고 제약회사 연구소에서 NTU 교수로 부임했던 Dr. T는 탱고를 기가 막히게 잘 추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Dr. I의 박사논문 지도를 마지막으로 A 컨설팅 회사로 옮기게 되었단다.
다들 함께 웃고 파티를 하면서도 그들은 미래를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실험들을 하면서 고군분투하던 나는 이 계약을 마치고 다시 연구직을 선택할 자신이 없었다.
동료들의 Farewell 파티마다 나는 남겨진 자의 슬픔을 속으로 삼키며 자꾸 타인들과 나를 비교하고 있었다.
떠나는 자는 인더스트리가 원하는 실력을 갖춰서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남아 있는 동료들은 자신의 분야에 확고한 실력과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들이었다. Dr. C는 호주 싱크로트론에 가서 실험을 하고 약물 결합 구조를 밥 먹듯이 풀어내고, Dr.R은 그의 발표를 들으면 나도 마치 질량분석을 전공해야 할 것처럼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속한 그룹의 리더인 Dr.A 가 자신은 다른 그룹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얘기해 주었다.
나는 또다시 남겨진 외로움과 원하면 이직이 가능한 실력자들 속에서 나만 미생으로 머무는 것만 같아서 자신감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제4 장> 세상에서 가장 슬픈 생일날
2015년 12월, 나의 38번째 생일날 아침.
나는 싱가포르 바이오폴리스 언덕길 초입에서 현기증과 가슴 막힘에 차마 언덕을 오르지 못하고 카페에 털썩 주저앉아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며... 차마 출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한 주 전 2016년 3월까지 나의 랩 생활을 정리하는 것을 결정한 터였다.
어쩌면 남들이 내가 실험실 생활을 겨우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스웨덴 교수님의 미안함이 담긴 통고에 내 숙제를 대신 해준 것만 같아서 속이 후련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일날, 내 동료들은 나의 마음도 모른 채 그날따라 애플 사이더와 카페에서 예쁜 케이크를 사 와서 나를 축하해 주었다.
나는 동료들이 너무 고마웠지만 무너지는 내 기분을 주체할 수 없어서, 가족과의 저녁식사가 있다는 핑계로 오후 일찍 랩을 나섰다.
그리고 나는 시내의 미술관으로 가서 그냥 미술관에 머물렀다.
조금 지나자 하늘에서 세차게 장대비가 쏟아진다. 그 비를 보며 한참을 그렇게 미술관에 서 있었다.
2010년 8월 싱가포르에 올 때, 향후 5년 동안 내가 연구직에 남을 만한 업적을 세우지 않는다면 나는 장수생을 택하기보다는 미련 없이 인더스트리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드디어 때가 왔고, 이제는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앞에 다가왔는데 아직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다.
사진출처|Photo by Max Bend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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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에서 Bio NMR을 전공하고 싱가포르 A*STAR 신약개발 연구소에 취업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온 세상이 장미빛. 뷰리풀~그러나 5년의 포스트 닭(Post-Doc) 기간 동안 나는 랩에서 평생을 보낼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고 울면서 맞이한 38살 생일을 기점으로 나는 랩을 떠나 차가운 거리로 나선다. 지금은 싱가포르에서 한국 임상회사의 지사를 이끌며 매일 아침 일하고 싶어서 눈뜨는 한국 K-Biotech을 위한 전략적 글로벌 헬스케어 사업개발이라는 직무를 찾았다. 곡기를 끊고 싶었던 어려움을 이겨내고 맞춤옷 같은 나의 천직을 발견하기까지 나는 그 길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겪었을까? 그리고 내게 맞는 인더스트리 직업을 어떻게 찾았을까? 혹시 당신도 같은 아픔을 겪고 있다면 나의 연재가 한줄기 빛을 제시할 것이다. 운영 중인 수상한 랩실, Self-Discovery Lab (https://blog.naver.com/ttkkii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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