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부터 박사를 마친 뒤에도 같은 기관, 같은 연구실에서 포닥을 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계약이나 차후 진로에 대한 고민을 조금은 덜 수 있었고, 그건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박사 디펜스를 마치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줄 알았지만, 나의 직장은 벨기에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이 나라는 계약서와 아날로그의 나라가 아니었던가. 8년 넘게 이 학교에서 일했는데도 나는 인사팀과 수많은 이메일을 주고받아야 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본캠퍼스에 있는 인사팀 오피스까지 여러 차례 방문해야 했다. 같은 학교, 같은 연구실, 같은 사람인데 행정적으로는 또 다른 세계가 열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처음 제대로 마주하게 된 단어들이 있었다. 흔히 농담으로 말하는 어른의 단어들 중 일부인 Barème, ancienneté barémique, ancienneté académique. 프랑스어 행정 단어들은 늘 그렇듯 하나하나는 별것 아닌 척하지만, 알고 보면 통장에 찍히는 숫자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단어들 덕분에 나는 2주 가까이 서류의 늪에 빠져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벨기에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연구자의 월급이 어떤 방식으로 정해지는지, 그리고 왜 같은 학교 같은 연구실에 계속 남는데도 이렇게나 복잡한 서류가 필요했는지 정리해보려고 한다.
대부분 포닥이 되어서 월급이 올랐다고 말하면 생각할 수 있는 범위는 어느 정도로 정해져 있다. 보통 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이거나, 연구비가 바뀌었거나, 새로운 계약을 하면서 연봉이 조정되었다고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벨기에에서도 박사 학위의 유무나 연구비 수주 기관에 따라 연봉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벨기에 프랑스어권 대학 행정에서는 조금 다른 단어가 중심에 있었다. 바로 barème이다.
2026년 기준 ULB의 호봉 기준표
Barème은 한국어로 굳이 옮기자면 급여표, 혹은 호봉표에 가깝다. 어떤 직급에 어떤 최종 학위를 가지고 고용되는지에 따라 적용되는 급여표가 있고, 그 급여표를 기준으로 월급이 정해진다. 그러니까 벨기에에서 연구자의 월급은 내가 얼마나 협상을 했냐 보다는 내가 어떤 직급의 호봉을 적용받는가와 더 밀접하게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이 부분이 많은 국가의 감각과 많이 다른 편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연구직 월급은 기관마다, 과제마다, PI마다, 계약 형태마다 체감이 꽤 다를 수 있겠다 싶은 경우가 꽤 있었다. 물론 한국에도 정해진 급여 규정과 호봉에 대한 내용이 있겠지만, 과제 인건비와 기관 내부 규정이 함께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 하지만 벨기에 프랑스어권 대학 행정에서는 barème이라는 말이 꽤 명확하게 등장한다. 이 직급이면 어떤 급여 기준을 따르고, 그 안에서 어느 단계에 해당하는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게 된다.
실제로 나의 경우에는 박사를 마치면서, barème의 기준이 아예 바뀌게 되었다. 그동안은 석사 학위 소지자인 연구자를 기준으로 월급을 계산했다면, 디펜스를 한 다음 날부터는 월급 호봉이 바뀌게 되는 것. 다시 말해, 벨기에에서 포닥이 되었다는 것은 연구 커리어의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급여표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계약을 다시 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단어는 ancienneté barémique이었다. Ancienneté는 경력, 연차, 근속 기간 정도로 번역할 수 있고, barémique는 barème과 관련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ancienneté barémique는 말 그대로 급여표 상에서 인정되는 경력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새로운 계약에서 월급 계산을 해야 할 때, 실제로 얼마나 경력이 인정이 되느냐를 반영하는 수치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 수치도 꽤 중요한데, 같은 직급으로 들어가더라도 모두가 같은 출발점과 같은 월급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박사 학위를 막 받은 사람이 바로 포닥을 시작하는 경우와, 이미 다른 곳에서 몇 년간 연구원으로 일한 뒤 포닥으로 오는 경우에는 경력 산정이 달라져야 하기 때문. 즉, ancienneté barémique는 그냥 이력서에 적힌 경력이 아니라 실제 급여 산정에 들어가는 경력이다.
이 ancienneté barémique라는 녀석 때문에, 이직을 하게 되는 경우라면 챙겨야 하는 또 다른 서류가 생긴다. 벨기에는 참 서류를 좋아하는 나라라고, 이 급여 산정에 들어가는 경력을 위한 서류가 또 있다. Attestation de services prestés라고 하는 이 서류는, 쉽게 말하면 이전 근무 경력을 증명하는 공식 서류라고 보면 된다. 이 서류는 단순히 이 사람이 우리 기관에서 일했습니다는 내용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확한 직위, 계약 시작일과 종료일, 근무율, 그리고 그 일이 유급이었는지 여부가 명시되어야 한다.
여기서 또 하나 헷갈리는 단어가 ancienneté académique 또는 ancienneté scientifique이다. 이것은 조금 더 넓은 의미의 학술 경력, 연구 경력에 가깝다. 내가 연구자로서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 어떤 연구 경로를 지나왔는지를 설명할 때 쓰이는 개념이다. 박사과정, 포닥, 연구원 경력,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의 연구 활동 등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고. 하지만 중요한 점은, 학술 경력이 곧바로 급여 산정 경력과 100% 일치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연구자로 8년을 보냈다고 해서 그 8년이 모두 ancienneté barémique로 동일하게 인정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어떤 경력이 인정되는지, 어느 정도로 인정되는지는 기관의 규정과 행정적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게 매우 큰 함정.
이런저런 설명을 다 듣고 나서, 이 둘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Ancienneté académique 또는 scientifique가 내 연구 인생의 시간표”라면, ancienneté barémique는 그 경력 중 월급 계산에 반영이 되는 행정적 시간표라고 보면 된다. 둘은 분명히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만, 또 그렇지도 않은 게 벨기에 다운 포인트. 실제로 그래서 연구자로서의 경력과, 행정적으로 급여표에 반영되는 경력 사이에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꽤 있게 된다.
솔직히 처음에 이 모든 서류들을 해결하면서 많이 당황을 하게 됐다. 이미 같은 대학에서 박사도 했고, 연구원으로도 일했고, 학교 시스템에도 내 정보가 다 있는데 왜 또 이런 서류가 필요한가 싶었다. 하지만 이런 개념들을 이해하고 나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이 서류는 단순한 행정 기록이 아니라, 내 경력이 급여표 안에서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는지를 계산하기 위한 근거 자료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물론 그렇다고 서류 처리를 하는 게 덜 귀찮아지는 것은 아니다. 귀찮은 건 귀찮은 것.
한국에서 벨기에로 박사를 하러 왔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이런 행정 언어까지 깊게 배우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실험실 생활, 논문, 영어 발표, 프랑스어 생활 회화 정도가 가장 큰 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당한 오산. 오래 살다 보니 진짜 생존 프랑스어는 행정 서류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교과서나 시험에서는 잘 안 나오지만, 실제 삶에서는 매우 강력한 단어들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잘못 이해하면 큰일 날 만한 단어들도 꽤 있다는 걸 이번에 좀 깨닫는다.
결국 이번 월급 인상은 단순히 포닥이 되었더니 돈을 더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벨기에라는 나라가 연구자의 경력과 직급을 어떤 방식으로 행정적으로 계산하고, 그 계산이 실제 월급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처음으로 체감했다. 연구자의 삶은 논문과 실험, 데이터로만 굴러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행정과 다른 변수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래도 결론은 하나다. 포닥이 됐고, 월급이 올랐다. 행정은 복잡했지만,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매우 아름다우니 좀 봐줘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