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석사과정과 학부연구생을 여러 명 받게 되었고, 졸업 시기와 맞물려 ‘선배’라는 위치에 조금씩 적응해 가던 즈음이었습니다. 그때 제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석사 친구들을 가르치거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줄 때면, 예전에는 학부생들 앞에서 말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리를 옮겼던 저도 어느 순간 상황을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지적하게 되었습니다. 후배의 실수와 실험의 실패가 곧 제 잘못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저는 점점 더 예민하고 날카로워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실험실 안에 냉랭하고 싸늘한 공기가 흐르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괜히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오전에는 웃으며 “오늘도 파이팅 하자!”라고 시작하지만, 오후가 되면 다시 열이 오르고, 퇴근할 때쯤에는 “오늘 소리 높여서 미안했다. 너도 고생했고, 내일은 조금 더 집중해서 해보자.”라고 말하는 하루. 이런 날들이 반복되다 보니, 밤에 잠들기 전이면 하루 동안 화냈다가 참았다가 웃었다가 했던 제 모습이 떠오르며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후회와 반성, 그리고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짜증이 뒤섞인 마음이었습니다. 스트레스를 핑계로 매일 밤 맥주 한 캔은 꼭 마시고 자는 생활도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화내지 말고, 잘 알려줘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가지만, 사람이 많아질수록 한 명의 실수는 제게 여러 개의 ‘문제’로 다가왔고, 그 상황은 다시 제 감정을 원점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무도의 정준하 짤입니다..ㅋㅋ)라는 마음이 들었을 때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후배들과의 거리를 살짝 넓혀보려고 했습니다. 너무 관여하지 말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정말 ‘선배’의 역할만 해보자고요. 하지만 한 명의 선배 아래 여러 명의 후배가 계속 바뀌며 들어오고, 인수인계가 연결되어 전달되기보다 한 사람에게서 계속 뻗어나가는 구조는 저에게 책임감을 더 크게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감의 무게는 저를 더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조금 거리를 두자 분위기는 살짝 부드러워졌지만, 어색한 기류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다 같이 학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적절한 타이밍이었지요.
실험실을 벗어나 바다도 보고, 학회장을 함께 돌아다니고, 다른 실험실 사람들을 만날 때면 자연스럽게 “우린 한 팀!”이라는 소속감이 생겼습니다. 서로를 소개하고, 챙기고, 저녁에는 술 한잔 하며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일상 이야기와 연애 이야기를 풀어놓았습니다. 예전의 즐거웠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출처: 글쓴이 제공
다음 날 점심, 사과가 말했습니다.
“톰토야, 너 랩장선배한테 잘 보이고 싶어~? 내가 꿀팁을 알려주마!”
“랩장선배는 말이야, 찬물? 아니 미지근한 물로 준비해. 그리고 면 요리 좋아하시니까 메뉴 고를 때 면 위주로 생각해 봐!”
ㅋㅋㅋㅋ 이 문장을 보신 독자님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옙!!” 하고 당차게 대답하는 톰토에게 사과는 이어 말했습니다.
“우리 곧 졸업하니까, 랩장선배 네가 이어서 잘 부탁해. 선배 안 힘들도록 잘 배우고, 너 할 일 잘하면 좋겠어.”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저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누군가는 “너 맥인 거 아니야?”라고도 했지만, 저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늘 제가 이끌어야 할 후배라고만 생각했는데, 후배들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저를 서포트하고, 지지하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저를 그렇게 잘 알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 학회에서 저는 구두발표를 했습니다. 긴장한 채로 4명의 후배들을 번갈아 보며 발표를 마쳤고, 운 좋게도 수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이름이 불리던 순간,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 네 명이 가장 크게 환호하며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그 어색했던 시간은 학회를 통해 잠시 환기되고, 우리는 다시 리프레시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했던 ‘후배이자 동료’가 있다는 사실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스트레스도 조금은 풀렸고, 후배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려 애쓰고 있다는 걸 보니 조금은 더 이해하며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과가 급하게 들어와 말했습니다.
“선배… 큰일 났어요. 잠깐 실험실 같이 가주셔야 될 것 같아요.”
등에 식은땀이 났습니다. 급히 오피스에서 실험실로 내려갔더니 불은 꺼져 있고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공간 분리용 커튼을 걷는 순간,
‘빵!’
폭죽 소리와 함께 “축하드려요, 선배!”라는 외침이 터졌습니다. 후배들이 케이크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날은 제 첫 번째 논문이 게재된 날이었습니다. 조용히 나 홀로 설렜던 그 순간이 후배들 덕분에 더욱더 행복하고 특별한 날이 되었습니다.
후배를 ‘책임져야 할 존재’로만 바라볼 때, 후배들은 버겁기만 하고 저는 점점 날카로워졌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동료 없이 혼자서는 성장할 수 없는 하나의 학생일 뿐이었습니다. 후배들을 동료로 바라보는 순간, 제 어깨는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후배는 때로는 가장 큰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지만, 동시에 가장 든든한 동료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선배가 되어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후배를 맞이한다는 건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배우는 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선배 역시 성장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한 번은 믿어보는 마음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내가 어떤 실수를 했을 때나 돌이키지 못할 것 같은 일을 했을 때 '제발 이번 한 번만 잘 넘어가면 좋겠다...' 라던지 ' 나에게 한 번의 기회가 있었으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나도 사람인데 쟤라고 실수 안하리란 법이 있나라고 생각하며 한 번쯤 넘어가줄 수 있는 여유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네가 한번 해볼래?라는 한 마디가 후배는 자기를 믿어주는 것 같아 힘이 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져온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저와는 다른 스타일이지만, 또 다른 버전으로 잘 정리해 온 결과물을 보고 저 역시 못 할 거라는 불안이 후배의 성장을 막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다짐해 봅니다.
사람 때문에 힘들지 말자.
그리고, 내가 그 사람이 되지 말자.
이번 회차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