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을 나와 기업으로: 좌충우돌 이직 노하우] 글로벌 제약기업 Regulatory Affairs – 규제과학 관점에서 본 연구자의 새로운 역할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사노피(Sanofi) 유럽지사에서 글로벌 허가(Global Regulatory Affairs, GRA)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전윤옥입니다. 약학대학 졸업 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학연협동과정을 통해 연구자의 길을 경험했고, 이후 외국계 제약회사 마케팅 부서를 거쳐 현재까지 약 20년간 인허가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아왔습니다. 사노피 파스퇴르 한국지사에서 백신 허가 업무를 맡으며 RA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이후 싱가포르에서는 아시아 태평양(APAC) 지역 국가들의 백신 허가를 총괄했습니다. 현재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면역질환 치료제의 글로벌 허가 전략과 적응증 확대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2. 어떤 계기로 RA 분야에 들어오게 되셨나요?
처음부터 RA를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닙니다. KIST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가던 중, 문득 연구자로서 지속해 나갈 제 미래가 명확히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깊은 고민 끝에 석사과정을 마무리한 후, 글로벌 제약회사의 RA 부서 3개월 계약직으로 입사하게 되었는데, 그 우연한 시작이 인연이 되어 어느덧 20년 가까이 이 길을 걷고 있네요. 흔히 RA라고 하면 허가당국에 제출할 서류를 준비하고 접수하는 단순 행정 업무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한 RA는 규정에 맞추어 절차를 진행하는 것을 넘어, 신약 개발 초기부터 최종 허가 단계까지 제품의 방향성을 잡고 전략적 판단을 내리는 ‘조율자(Facilitator)’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임상시험 설계 단계에서 ‘어떤 데이터를 확보해야 허가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 ‘각국 허가당국이 중요하게 여기는 과학적 근거는 무엇인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즉 연구개발, 임상, 생산, 사업개발 등 사내 모든 핵심 부서와 협업하며 제품의 전 생애주기를 함께 만들어가는 매력적인 업무입니다. 이러한 역동적인 과정이 매우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환자들에게 새로운 치료 기회를 제공하는 데 직접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껴 지금까지 RA 분야에 몸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RA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해당 국가의 규정, 가이드라인에 대한 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허가규제와 관련된 전문성은 기본입니다. 하지만, 실제 글로벌 허가 업무를 하면서 느낀 것은 오히려 ‘소통 능력’과 ‘전략적 사고’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RA는 허가당국은 물론 임상, 사업부, 약가 전략(Market Access) 담당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빠른 의사결정이 요구되는 high pressure 환경에서 효과적으로 협업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관점과 언어를 이해하고 조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단순히 현재의 규정에 근거하는 것이 아닌 제품이 개발되어 허가 시점에 도달했을 때 미래 규제 환경이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하고 이에 맞는 전략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글로벌 프로젝트의 경우, 다양한 국가의 허가당국과 허가 관련 논의를 하게 되므로 문제를 다각도로 분석하고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흔히 RA를 처음 접하는 분들은 ‘허가 서류 작성하는 부서’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문서 작성도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이지만, 글로벌 제약회사에서 RA의 실질적인 역할과 영향력은 훨씬 더 광범위합니다. 연구개발 부서가 데이터를 만들고, 임상 부서가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수행하며, 사업 부서가 시장의 니즈를 파악해 허가 이후 제품을 시장에서 성공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RA는 이 모든 정보를 융합하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합니다. 허가당국의 기준에 맞추어 허가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제품이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검토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합니다.
임상시험이 시작되기 전부터 FDA나 EMA와 협의를 통해 어떤 임상 디자인이 적절한지 논의하고, 개발 과정에서 적응증 확대 전략을 수립하고, 허가 이후 제품의 생애주기 전반을 관리합니다. 즉, RA는 단순히 허가자료를 준비하여 허가당국에 전달하는 역할이 아니라 개발 초기 단계부터 참여하여 ‘어떻게 개발해야 허가를 받을 수 있고,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규제과학(Regulatory Science) 전문가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와 유럽 모두 환자의 안전과 의약품의 품질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다만 허가당국과 기업 간의 의사소통 방식과 의사결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국가별 요구사항의 차이가 크고 각 국가별 상황에 맞춘 로컬데이터 요구나 행정 절차에서 유연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반면 유럽은 과학적 평가가 매우 체계적이고 표준화되어 있습니다. 임상 데이터의 완결성과 과학적 타당성에 대한 요구 수준이 매우 높고, 질의응답 과정에서도 논리적 일관성과 데이터 해석에 대한 깊이를 중요하게 보는 특징이 있습니다. 전문가들 간의 치열한 토론과 합의를 통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구조죠. 이러한 차이 때문에 글로벌 프로젝트를 이끌 때는 하나의 고정화된 전략을 고집하기보다는 각 국가의 규제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접근을 취하되 전체 글로벌 개발 방향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글로벌 RA의 핵심 역량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6. 지금까지 진행하신 프로젝트나 업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나 순간이 있으신가요? 있다면, 간략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특정 제품을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희귀질환 환자들에게 새로운 치료 옵션을 제공하기 위해 글로벌 허가 전략을 담당했던 프로젝트가 기억에 남습니다. 초기에는 확보된 임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충분히 승인이 가능할 것이라 프로젝트팀 모두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희귀질환 특성상 환자 수가 극히 제한적이다 보니, 데이터 해석의 불확실성이 주요 쟁점이 되었고, 데이터의 임상적 의미를 설명하고 보완하는 전략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불확실성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RA가 어떻게 전략적으로 중심을 잡고 위기에 대응해야 하는지 그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다음은 실험실의 경험을 넘어서, 제약회사 및 다른 분야로의 새로운 도전을 생각해 보신 연구자분들에게 참고가 될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7. 실험실에서 연구를 해본, 연구자 출신들이 RA 분야에 진출한다면, 어떤 부분이 강점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비록 연구자의 길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다른 방향으로 길을 틀었지만, 실험실에서 깊이 있게 연구를 해본 경험은 RA 분야에서 업무에 큰 강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RA는 과학적 데이터를 다루는 일입니다. 데이터를 이해하고 해석하여 이를 허가당국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실험을 직접 설계해 보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논문을 작성하는 경험 등은 모두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허가당국에서 제출된 데이터에 근거한 질문(Q&A)을 받았을 때, 연구자 출신들은 문제의 본질을 빠르게 파악하고 가설을 검증하듯 논리적 대응 플랜을 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연구 경험은 RA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경쟁력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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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면서, 어떤 이야기부터 해야 할까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습니다. "연구실을 나와 기업으로: 좌충우돌 이직 노하우”의 첫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를 고민했습니다.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우선 이 글을 읽어 주시는 독자분들께 조금이나마 읽어 주신 시간만큼에 부응할 수 있는 글이 될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석사과정을 마치고, 당시 산업자원부의 국책사업을 기반으로 바이오테크 분야의 연구개발을 촉진하기 위해서 전국에 지역별로 분산되어 있던 지역 바이오클러스트를 연결을 목표했던 ‘코리아 바이오허브 센터’에서 연구실을 나와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국내 제약회사(현, GC녹십자, JW중외제약)에서 약 6년간 업무를 한 경력을 바탕으로 임상시험을 수행하는 임상시험수탁기관(Contract Research Organization; CRO)에서 지금까지 약 12년간 임상시험 모니터요원 및 관리자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CRO에서 일하면서, 싱가포르와 네덜란드(암스테르담)에서 각각 임상시험 관리자(Project Manager, PM) 또는 BD(Business Development) 업무를 수행하면서, 해외 환경에서의 실무경험도 쌓았습니다. 최근에는,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BK21 사업단에서 "CRO 산업 및 관련 직무 현황"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석·박사 과정생들이 학교와 연구실을 넘어 산업 내 다양한 커리어 경로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다양한 이직 경험과 산업 현장, 그리고 교육 및 강연 활동을 바탕으로, 본 연재에서는 연구실 밖에서 연구자들이 진출할 수 있는 다양한 산업 내 커리어 경로와 각 직무의 실제 역할, 요구 역량, 그리고 이직 과정에서 겪게 되는 현실적인 시행착오를 공유해보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