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 실험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시간대에 교수님이 아니면 저 말고 들어올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순간 낯선 기분이 스쳤습니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수줍은 표정의 첫 후배가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사과(예명)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첫인상은 그저 귀여운 사과 같은 모습에 긴장감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저도 어색했지만,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고 기본 루틴부터 차근히 알려주었습니다. 설거지, 소모품 채우기, 서랍 위치와 도구 이름 외우기—겉으로는 사소해 보이지만 실험실이 유지를 위해선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예비 꼰대 같은 말을 하며 잘 부탁한다고 말했습니다. 사과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며 조그맣게 주먹을 쥐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는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들어왔습니다. ‘나 이제 선배구나..’ 하는 설렘, ‘내 일이 조금은 줄어들겠지’ 하는 기대, 그리고 ‘교수님께 받은 가르침을 최대한 온전히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지금 돌이켜보면, 후배가 생기면 일이 반으로 준다는 생각은 꽤 큰 착각이었습니다. 실제로는 ‘가르치는 일’이 하나 더 생기기 때문입니다.
첫 실험 티칭 전날 밤, 저는 실험 원리, 그림, 프로토콜, 세부 팁까지 자료를 한가득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단백질 정량하는 방법인 Bradford assay를 알려줄게.”
그림을 보며 원리를 설명하고, 시약 위치와 사용법을 알려주고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지나 있었습니다. 사과의 눈빛은 이미 멍했습니다. 속으로 ‘언제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지? 이럴 리가…’ 싶었지만, 일단 준비한 과정대로 설명을 마친 후 제가 실험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사과 차례가 되자, 제가 가장 강조했던 주의점부터 실수했습니다. 노트에는 빨간펜으로 주의할 점을 적어놓고 별표가 세 개나 되어 있었지요. ‘분명 적었는데…’ 생각이 들면서 의아했지만,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지. 아직은 모든 게 처음이니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사과는 여러 실험을 부지런히 배우고 공부했습니다. 랩 미팅에서 한 주 동안 배운 내용을 정리해 보고했는데, 사과는 교수님의 질문 시간만 오면 당황을 했습니다. 답변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고, 교수님의 한숨이 길어질수록, 사과는 점점 더 위축되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우리 공부했잖아! 저거 알고 있잖아! 대답할 수 있어!’ 라며 응원과 함께 심장도 두근거리고 있는 그때, 교수님의 시선이 제게로 왔습니다.
“랩장아, 이건 누가 이렇게 알려줬지?”

출처: pixabay.com
그 질문은 부끄럽고도 아팠습니다. ‘분명 이렇게 알려줬는데 왜 저렇게 말하지… 내가 어디를 놓쳤을까.’ 저는 최선을 다해 설명을 보탰지만, 교수님의 짧은 한숨은 내 설명이 가벼웠다는 사실을 말없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미팅이 끝나면 저는 늘 ‘두 번째 미팅’을 했습니다. 사과가 잘못 이해한 부분을 바로잡고, 결과 해석을 다시 정리해 줬습니다. 혹시 ‘왜 미팅 전에 하지 않았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했습니다. 분명 말했지요. 그러나 그 설명방식은 사과 머릿속에 이해를 시키는 것까지는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의 ‘사과 집중교육 프로젝트’는 사실 그 친구를 그저 바싹 말려버리는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몰랐던 제 한계였지요.)
사과는 실수를 경험할수록 더 꼼꼼해졌습니다.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모든 단계가 머릿속에 완벽히 정리되고, 마음 준비가 되어야만 실험 시작을 했습니다. 문제는 그 준비가 끝없이 길어졌다는 점입니다. 30분이면 되는 실험 준비가 반나절이 걸렸고, 그렇게 준비하고도 첫 단계에서 실수할 때가 잦았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저는 말했습니다.
“사과야, 그 정도로 준비하고도 실수한다면, 그건 네가 부족한 게 아니라 경험이 부족한 거야. 간단히 정리하고 일단 시작해 보는 게 어떨까? 자주 부딪히는 게 가장 빨라.”
그러나 사과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 친구는 열 번 중 열 번의 결과가 같지 않으면 데이터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는 성향이었습니다. 자신의 손을 믿지 못하는 두려움이 실험대 앞에서 발목을 잡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저도 조급했다는 점입니다. 제 실험은 밀리고, 사과의 진도도 더디니, 어느새 제 목소리도 커졌습니다. 그리고, 사과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가르친 게 아니라 압박했구나.
저는 카드를 쥐여주며 말했습니다. “커피 한 잔 하면서 기분전환하고 천천히 들어와.” 사과가 나간 뒤, 혼자 남은 실험실에서 미안함과 짜증, 책임과 불안이 뒤섞인 제 마음이 저도 혼란스러웠습니다.
며칠의 어색함 끝, 저는 먼저 사과한테 외식을 제안했습니다. “오늘은 나가서 같이 맛있는 점심 먹을까?”
사과가 평소 좋아하는 식당으로 갔고, 카페까지 이어진 시간 동안 사과는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선배 말이 맞는 걸 알아요. 그런데 막상 실험하려 하면 무서워요.”
그제야 분명해졌습니다. 사과는 두려웠던 것입니다.
저는 제 길고 복잡한 설명 방식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실험 원리를 더 공부하고, 짧고 쉬운 영상 자료를 먼저 보내주었습니다. 사과는 영상으로 먼저 이미지를 익히고 → 제가 핵심만 요약 → 시연 → 직접 실험해 보기 순서로 정리했더니, 사과의 손이 조금씩 가벼워졌습니다.
어느 날, 실험대 쪽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선배! 성공했어요!”
저는 벌떡 일어나 마치 제 실험이 성공한 듯 기뻐했습니다. “축하해! 잘했어!”
지금 돌아보면 우리의 시작은 우당탕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 덕분에 저는 가르치는 법을, 사과는 홀로 실험하는 용기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사과는 단순한 ‘첫 후배’가 아니라 함께 성장한 동료로 남아 있습니다.

출처: 글쓴이제공_우리의 추억 같은 노을 저녁
그리고 어느 날, 교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랩장아, 사과랑 같은 학번 딸기가 학부연구생으로 오고 싶다네. 다음 달부터 같이 해보자.”
그 순간, 저는 또 한 번 큰 착각 했습니다.
‘딸기가 들어오면 일이 좀 줄겠지? 사과가 딸기를 가르치면 서로 더 성장하겠지?’
과연 그랬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