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선 글에서 여러 번 언급하였다시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영어에 관심이 많고, 항상 해외 생활을 꿈꿔왔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처음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림 같게만 느껴졌던 한자와는 달리 영어 단어는 금세 잘 외워지고,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습득하는 것에 재미를 크게 느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부모님께 말씀드려 원어민 강사가 있는 영어 학원에 등록하여 꾸준히 나갔는데, 캐나다인이었던 눈이 파란 벤자민 선생님으로부터 영어를 배우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거기서 만난 나보다 나이가 어렸던 미국인 동생과도 친해지게 되어 집에도 놀러 가보기도 했다. 크면서는 정답을 찾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영어 교육에 질리기도 했지만 언제나 나는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 살아보고 싶은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유학을 갈만한 형편도 아니었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해외 생활과는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다 학부와 대학원을 다니면서 어차피 시작한 이 길에 끝을 보고 싶어서 포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포닥만큼은 내가 그토록 원했던 해외에서, 그중에서도 미국에서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인생이 늘 그렇듯 처음에 거대했던 나의 희망은 점점 불씨를 잃어 꺼져가는 장작불 같았다. 그러던 중에 영국과 캐나다에서 교환학생을 한 적이 있는 친한 언니를 비롯해 여러 명의 친구들과 싱가포르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그 언니가 어딜 가서 든 막힘 없이 대화를 하는 모습이 참 멋있어 보였다.
나는 싱가포르에서 돌아오자마자 영어 학원을 찾아가서 1년 치를 등록했다. 사실 한 번에 긴 기간을 등록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있긴 했지만 기간이 길어질수록 할인율이 높았기 때문에 선택하기도 했고, 나 스스로 절대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1년 간 나는 매우 바쁜 생활을 했다. 다행히 회사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라 자유로워서 점심시간에 가서 수업을 듣거나 실험이 이어질 때는 퇴근하고 나서 가거나 주말에도 나갔다.
내가 다닌 영어 학원은 주로 영국 출신의 검증된 원어민 강사들이 speaking 위주의 수업을 하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영국 영어가 익숙하지 않아 더 어려웠지만 3개월쯤 지나자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는 나를 발견하고는 신기했다. 또 speaking 수업은 꽤나 스트레스였기 때문에 때로는 writing 수업도 들었는데, CV, cover letter 쓰기, 심지어는 환불을 요청하는 메일 쓰기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이때 나는 단지 writing 수업이 좀 더 쉽고 재미있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미국 나와서 주구장창 환불을 포함한 여러 이메일을 쓰는 일을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 나중엔 1:1 수업이 개설되어 credit을 더 많이 쓰긴 해야 했지만, 이것 역시 선생님께 질문도 많이 할 수 있고, 내가 말하는 것을 바로 교정해 주니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학원을 1년 간 다녔다고 영어 실력이 크게 느는 것이 체감되지는 않았다. 나는 왜 이렇게 영어를 못할까, 잘 늘지 않을까 하면서 학원 근처 청계천을 걸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패기 넘치게 1년을 등록했는데, 그만 다니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학원에서 주기적으로 전화를 하면서 내 progress를 확인하기도 했는데, 전화로는 더 잘 알아듣지 못해서 전화를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의 수업도 빠지지 않고, 드디어 1년의 시간이 지났다. 영어 실력을 떠나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수강한 스스로에게 뿌듯했다. 약간의 자유 시간을 누리다가 그나마 배운 것을 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온라인으로 원어민 강사와 1:1로 수업을 할 수 있는 플랫폼에 가입해서 하루 15-30분씩 일주일에 두세 번 틈틈이 수강했다. 짧은 시간이라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영어 울렁증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Keystone Symposium에 갈 수 있는 장학금을 받게 되었고, 미국을 나가는 게쉬 운 기회는 아니니 박사 과정도 끝날 무렵이라 포닥 인터뷰를 하나 잡았다. 학회는 콜로라도 덴버였고, 포닥 지원은 스탠퍼드로 캘리포니아까지 가야 했지만 아직 프로젝트도 마무리되지 않았고, 한국에서 1년 정도는 더 있다가 논문을 내고 나오려고 했었기에 인터뷰를 딱 하나만 잡았다. 당시는 2022년 초였고 코비드가 좀 사그라드나 했는데, 오미크론이라는 새로운 변종이 출현하면서 학회는 연기되었고, 결국 인터뷰만을 위해서 나오게 되었다. 기왕에 나오는 김에 디펜스도 끝났고, 여행 일정으로 3주를 잡고 왔다.
하와이를 제외한 미국 본토는 와본 적도 없는 나였기에 처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에는 너무나도 막막하고 두려웠다. 노숙자도 많고, 혼자서는 해외를 가본 적이 없었기에 낮 시간에만 여행을 하되 최대한 일찍 숙소로 돌아오곤 했다. 여행 중에는 입국심사를 하거나 음식이나 커피를 주문하거나 물건을 구입하는 것 외에는 크게 말할 만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대망의 인터뷰 날이 금세 찾아왔다. 나는 우버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역에 내려 Caltrain이라는 기차를 타고 팔로알토 역에 내렸다.
이때까지 만났던 분들이 모두 호의적이고 친절하셔서 더욱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입국심사 때 보통 샌프란시스코나 LA가 심사가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는데, 여행 목적을 말할 때 박사과정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하니, 입국심사관이 졸업 축하한다면서 즐거운 여행이 되라고 하면서 금방 마쳤고, 음식점이나 상점에서도 모두 친절했다. 우버를 탔을 때도 긴장을 풀어보려고 기사님께 내가 오늘 중요한 인터뷰가 있는데, 내 영어가 알아듣기 쉽냐고 여쭤보니 너의 영어는 완벽하다고 하시며 치켜세워 주셨다. 또 Caltrain을 타려고 샌프란시스코 역에 도착했을 때, 기차가 여러 개라 어느 것을 타야 하는지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역무원으로 보이는 분이 친절하게 끝까지 길을 알려주셨다.
지금 소속되어 있는 랩이 있는 건물까지 무사히 도착해서 PI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직접 마중 나오셨다. PI님은 영국 분이셔서 1년 간 다녔던 영어 학원에서 이미 영국인과 그 발음에 익숙해져 있어서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매우 친절하시고 살갑게 대해 주셔서 더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었다. PI님의 오피스에서 개인미팅을 먼저 했는데, 내가 박사과정 때 했던 연구에 대해 자세히 물으셨고, 또 자신의 랩에서는 무엇을 하고 싶고 기대하는지에 관해서 물으셨다. 자신의 랩을 왜 선택했냐고 물었을 때,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고 싶어서 영국인이어서 선택했다고 말하자 웃으시기도 하셨다. 물론 이어서 이 분야에서 유명하신 분이시고, 내가 하고 싶은 연구의 방향과 일치하다는 것을 열심히 설명했다.
분위기가 좋았던 개인 미팅 뒤에는 랩 멤버들 앞에서 내 연구를 소개하는 시간이 이어졌는데, 내가 미리 영어가 완벽하지 않다고 말씀드려 놓으니 PI님께서는 랩 멤버들에게 누가 OO (내 이름)에게 영어로 지적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한국어로 발표를 시키겠다!라고 엄포를 놓으시며 나에게 따스한 미소를 보내주시기도 했다. 발표 중간중간에 질문이 계속 이어졌고, PI님의 따스함 덕분인지 이날 신기하게도 영어가 더 잘 들리고 대답도 잘했다. 그렇게 나는 다음날 PI님으로부터 자신의 랩과 너의 연구 방향이 핏이 딱 맞으며 함께 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 1년 간 영어 학원 다니면서 흘렸던 눈물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기도 했고, 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모든 것이 보상받는 듯했다.
이렇게 인터뷰는 성공적이었으나 막상 미국에 나오니 모든 것이 어려웠다. 가장 처음에 와서 social security number라고 각 개인에게 발급되는 고유 번호가 있는데, 한국의 주민등록증 같은 역할과 비슷하고, 세금이나 여러 업무에서 사용되기에 이를 받아야 하는데, 담당하는 정부 기관에 가야 했다. 당시도 아직 오미크론의 여파로 마스크를 껴야 했고, 본인 외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올 수 없어서 너무 긴장하며 갔지만 무사히 잘 발급받았다. 그다음은 은행 계좌를 개설하러 은행에 갔는데, 내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용어들과 말을 하니 좀처럼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여기서는 도움을 받아서 개설했다. 그 외에도 집을 계약하러 갈 때, 학교에서 행정 직원과 의사소통을 해야 할 때 등 어려운 난관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막상 랩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엔 구성원들이 다양한 나라에서 와서 발음을 알아듣기가 너무 어려웠다. 미국, 영국, 캐나다, 멕시코, 중국, 네팔에서 온 친구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내가 익숙한 발음 외에는 알아듣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 마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알아듣고 있긴 하지만 또 새로운 국적을 가진 구성원이 생기면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또 PI님과 2주에 한 번 개인 미팅이 있어서 처음에는 발표 슬라이드, PI님의 이해를 돕기 위한 요약본, 내가 말할 것들을 적은 대본 등 여러 가지를 준비하느라 밤을 새기 일쑤였고, 부담이 너무 크게 느껴져 미팅이 취소되기만을 바랐었다. 또 랩 내에서 함께 프로젝트 미팅을 하거나 공동 연구를 하는 다른 연구팀과의 미팅에서도 zoom meeting으로 만나니 더 알아듣기가 어렵고, 항상 포닥으로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자리에 있다 보니 의견을 제시하고 미팅도 주도적으로 해 나가야 해서 언어의 장벽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보다 더 부담이 되었던 것은 여름에 internship program으로 랩에 배정되어 오는 고등학생들에게 실험을 가르치거나 랩에 rotation으로 3개월 정도 머물거나 교환학생으로 오는 대학원생들을 가르쳐야 할 때였다. 한국에서 대학원생일 때도 학부나 석사 학생들을 가르쳐 보기는 했지만 바쁜 내 시간을 쪼개서 가르치는 게 부담되는 정도였지 언어로 인한 장벽은 없었지만 미국에서는 내 연구 시간만으로도 부족한데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지 하루하루 생각하고 구성해야 될 뿐만 아니라 언어도 불편하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어려울 때도 있고, 아예 무슨 말과 단어를 사용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어서 더욱더 막막했다.
그래도 고등학생들의 약 6주 간의 internship 기간이 끝나고, 포스터 발표를 하는 날에 한 명 한 명 단상으로 나가 소감과 감사 인사를 말하는데, 나의 이름을 언급하며 Dr. OOO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말했을 때는 해냈다는 성취감과 보람으로 가득 찼다. 또 rotation이나 교환학생으로 왔던 대학원생들과는 그 기간이 끝나도 한 번씩 만나서 같이 식사하거나 또 교환학생의 경우 그 학생이 사는 도시에 여행 갔을 때 만나서 시간을 보냈을 때 미국 내에 다른 지역에 좋은 친구가 생겨서 뿌듯하기도 했다.
올해는 나와 남편에게 선물 같이 아기 천사가 찾아왔다. 그래서 병원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데, 처음에 온라인으로 여러 가지 정보를 기입하는 단계가 있었는데, 주 언어가 무엇인지를 설정할 수가 있고, 나는 한국어로 해 두었다. 그랬더니 병원 방문할 때마다 통역 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데, 원하는 지를 물었다. 처음에는 해달라고 하니 화상으로 한국인 통역사 분과 연결해 주어서 의사소통을 하도록 해주었는데, 웬만하면 다 알아듣고 대답할 수 있어서 한 두 번 이용한 후에는 괜찮다고 거절했다. 물론 의사가 길게 설명할 때는 교포인 남편이 의사소통을 담당하지만, 최근에는 임신 중 영양소 섭취와 대사에 대한 컨설팅을 받을 때에 대사 분야를 하는 나의 연구와 관련된 용어를 많이 사용하기에 남편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하곤 한다. 나의 성장에 벅차 오름을 느끼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언어 장벽은 상상 이상으로 높고도 높다. 지난 3년 동안 한국인이 없는 랩에서 생활하면서 많이 늘었다고 생각하고, 다들 그렇게 이야기해 주지만 나 스스로는 여전히 못 알아듣는 말도 있고, 또 말을 해야 할 때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20-30% 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할 때가 많이 있다. 또 미국에서는 문의하거나 무엇인가를 해결해야 할 일이 있을 때 항상 전화로 하자고 해서 난감할 때가 많이 있다. 그래도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처럼, 전화를 했는데 내가 알아듣고 말을 하고 해결을 했을 때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높디높은 장벽을 조금씩 무너뜨려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비록 평생 이곳에 살더라도 결코 다 무너뜨리진 못하겠지만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될 것이고, 오늘보다는 내일 더 나아질 모습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