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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삐삐.... 고요한 주말 저녁, 연구소의 터줏대감인 나, 딥프리저*(Deep freezer, 초저온 냉동고)는, 어쩔 수 없이 경고음을 흘려보낸다.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너무 더워 일을 하기가 어렵다. 올여름, 유난히 덥다더니, 에어컨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나 보다. 집에서 사용하는 냉장고도 안은 차갑지만, 밖(뒤)은 뜨겁다. 나는 열을 빼앗아 밖으로 내보냄으로써, 내 안의 공간을 차갑게 만드는 기계다. 그것도 영하 80도의 극저온 상태를 만들어야 하므로, 일반적인 냉동고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만큼 발생하는 열도 심하다. 항상 반대급부가 있기 마련이라, 어디를 차갑게 하려면 어딘가는 더워야 한다. 더운 주변 조건에서는 이 일이 어렵다. 시원한 공기와 쾌적한 환경은 사람에게도, 나 같은 기계장치에도 중요하다.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가 더 오래 지속되면, 내 안에 보관되어 있는 시료는 모두 변질돼 버린다. 연구자 A가 입사 이후부터 최근까지 공들여 구축한 소중한 연구 자산이 허무하게 날아간다. 구조팀이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저장하는 것은 나중에 활용하기 위함이다. 흐름을 위한 멈춤이다. 모아서 쌓아두기만 하면 여러모로 난감한 일이 발생한다. 우선 나 같은 커다란 장비를 계속 늘리다 보면, 비용 문제도 있지만, 공간이 금방 부족해진다. 요즘은 나를 대체하는 거대 로봇 시스템이 도입되기도 하는데, 그 또한 무한정 늘어나는 시료를 감당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콘크리트 건물이 팽창할 리는 없어서, 추가적인 공간 확보란, 기관 경영자에게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료도 시간이 지나치게 지나면 변성의 우려 등으로 인해 그 활용 가능성이 낮아진다. 저장한 시료는 적극적인 분양을 통해 활용성을 높이는 것이 상책이다. 오랜 재직 기간 동안 시료를 모아 오던 연구자 B가, 어느 날 퇴사한다. 해당 시료는 폐기하고 타 연구자를 위해 공간을 배정해야 한다, 중요한 시료이므로 계속 보관해야 한다, 언젠가는 후임 연구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낮다, 는 말들이 엇갈리기만 한다. 누구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강력한 리더십이 등장하여 시료를 폐기하고 정리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신청 후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연구자에게 공간이 배정된다. 아끼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동물은 추우면 겨울잠을 잔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지만, 죽는 것은 아니다. 잠은 깨어남을 전제로 한다.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죽이는 것이나, 얼리는 것은 임시로만 그렇게 했다가 나중에 다시 소생시키는, 일종의 고급 기술이다. 집 냉동실에 넣어둔 떡은 딱딱하게 굳었다가도 꺼내놓으면 먹기 좋게 다시 부드러워진다. 겨울왕국의 엘사 역시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지만, 신선하게 보존되다가, 결국 그 모든 것들은 풀어지는 때가 온다. 비로소 참다운 생명을 얻는다. 혈액이나 조직 등 사람 몸에서 채취한 시료는 상온에 그대로 두면 썩어버린다. 연구자는, 경찰이 범인을 체포하듯, 시료를 잡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얼린다. 그리고 기대 조건이 충족될 때, 다시 소생시킬 때를 기다린다. 심혈을 기울여 연구 계획을 수립하며, 기다림에 가치를 더한다.
깊다는 것은 무얼까. 영하 80도. 나와 같은 기계장치가 아니라면, 지구상에서 이는 남극 정도에서나 가끔 경험할 수 있는 추위다. 딥프리저라는 명칭은, 빙점인 섭씨 0도를 기준으로, 거기서부터 아래로 깊게 내려가 얼린다는 의미다. 깊어지는 것에는 장점이 있다. 깊게 얼려야 시료의 구조와 기능이 안정적으로 보존된다. 보존되어야 다시 살아난다. 깊은 고난과 풍파 속에서도 희망은 보존된다. 어쩌면 깊은 고독은, 일희일비하지 않고,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철학자는 깊은 호수가 인간의 마음에 좋은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나는 월든 호수가 하나의 상징으로서 깊고 맑은 수심을 가진 것을 감사하게 여긴다.’**
연구자와 연구행정가는 서로 각자 분야의 깊은 식견을 갖춘 상대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소통은 빈도가 아닌 심도다. 음식의 맛도, 사람의 교양도 깊어야 제맛이다.
깊게 얼릴 때 시료는 생명력을 유지한다. 나중에 언제든 다시 꽃을 피울 수 있다. 들풀도 깊게 내린 뿌리 덕에, 겨우내 죽은 듯하다가도, 봄이 오면 초록 옷을 입고 위로 씩씩하게 내뻗는다. 깊은 소통은 사람을 살린다. 대화가 드물어지거나 끊어질 때 관계에는 위험이 닥친다. 갑자기 누가 나와 말하길 꺼린다면, 그 사이에는 이미 불신이 자리를 잡고 있다. 불신은 불편함을, 결국엔 부정적인 사태를 초래한다. 비행이나 탈선을 저지르는 자녀는 부모와의 대화를 꺼린다.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날뛰는 감정을 얼려놓고, 공감과 이성을 동원하여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좋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상대를 공격하지 않도록,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대화에 집중한다. 마음을 숨긴 피상적인 대화는 피곤함만 더한다. 승리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깊은 신뢰가 소통케 한다.
내 주특기 중 하나는 일관성이다. 나는 기괴한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 내가 만들어내는 온도는, 어제와 오늘이 같고 내일도 같을 것이다. 일관성 있는 삶을 원하는 사람은, 나를 보고 배우면 된다. 일관성은 예측 가능성이자 안전함이다. 아이는 부모의 일관성에서 안전함과 편안함을 느끼고, 성장한다. 연구자와 연구행정가의 효과적인 소통의 기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람이 변덕스러우면 믿음이 가지 않는다. 변덕에 대해선 날씨조차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반면 이맘때쯤 늘 기대하는 높은 하늘과 시원한 가을 날씨는 뭇사람들에게 환영받는다. 위기 상황에 필요한 이 역시, 자기 일을 늘 일관성과 진정성을 가지고 수행하는 사람이다.
연구자 A는 모처럼 주말에 편히 쉬다가 전화받는다. 기술직 연구행정가 A의 다급한 목소리다. 딥프리저 이상입니다. 갑자기 에어컨이 고장 났네요. 지금 시료를 임시로 다른 딥프리저로 옮기고 있습니다. 워낙 기계 자체 열 발생도 많은 데다가, 이 좁은 공간에 이렇게 많은 딥프리저가 모여 있으니까, 24시간 가동하는 에어컨이 퍼져 버렸네요. 긴급 조치를 해보긴 하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그나마 백업용 딥프리저가 이상이 없어서 다행이네요. 아, 네, 수고 많으시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곧 나가 볼게요. 구조팀이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도착한 덕에, 내가 보관하던 시료는 무사하다. 얼마 안 있어 시설은 보수되고, 나는 재가동된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다. 사람들은 최근 내게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어휴, 들어온 지 십 년도 넘었네. 그동안 수고 많았어. 이제 폐기 수순에 들어가자고.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진다. 아 네, 아쉽지만 이만 퇴장합니다. 저는 얼리는 일만 했지만, 여러분의 일은 술술 풀리시기만 바랄게요. 구름이 하늘에 만드는 근사한 작품처럼 각자의 멋들어진 삶, 응원합니다. 아듀.
※ 참고
*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디프 프리저’가 바람직하나, 이미 일상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명칭인 ‘딥프리저’로 지칭함
**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 2022년, p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