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밖에서도 숨 쉬는 법: 워라밸 지키는 연구자의 하루
연재
[연구실 밖에서도 숨 쉬는 법] 워라밸 지키는 연구자의 하루 5화... 나의 일상과 연구를 함께 이야기할 사람들
대학원 초반의 나는 아무리 늦게 실험이 끝나도 친구를 만나러 갔다. 밤 10시나 11시에 연구실에서 나와 친구들을 만나 두세 시간이라도 술을 마셨다. 시간이 늦은 만큼 짧은 시간 안에 많이 놀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지 술도 굉장히 빠르게 많이 마셨고, 안주도 많이 먹었다. 새벽 두세 시에 집에 들어가 몇 시간 자고 다시 출근하는 일도 흔했다.
그때는 그게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실험실에 있다가 친구들을 만나 연구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웃고 떠들다 보면 확실히 기분이 좋아졌다. 실험이 잘 안 된 날에는 특히 더 그랬다. 연구실에서 계속 같은 문제만 생각하다가 밖에 나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잠깐이라도 머릿속에서 실험이 사라졌다.
원래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친구들과 술 마시고 떠드는 것도 좋아했고, 약속이 많으면 바쁘기는 해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리 연구실 생활이 바빠도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은 어떻게든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만남이 나를 똑같이 회복시켜 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해졌는데, 어떤 모임은 즐겁게 놀고 왔는데도 이상하게 더 피곤했다. 밤늦게까지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이면 전날 스트레스는 잠깐 잊었을지 몰라도 몸은 더 힘들었다. 숙취 때문에 오전을 날리기도 했고, 집중이 안 되는 상태로 실험을 하면서 괜히 전날 너무 많이 마셨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냥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인간관계도 조금씩 바뀌다 보니,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와 사람을 만나서 회복되는 것은 조금 다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라고 해도 다 같은 친구는 아니었다. 같이 술을 마실 때 유난히 재미있는 친구가 있었고, 고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친구가 있었다. 몇 달 만에 만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친구도 있었고, 굳이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같이 밥만 먹어도 편한 사람이 있었다.
반대로 예전에는 정말 자주 만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줄어든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관계들이 아쉽기도 했다. 예전에는 친했는데 왜 이렇게 됐지 생각하기도 했고, 내가 먼저 연락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하고 속상해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관계를 계속 같은 거리에서 유지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학교가 달라지고, 직장이 달라지고, 사는 곳이 달라지면 자연스럽게 생활도 달라진다. 그 사이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바뀐다. 예전에는 정말 잘 맞았던 사람과 지금은 대화가 잘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몇 달씩 보지 못해도 다시 만나면 여전히 편한 사람도 있었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인간관계가 많이 정리됐던 것 같다. 그렇다고 누군가와 크게 싸우고 관계를 끊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는 사람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예전에는 친구가 많고 약속이 많은 것이 좋은 인간관계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특히 감사했던 것은 연구실 안에서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점이었다.
연구실 사람들과는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다. 아무래도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 연구에 관한 이야기는 훨씬 편하게 할 수 있다.
친한 친구에게 실험이 안 돼서 힘들다고 말하면 물론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내가 몇 주 동안 무엇을 했고 그 결과가 왜 그렇게 속상한지를 설명하려면 꽤 긴 이야기가 필요하다. 반대로 같은 연구실에 있는 사람은 설명을 길게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안다. 며칠 동안 준비한 실험이 한 번에 망했을 때 얼마나 허무한지, 예상했던 데이터가 전혀 나오지 않았을 때 왜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은지도 굳이 처음부터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한다.
그렇다고 같은 연구실에 있다고 해서 모두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연구 이야기는 잘 통하지만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가깝지는 않은 사람도 있고, 같이 일하기는 편하지만 살아가는 방식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많이 다른 사람도 있다.
그래서 연구에 대한 마음도 어느 정도 맞고, 동시에 사적인 이야기나 삶에 대한 생각까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이자 동료를 만나는 것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친구와 함께 갔던 인왕산 일출 등산
나에게는 그런 친구가 있었고, 그게 대학원 생활에서 정말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랩에서는 실험이나 논문 이야기를 하다가도 밥을 먹으러 나가면 연애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같은 사적인 이야기를 해도 서로 비슷한 삶의 가치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이야기를 해도 말이 잘 통하고 서로 공감대가 잘 맞았다. 같은 연구실에 있으니 서로가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실험이 잘 안 될 때 괜히 예민해져 있는 것도 이해했고, 좋은 결과가 나오면 진심으로 같이 좋아해 줄 수 있었다. 동시에 연구 외의 삶에 대해서도 서로 알고 있으니, 연구가 잘 안 된다고 해서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느껴지는 날에는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기분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연구와 삶의 이야기를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이 생각보다 큰 힘이 됐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을 꼭 만나야만 대학원 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구에 대한 생각도 잘 맞고 사적인 성향이나 가치관까지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오히려 흔하지 않은 일이다.
나 역시 모든 이야기를 한 사람에게만 했던 것은 아니다. 연구에 대한 고민을 가장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었고, 개인적인 고민을 이야기하고 싶은 친구가 따로 있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만나서 웃고 떠들고 싶은 친구도 있었다.
예전에는 한 사람과 모든 것이 잘 맞는 관계가 가장 좋은 관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꼭 그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 이야기를 공감해 줄 사람이 있고,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고, 힘든 날 그냥 같이 밥을 먹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충분했다.
특히 연구실에서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너무 외롭거나 내가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사람마다 연구를 대하는 방식도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다. 모든 면에서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각기 다른 관계에서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공감받을 수도 있다.
나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을 만나는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처럼 늦은 시간에 만나 짧은 시간 안에 술을 많이 마시는 일은 많이 줄었다. 술을 마시지 않고 밥만 먹거나, 카페에서 이야기하다가 일찍 집에 가는 것도 좋았다. 예전에는 그렇게 만나면 뭔가 제대로 놀지 않은 것 같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다음 날까지 망가지지 않으면서 기분 좋게 시간을 보내는 쪽이 더 좋다.
혼자 있는 시간도 예전보다 좋아졌다. 대학원 초반에는 약속이 없는 주말이면 왠지 심심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서 쉬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람들과 계속 붙어 있으면 오히려 피곤해지는 날도 있었고, 반대로 혼자 너무 오래 있으면 생각이 많아져서 친구를 만나고 싶어지는 날도 있었다.
결국 이것도 2화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과 있을 때 내가 편한지, 어떤 관계에서는 유난히 에너지를 많이 쓰는지, 어느 정도 사람을 만나야 즐겁고 어느 정도 혼자 있어야 다시 기운이 나는지를 조금씩 알게 됐다.
예전에는 친구가 많으면 좋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지금은 꼭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만나도 편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굳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진심으로 같이 기뻐해 줄 사람이 몇 명 있다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모두 같은 역할을 할 필요도 없다.
대학원 생활을 돌아보면 혼자 견뎌야 했던 순간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정말 혼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때는 그런 시간들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친구를 만나고 이야기하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갔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일이 생겨도 계속 연구만 생각하면서 혼자 빠져 있지는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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