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같이 먹는 치킨, 그리고 완벽한 착각
연구실의 하루는 계절을 타지 않는다. 창문 없는 실험실 안에서 우리는 형광등 불빛에 의지해 시간을 가늠한다. 아침 9시에 출근해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 마지막 원심분리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누군가 묻는다. “선배님, 오늘 저녁 뭐 시킬까요?”
그 말은 어느 순간 일과처럼 반복되는 평화로운 신호였다. 메뉴는 대개 치킨이나 피자, 혹은 배달이 빠른 짜장면이다. 우리는 대학원생 사무실로 이동 뒤, 책상 위를 치운 뒤 신문지를 깔고 치킨 상자를 펼친다. 실험 장갑을 집어던지고 닭다리를 뜯으며, 70% 에탄올 분무기로 손을 소독하는 농담을 던진다. 컵라면 물을 맞출 때조차 “이건 0.1ml 단위까지 정확해야 해”라며 피펫을 쓰는 시늉을 하고, 누가 더 정확하게 물을 맞췄는지 괜히 실험 데이터를 검증하듯 따져 묻는다.
그 시간만큼은 데이터의 수치보다 실없는 농담이 더 많이 오간다. 지도교수님의 독특한 말투를 흉내 내며 낄낄거리고, 학부 시절 저질렀던 시약 폭발 사고 같은 서로의 흑역사를 보물찾기 하듯 끌어내어 웃음거리로 삼는다. 실험이 처참하게 망해버린 날은 오히려 목소리가 더 커진다. “야, 오늘 데이터는 그냥 현대 미술이라고 생각하자!”라며 호기롭게 웃어넘길 때면, 우리는 엄격한 위계가 존재하는 연구실 구성원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또래 친구처럼 느껴진다.
선배인 나는 그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남몰래 안도했다. ‘그래, 이 정도면 나도 꽤 괜찮은 선배지. 우리 랩실은 분위기 정말 좋다.’ 나는 우리가 먹은 저녁 식사의 횟수만큼 관계의 두께도 두꺼워지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선배라는 위치가 주는 안락함 속에 갇힌 나만의 일방적인 착각이었다.
2. '성실한 선배'라는 이름의 압박
나는 후배들과 실험을 다양하게 공유했다. 단순히 “이거 해봐”라고 던져주는 게 아니라, 왜 이 농도의 시약을 쓰는지, 왜 하필 이 시간대에 샘플링을 해야 하는지, 왜 이 컨트롤 군이 논문의 논리를 완성하는지 세세하게 설명하려 애썼다.
내가 대학원 초반에 아무것도 모른 채 프로토콜만 따라 하다가 겪었던 그 막막함을 내 후배들은 겪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겪은 시행착오를 그들이 반복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선배로서 줄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설명은 늘 길어졌고, 과정은 강박적일 만큼 세밀해졌다. 화이트보드 가득 모식도를 그려가며 열변을 토하는 나를 보며 후배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것이 배움에 대한 열의인 줄로만 알았다.
같이 저녁을 먹고, 실험실 불을 끄며 퇴근하고, 늦은 밤 편의점에 들러 1+1 음료수를 나눠 마시며 나누는 대화들. 나는 그 시간들이 우리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어주고 있다고 믿었다. 아니, 내가 벽을 허물고 있으니 후배들도 기꺼이 그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확신했다. 적어도 그날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3. 내가 전해 듣는 사람이 되었을 때
어느 날, 연구실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후배들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내가 들어서자 웃음소리는 미세하게 잦아들었고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학술적인 내용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기분 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은 내 가슴에 차가운 구멍을 냈다.
함께 실험을 설계하고 밤새 데이터를 정리했던 그 후배가 정작 본인의 고민이나 실험 중 겪은 사소한 실수,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들을 내가 아닌 다른 원생에게 먼저 상담하고 있었다. 조언 역시 내가 아닌, 평소 실험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다른 선배에게 구하고 있었다. 나는 늘 가장 마지막에, 혹은 제삼자를 통해 “걔가 그렇다더라”는 식으로 소식을 전해 듣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더 아팠던 건 그들이 나를 정의하는 방식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열정적인 선배’가 아니라 ‘일을 많이 주는 스타일’로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방향을 구체적으로 잡아준다고 생각했지만, 후배에게 그것은 거절할 수 없는 업무 지시의 연장이었고,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무거운 가이드라인이었다. 내가 건넨 호의는 후배의 입장에서 '숨 막히는 감시'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비교 대상이 생기니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내가 보기에 그 다른 선배는 실험에 대해 책임감을 깊게 지기보다는 그저 가볍고 기분 좋은 말만 건네는 사람이었다. “잘될 거야”, “힘들지? 좀 쉬어” 같은 말들. 나는 실질적인 해결책을 주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함께 고민했는데, 후배는 왜 해결책도 주지 않는 그 사람을 더 편하게 느낄까. 처음에는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너한테 쓴 시간이 얼마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는 유치한 생각까지 들었다.
4. "선배는 저랑 되게 친한 줄 아는 것 같아요"
결정적인 순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분위기를 띄우려 던진 나의 농담에 한 후배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였다. “선배는 저랑 되게 친한 줄 아는 것 같아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뼈가 있었다. 그 말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벽을 낮추면 관계가 가까워진다고 믿었지만, 내가 벽을 낮추고 성큼 다가가는 행위 자체가 상대에게는 거대한 부담이자 위협일 수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장난을 치는 순간, 후배는 거절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인다. 선배의 농담에 웃어주지 않으면 분위기가 싸해질까 봐, 선배의 저녁 제안을 거절하면 내일 실험 교육에서 불이익이 있을까 봐, 그들은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춰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우정’이라고 믿었던 시간의 상당 부분은 사실 후배들의 ‘연기’ 혹은 ‘사회생활’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자각이 찾아왔다.
5. 선배의 자리, 거리의 미학
그 일을 겪고 나서 나는 나만의 기준을 다시 세웠다. 선배라면, 혹은 권력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먼저 친해졌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먼저 관계를 밀어붙이지 않기로 했다. 후배가 진심으로 도움을 구하거나 조언을 요청하기 전까지는 굳이 그들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냉정해지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다만, 내가 외로워서 혹은 내가 편해지고 싶어서 상대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선배의 호의는 상대의 상태와 상황에 따라 언제든 '권력의 압박'으로 번역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편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상대는 옆 실험실에서 똑같이 고통받는 동기다. 논문이 리젝 되었을 때, 교수님께 꾸지람을 듣고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 나는 선배도 후배도 아닌 ‘동등한 위치’의 사람을 찾는다. 나를 평가하지 않는 사람, 나에게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 사람, 그저 내 상황을 온전히 자기 일처럼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
후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나의 정교한 조언이 아니라 그저 “수고했다”는 공감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명확한 기준이 아니라, 틀려도 괜찮다는 무책임한 위로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6. 대학원은 우정을 쌓는 곳이 아니다
이 글을 읽는 선배 혹은 예비 선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대학원에서 우정을 전제로 관계를 시작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좋은 사람은 있다. 연구실에서 만나 평생을 함께하는 소중한 인연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걸 '당연한 권리'처럼 기대하는 순간, 서운함과 실망이 시작된다.
스트레스엔 마라샹궈우리는 모두 예민한 상태로 연구를 수행한다. 각자의 졸업, 투고할 논문의 임팩트 팩터,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가 걸려 있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는 작은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고, 사소한 오해를 눈덩이처럼 불리기도 한다. 같은 공간에 12시간 이상 머문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지여야 할 필요는 없다. 연구는 조건을 바꾸면 다시 시도할 수 있다. 실패해도 시약을 새로 만들고 기계 설정을 바꾸면 된다. 하지만 관계는 그렇지 않다. 한번 어긋나고 상처 입은 감정은 실험 데이터처럼 다시 세팅할 수 없다.
이제 나는 선배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한다. 선배는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지, 관계를 주도하는 사람이 아니다. 후배가 필요해서 문을 두드리면 그때 기꺼이 문을 열어주면 된다. 그가 오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그의 선택으로 존중해야 한다. 친해질 수는 있지만, 모두와 깊은 우정을 나눌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대학원 생활은 연구가 힘들어서만 버거운 것이 아니다. 사실 사람이 더 힘들게 느껴지는 날이 훨씬 많다. 인간관계에서만큼은 기대를 조금 낮추고, 적절한 거리를 남겨두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좁고 답답한 연구실이라는 공간에서 서로의 숨통을 틔워주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대학원은 실험의 테크닉을 배우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타인에 대한 기대를 조절하고 '적당한 타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혹독한 사회학적 수련장이다.