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만년랩장입니다.
추웠던 날씨가 조금씩 풀리더니, 이제는 곧 매미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계절이 되었습니다. 다들 따로 꽃구경을 가지 못하셨더라도, 학교 건물 주변에 피어 있는 예쁜 꽃들과 푸른 하늘을 보며 잠깐이나마 여유를 느끼셨길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달 있었던 일을 계기로, 제 생각이 많이 바뀌었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희 실험실은 2주에 한 번씩 돌아가며 논문 발표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학부연구생들도 논문을 준비해 필수로 발표하고 있습니다. 물론 후배들의 발표를 들으며 배울 점도 있었지만, 새롭게 공부하는 중인 학부연구생이나 석사과정 후배들의 발표를 들을 때면 어느 순간부터는 배우기보다 질문과 피드백만 하게 되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후배들의 발표는 점점 궁금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매번 비슷한 실수와 부족한 개념 설명을 보다 보면 “왜 저런 기본적인 부분도 확인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발표를 들으면서도 답답함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저희 교수님은 발표의 중요성을 굉장히 강조하시는 분이라, 데이터가 적더라도 한 명 발표에 기본 1시간 30분 이상이 소요되곤 했는데요. 어느 순간부터는 저도 점점 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논문을 읽었다면 저건 당연히 이탤릭체로 써야 한다는 걸 알았을 텐데...!’, ‘실험 디자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발표를 하는 건가?’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AI를 많이 사용하는 요즘에는 AI가 정리한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발표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이제 저도 머리가 커진 걸까요. 후배들이 논문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생각과 함께, 점점 발표를 듣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그러던 중, 박사 졸업 후 해외 포닥을 목표로 미국 여러 랩에 CV를 보내기 시작했고, 운 좋게 몇 군데와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랩에서는 제 연구 발표 인터뷰 이후 추가 인터뷰로, 해당 랩에서 진행 중인 연구를 공부하고 발표하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준비 기간은 단 1주일.
오랜만에 정말 집중해서 공부하는 순간이 즐겁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졸업 준비를 미뤄둔 채 오롯이 이 발표 하나에만 매달려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습니다. 합격하고 싶은 마음에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발표 자료를 만들었고,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초 개념까지 다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인터뷰 날이 되었습니다.
떨리긴 했지만 영어 스크립트도 준비해 두었고, 전체 스토리 흐름도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기에 ‘일단 부딪혀볼 수는 있겠다’라는 마음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말 처참했습니다... 하하
저는 발표 자료를 기반으로 스크립트를 설명하고, 중간중간 질문을 받는 형식일 거라고 예상했는데요. 간단한 스몰토크가 끝나자마자 교수님께서는 갑자기 개념에 대한 질문과 함께 데이터에 대한 제 생각을 물어보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준비했던 논문 내용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연관 개념에 대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저는 원래 순발력이 좋은 편이 아닌데요 ㅎㅎ; 영어로 인터뷰를 하니 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정말 기본적인 질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당황해서 그저 얼버무리기 바빴습니다. 애매하게라도 대답했으면 좋았겠지만, 포닥 인터뷰에서는 그 정도로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교수님은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가셨고, 대답하지 못하는 저를 보며 표정도 점점 좋지 않아 지셨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에는 ‘아... 망했구나. 이 기회는 끝났구나.’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인사를 하고 줌 미팅을 나왔는데, 한동안 모니터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1주일 동안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 같아 속상했습니다. 새로운 개념이라고 해도 제 연구와 어느 정도 연결되는 분야였는데, 결국 저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으니까요. 확실하진 않지만 교수님께서는 제 지식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의 반응과 사고 과정까지 함께 보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결국 그 랩의 오퍼를 받게 되었거든요..ㅎㅎ
하지만 인터뷰가 끝난 뒤 결과 메일을 받기까지 꽤 오래 걸렸고, 그 시간 동안 저는 제 자신을 많이 돌아보며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어느 순간부터 후배들을 이해하지 않고 너무 쉽게 판단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요. 그리고 바로 다음 주 논문 미팅에서, 저는 발표하는 후배들의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동병상련이었을까요, 처음 접하고, 새롭게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을.. 제가 된통 혼나서 그랬던 걸까요? 감정이입이 됐던 것 같습니다.
발표하고 중간중간에 들어오는 질문에 흔들리는 동공, 빨개지는 얼굴, 논문을 계속 찾아보지만 긴장해서 제대로 찾지 못하는 모습이 꼭 인터뷰 때의 제 모습 같았습니다. 발표가 끝난 뒤 축 처진 어깨로 나오는 후배를 보며 저도 모르게 말을 건넸습니다.
“고생했어. 지금 배우는 중이니까 당연해. 이해 안 되는 거 있으면 편하게 물어봐.”
그리고 제 인터뷰 썰을 들려주었습니다.
“난 실전이어서 문제였지만ㅋㅋㅋ 논문미팅은 연습 시간이니까 너무 기죽지 말자 우리!”
“나는... 떨어지면 뭐… 나랑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다른 곳 도전하면 되지! (그러나 눈물이... 땀인가...?)”
다행히 좋은 기회를 얻게 되어 저는 올해 해외로 나가 새로운 연구실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저를 선택해 주신 교수님께 실망이나 후회를 안겨드리지 않도록 남은 시간 동안 후회 없이 준비해보려 합니다.
이번 일을 통해 저는, 어느 순간 올챙이 시절을 잊은 채 처음부터 팔다리 네 개를 가진 개구리였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행히도 박사가 되기 전에, 그리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이런 마음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출처: Pixabay
제목: "나는야 팔다리가 네개! 완성된 개구리지!"
다들 저처럼 오만함과 자만심으로 눈이 가려진 개구리가 아니시길 바라며, 우리의 올챙이 시절을 떠올리고 현재 올챙이인 친구들을 조금은 이해해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후배들도 각자의 속도로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 속에 있겠지요..? 아직은 서툴고 부족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버티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직 올챙이인 여러분도 너무 주눅 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 멋진 개구리가 되어가는 중이니까요^^..
혹시 후배와 관련된 고민이나 듣고 싶으신 주제가 있으시다면 답글 부탁드립니다. 제 학위 시절 동안 겪었던 이야기들 중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