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공동 지도교수이자 친구인 알레한드로는, 세상에서 계획 없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면서도 남 인생 계획은 제일 잘 잡아주는 사람이다. 물론 그 계획은 내가 원했다고 한 적은 없다. 안 그래도 알레한드로와 같은 연구실에서 박사 과정이나 박사 후 연구원 과정을 보낸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몇 번 했는데, 나는 이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될 줄 몰랐다.
2025년 9월 말, 나는 그런 알레한드로의 연구실에 잠깐 들를 일이 있었다. 항상 그랬듯, 아침에 도착해서 커피를 한 잔 내려놓고 밀린 근황 토크를 하는 것으로 우리의 회담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이 양반이 나에게 11월 중순 즈음 해서 시간이 되는지 묻는 거다. 안 그래도 약속을 몇 달 앞두고 잡는 걸 그 누구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나의 공동지도교수이기에, 최근 들어서 해가 반대로 뜨고 있는지 물어보니 그런 게 있단다. 들어 보니 알레한드로가 핀란드의 모 대학으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았고, 그게 하필 여름에 나온 논문과 관련된 것이라고. 물론 본인이 공동 교신저자이긴 하나, 본인은 분석과 통계를 맡았다고 쓰고 나를 지도했다고 읽을 뿐, 사람 샘플이나 실험 결과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이 없어서 발표를 하는 게 맞는 가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슨 지우가 몬스터볼 던져서 파이리 소환하는 것 마냥, ‘야 그럼 니가 들어가서 니가 발표를 해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너 슬슬 날이 짧아진다고 햇빛 못 봐서 넹글 돌았니’라는 표정으로 알레한드로를 쳐다보고 있으니, 그가 하는 말은 ‘어차피 내가 발표를 하는 거 보단 이미 그 논문으로 몇 번 강연 한 니가 하는 게 품도 덜 들고 여러모로 서로 얼굴에 먹칠 안 할 것 같은데’였다. 나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고 ‘뭐라는 거야 미친놈아, 발표는 공동 교신인 너한테 부탁을 했는데 알지도 못하는 일개 학생이 뭘 하겠냐’고 물었고, 이 날 나는 하나 잊은 게 있었다. 내 친구인 알레한드로는 말을 정말 잘한다는 거고, 오죽하면 같이 연구를 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혓바닥으로 탱고를 추는 교수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는 거다. 결국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의 논리에 설득을 당해버렸고, 그렇게 11월 중순의 미팅에는 내가 발표를 하는 것으로 이메일이 오고 갔다.
그런데 웬걸. 10월 중순쯤, 이 미팅에 대한 안내 메일이 한 통 왔다. 발표 제목과 뭐 발표자 소개겠거니 하고 메일을 열어 보는데, 수신자가 핀란드의 모 대학을 포함해서 노르웨이에 미국에 아주 난리가 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메일의 서두에는 ‘벨기에 소재의 모 제약 회사와 함께 하는 프로젝트의 킥오프 미팅’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내가 뭔 판에 들어온 것인가 싶어서 머릿속이 실시간으로 블러 처리가 되어 가다가, 과연 알레한드로도 이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인가 궁금해져서 왓츠앱을 켜서 빠르게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내 친구지만 화상 아니랄까 봐, 돌아온 대답은 ‘응 사실 나는 알고 있긴 했는데 있는 대로 다 말하면 네가 안 한 다고 할 것 같아서~^^ 미팅하고 시간 잡아서 밥 한 번 살게’였다.
이미 이렇게 대규모로 내가 이 날 어떤 주제로 발표를 할 예정이라고 이미 공지사항이 발송이 되었으니, 뭐 내 공동 지도교수에게 따진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리는 없다는 게 매우 확실한 결론이었다. 뭐 누구를 붙잡고 푸념을 해 봐야 어쩌겠나 싶어서, 같은 논문을 가지고 다른 곳들에서 발표했던 자료를 모아 놓고 필요한 부분만 따서 40분짜리 프레젠테이션을 후딱 만들어 내는 것으로 발표 준비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판이 매우 크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발표 자료를 만들어 놓고 어느 구성이 괜찮을까에 대해 고민을 하며 일주일을 보냈고, 그렇게 미팅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11월 중순. 미팅 당일 오전에 내 공동 지도교수가 슬랙으로 메시지를 한 통 보냈다. ‘Klaar?’, 네덜란드어로 준비되었니?라는 뜻의 메시지였다. 이 양반이 지금 자기 일 아니라고 저러나 싶어서 한숨을 푹 쉬는 이모티콘을 하나 던져 놓는 것으로 답장을 대신했다. 뭐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미팅 시간 10분 전에 온라인 미팅에 접속했더니 이게 웬걸. 첫 번째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은 참석자가 120명이라는 거고, 두 번째로 알고 싶지 않은 건 청중 중 대부분이 교수, 제약회사, 병원에서 오는 시니어 레벨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누추한 내가 이런 귀한 자리에 참석하는 게 이들에게 괜찮았는지에 대해서 의심을 하기도 전에, 과연 내가 오늘 준비한 미팅 자료와 발표가 이들의 귀한 시간에 누가 되지 않을 것인 지에 대한 걱정을 먼저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의 호스트는 이런 나의 마음을 알고는 있을지. 너무도 해맑게 내가 보내준 CV를 가지고서 나에 대해 소개를 하기 시작하더니, 오늘 발표 주제가 왜 내 논문과 관련된 주제가 되었는지에 대한 간단한 배경 소개를 해 주었다. 알고 보니 여름에 나온 논문에서 규정한 세포 타입과, 그 타입이 발현하는 유전자가 전립선암의 악화와 연관이 있다는 것 때문이라고. 멍해질 틈도 없이 사회자는 나에게 연단을 넘겨주었고, 어떻게 발표를 했는 지도 기억이 안 나는 40분이 지나갔다. 도대체 이 발표를 어떻게 끝냈는지 조차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발표 중간에 따로 질문이 없길래 따로 질의응답이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오산도 그런 오산이 없었다. 40분 가까이의 질의응답과 토론 시간을 가졌는데, 옆에 따 놓은 1.5L 생수병을 다 비우고 나서야 미팅이 끝났다.
나중에 알레한드로를 통해 전해 듣기론, 발표를 듣고 제약회사와 대학병원 팀들은 뭘 해야 할지 대충 감을 잡았다고 했단다. 뭐 그래봐야 논문에 나온 결과를 풀어서 말해줬으니 그게 다 아니었을까라고 되물었는데, 이 작자 말로는 1월 말에 있을 팔로우업 미팅에 나와 알레한드로가 다시 와서 디스커션에 참여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물론 나는 따로 오피셜 하게 메일을 받은 상황이 아니라서, 그냥 또 립서비스마냥 나는 양탄자 태워주는 것 같은데 하고 그가 한 말들을 그냥 한 귀로 흘려 들었다. 그런데 웬걸. 그 대화를 하고 난 며칠 뒤에, 핀란드 연구 팀의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교수님께서 미팅 초대 링크와 다음번 미팅에서 내가 해 주었으면 하는 일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적은 메일을 보내 주신 것이었다. 어찌저찌 이런 큰 미팅에서 사고를 치지 않아 다행이라 해야 할지 싶어, 그렇게 하겠다고 답을 보냈다.
정말 이 귀한 자리에 누추한 제가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경험을 했다. 11월 중순이면 벌써 두어 달 전이다. 지금까지도 이 경험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는 건, 아마도 연구자 인생에서 한 단계 바깥으로 나가 보았던 드문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