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가더라도 확실하게 가자”. 일본의 시스템은 한국에 비해 느리다. 준비된 인재가 아닌 키울만한 인재를 원하는 게 일본이다. 내 스펙을 어필하기보다는 내 사회성과 잠재성을 보여주는 게 일본에서는 통한다.
한국은 어렸을 때부터 공부 잘하는 사람, 똑똑한 사람으로 키우길 원하기에 학생들은 영어 성적부터 각종 자격증, 실무 경험을 쌓는 데 집중한다. 반대로, 일본은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 키워서 성장시킬 수 있는 사람을 원하기에 학생들은 공부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의 학생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짜인 듯한 사회생활 시스템을 따른다. 우선, 대학교에 입학하면 동아리 활동에 들어간다. 한국에서는 본 적도 없는 마이너 한 동아리도 많고, 같은 동아리라도 여러 개가 존재한다 (예, 테니스부가 5개나 존재). 동아리뿐만 아니라 클럽 활동도 별도로 있다.
일본 학생 대상 조사(2022) [동아리]
동아리 모집 시즌만 되면 신입생을 유치하기 위해 굉장히 경쟁적이고, 복수의 동아리에 들어가는 학생도 다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과는 다르게 동아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회비도 내야 하고, 장비도 갖추다 보면 학생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금액이 되기도 하며, 내가 가고 싶을 때만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닌 경우가 많다. 동아리의 짜인 체계 안에서, 단체 생활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참석이 강제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시험기간이더라도 동아리 활동 계획이 있으면, 수업을 빠지고도 동아리에 가는 학생도 더러 있다. 그래서 동아리 입부에도 신중함이 필요하다. 선후배 관계도 수직적이며, 어떤 동아리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취업에 유불리가 있기도 하다.
일본에서 최상위권 기업에 속하는 종합 상사의 경우, 체육 선수 출신이나 체육 동아리 출신을 굉장히 선호하고, 이는 체육회의 엄격한 조직 문화(선후배 관계, 감독의 지시를 따르는 경험, 팀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경험 등)를 경험한 것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높은 강도의 훈련을 통해 대회에 나가 입상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생도 많다. 심지어, 각 운동 분야마다 라인이 형성되어 있어, 특정 회사에 입사하는 난이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회사들은 형평성을 위해 공식적으로 선호도를 발표하고 있진 않다.
[아르바이트]
두 번째는 아르바이트다. 부모에게서 용돈을 받는 친구도 있지만, 받더라도 사회 경험을 위해 일부러 아르바이트 경험을 쌓는다. 이 경험은 취업과 직결된다. 사회적으로 기업이 선호하는 아르바이트 경험 순위가 매겨져 있기도 하다 (스타벅스가 1등). 카페나 호텔 등 쉽고 편한 일은 당연히 일본 학생들의 차지고, 편의점같이 힘든 직종은 외국인들이 많다. 취업할 때 아르바이트와 동아리 경험을 반드시 기재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학생들의 자기소개서는 아르바이트와 동아리 경험에서의 에피소드가 80% 이상을 차지한다. 다들 본인이 매출 증가를 엄청나게 시켰다고 기재해서 지겨울 정도이다.
[제미 (ゼミ, Seminar부터 유래)]
일본 대학의 특이한 문화는 제미라고 생각한다. 졸업 1~2년 전부터 지도교수 밑에서 다른 학생들과 특정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으로 치면 졸업논문을 위한 연구실 생활 정도 되겠다. 보통 2~15명 정도의 학생이 한 명의 교수를 중심으로 특정 분야를 깊이 공부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본인의 졸업논문이 될 뿐만 아니라, 취업에도 영향을 주는 중요한 과정이다. 학생들은 전공 지식을 배우고,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함으로써 협동심을 키우는 것이 목표다. 이는 하나의 공식적인 수업으로서, 교수들도 반드시 협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연구실 생활이 없는 문과 계열 학생들이 주를 이루며, 1년 이상 꾸준히 활동하고 여행도 다니는 독특한 제도에 많은 힘을 쏟는다.
이처럼 학생들은 성적을 올리기보다, 사회 경험을 중시한다. 취업 시에도 학업 성적을 요구받기보다 사회 경험을 어필하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업은 이들의 사회 경험이 입사 후 조직 융화력, 문제 해결력과 직결된다고 보고 굉장히 구체적으로 파고든다.
일본 학생들은 국제적으로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크게 노력하지도 않는 것 같다. 토익 성적을 제출하라곤 하지만, 필수는 아니며 일류 기업도 토익 800점 이상이면 굉장히 높은 점수라고 한다. 높은 성적이면 플러스가 될 뿐 낮은 점수라고 마이너스가 되진 않는다. 영어 공부에 집중하지 않으니, 학생들은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많다. 기업 설명회에서 학생들의 단골 질문은 “영어를 잘해야 하나요? 영어를 많이 사용하나요?”였다. 한국이라면 기본 소양일 텐데 말이다. 일본의 일류 제약회사 연구원들과 업무 미팅을 했을 때도 그들의 영어 실력 때문에 의사소통이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 나는 이 문제가 일본의 국제적 경쟁력을 낮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이런 환경에서 조금만 영어 실력이 돋보이면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조직 내에서 일본의 인재는 철저한 프로토콜 속에서 키워진다. 설령 아르바이트더라도, 업무 교육에 굉장한 공을 들이며, 학생들은 따라야만 한다. 프로토콜에 어긋나는 행동은 용서하지 않는 문화가 강하다. 약속 시간에 엄격하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언행을 엄청나게 싫어한다. 그래서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프로토콜에 적혀있지 않다면 대응이 늦어지는 편이다. 대신, 적응에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주고, 실수나 실패를 해도 기다려주는 문화이기도 하다.
단기간에 큰 성과를 내는 직원보다는 장기간에 걸쳐 회사를 위해 일해줄 수 있는 인재를 원한다. 그래서인지 초기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오래 일한다고 가정하고, 준비된 인재를 뽑기보다는, 조직의 입맛대로 방향성을 정해서 키우겠다는 거다. 한국처럼 실전에 바로 투입 가능한 중고 신입, 경력직 신입은 선호되지 않고, 백지상태의 신입 사원이 최고의 선택이다. 대신 입사 후엔, 사내 교육, 박사 학위 지원, 유학 지원 등 제도가 다양하다.
이는 대학원에서도 다르지 않다. 신입생은 실험 하나하나 선배나 교수님으로부터 프로토콜에 따라 교육받으며, 빠른 연구 성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연구실에서 수행한 모든 실험에 대해 프로토콜이 공유되어 있기도 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다들 나서서 도와주는 분위기이다. 그만큼 조직에서 협조성, 협동성이 크게 강조되는 문화가 일본이다.
이런 문화 특성 때문에, 일본 회사의 입사나 대학원 입학에는 자신의 전공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전공했는지보다,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떻게 해결했는지 그 과정이 중요하다. 업무에 관한 지식과 스킬은 입사해서 처음부터 배우면 된다. 뜬금없이, 문과 학생이 공과 대학원에 진학한다거나, 체육 전공 학생이 바이오 분야 대학원에 진학한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이유다. 직무 연관성에 따라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닌 순수 잠재성만 보고 채용하기에, 학업적 스펙 쌓기에만 집중하지 않는 일본 학생들이다 (물론, 연구직과 같은 특정 직종은 전공 일치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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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면역학을 전공 중인 박사과정 2년 차 학생입니다. 지난 "일본 대학원 도전기"에 이어, 어느새 2년 차 박사과정생이 된 저의 '일본 대학원' 경험을 전달드립니다. 한국과는 사뭇 다른 일본 대학원 문화와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